2. 수행,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5) 생각의 창조능력
저는 앞장에서 화두참선의 예를 들면서
한 생각에 입각한 다음
행동들이 자칫 그 한 생각에 매이면
수십 년을 그 길로 빠져들게 한다는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사실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다 그렇죠.
그런데 깨달아 보니까
진리라는 게 별게 아니고
[본래 그대로, 있는 그대로]더란 말입니다.
이것 참 알고 나서는 억울하지 않아요?
세상에 깨달았다는 분들
만약 깨달아서 옛날에 비해 이런저런 체험 외에
무엇을 더 새로이 얻은 게 있다면 말씀해 보세요.
제가 보장하는데, 결단코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나, 참나]는
모든 체험을 넘어서 있는
체험하지 않는 체험을 가진 자란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우리가 [입맛]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혀를 혹사시키는 수행과도 같습니다.
과연 입맛이란 무엇일까?
바로 이 생각에 빠진 사람들은 온갖 고행을 다 해봅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맵고, 짜고, 쓴맛까지 다 경험해 보면 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담백한 물맛을 보면 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일체의 아무것도 안 먹어보면 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입맛]은
모든 맛을 다 끊는다고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자극적인 것들을 많이 먹어본다고 알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혀와 더불어
있는 그대로 제 자리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보통 음식이나 음료를 마시면서도
우리가 깨어만 있다면
저절로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무른다면
입맛은 알지언정
진정한 입맛의 능력과 그 세계는 제대로 알지는 못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입맛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입맛을 제대로 알고 잘 즐기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아무리 입맛이 무엇인지 알았다 해도
평생을 같은 음식만 먹는 사람에겐
색다른 맛의 세계를 체험할 기회가 없습니다.
이 말은 다 같이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어떤 이는 아프리카 밀림 속의 오지에만 평생 갇혀 살고
또 다른 사람은 문명사회에 태어나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체험과 사랑과 여행 등을 맛보는 차이 같은 것입니다.
누구의 삶이 더 풍요롭고 다양한 것이겠습니까?
성공하기 이전의 오프라 윈프리나 성공한 이후의 오프라 윈프리는
다 똑같이 인간의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 전과 그 후의 그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깨달음을 넘어 거듭남의 문제가 있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도 성문, 연각, 보살, 부처가 있듯이
깨달았다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후에 존재의 능력을 발휘하고 실현하는 문제,
즉 거듭남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다른 말로 해서
[생각의 창조 능력]이라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생각은 그것에 우리가 걸리고 매이면
우리를 한없이 끌고 다닙니다.
우리가 그 생각의 본체를 발견하고 깨어날 때까지
그것은 우리를 한없이 헤메이게 합니다.
이때의 생각은 우리 자신에게는
매우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능력이랄 수가 있습니다.
수십 년 수행 끝에 돌아온 자리가
바로 원래 그 자리더라 하면,
그것은 설사 깨달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수행이라는 그 한 생각에
그만큼 스스로 끌려다닌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오늘날 한국의 불교나 수행문화가
너무나 이쪽에 치우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깨달은 이후의 경지에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의 그런 능력을 깨닫고 알아차리면
그때부터 우리는 [생각의 주인]이 됩니다.
평생을 제 생각에 끌려다니면서도
아직 그 진실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한마디에 눈치채고
자기의 본래 자리를 단숨에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입학 검정고시를
20년 걸려 합격하거나 몇 개월 공부해서 합격하거나
그 가치는 똑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생각의 주인이며 생각을 내고 들이는 나는
마치 세상을 다 비추는 거울이
거울 자신을 스스로 비추어 보지 못하듯이
그렇게 초월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색즉시공에만 매여
무조건 생각을 끊고 벗어나려고만 하기보다는
[공즉시색]의 진리도 알아서
균형을 갖고
어디에 치우침 없이
자기가 가진 능력의 하나인 생각을
오히려 [창조의 능력]으로 바꾸어 쓰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생각과 상념]을 [창조적]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은
비로소 [신]으로 거듭난 사람이며,
제 안에 신계를 창조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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