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야정견

(알라야 정견) 나를 깨우는 명상 #2-4 최초의 한생각

Buddhastudy 2024. 10. 16. 19:50

 

 

2. 수행,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4) 최초의 한 생각

 

제가 이 책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생각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것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진정 깨어나기가 힘듭니다.

 

이것은 수행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초의 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못 벗어나면

평생을 그 생각에 끌려 온갖 수고를 다합니다.

 

제가 어떤 수행 방법을 굳이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한 번 생각에 갇힌다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한다는 의미에서

예를 한번 들어볼까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불교는 화두 참선법 아니면 공부가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화두참선에 대단히 집착하고 올인하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 절에 머리 깎고 들어갔더니

바로 책 보지 말라 하며

모든 책을 덮고

바로 참선할 것을 지시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두참선법이

어떤 논리 하에 나온 공부 방법인가에 대해

한번 깊게 생각해 봅시다.

 

모든 수행방법은 사실 그 나름대로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와 그 논리를 갖고 있으니까요.

 

화두참선법은

우리가 원래 맑고 청정한 본심을 가진 부처인데

홀연히 번뇌 망상이 생겨 무명심이 일어나고

12연기에 의해 탐착이 일어나서

몸을 받아 지금 이렇게 중생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 삼라만상의 만물이 생겨져 나왔으니

우리가 고해의 바다에 들게 되었다는 기본 전제하에

우리가 이 마음을 깨끗이 닦고 또 닦아

미세번뇌망상까지 다 닦아

티끌 하나 없는

무념무상의 청정한 마음본심으로 돌아가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원래 깨끗했는데 더럽혀졌으니

다시 깨끗이 지우고 닦으면

본래로 돌아가 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두참선수행을 하다 보면

깨치기 직전에

모든 것을 다 모르는 상태의 미지라는 경지가 나옵니다.

다 끊어지고 다 모르는 이 상태를

어디로 가려고 나섰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야 하는지도 몰라서

그냥 다시 돌아오는 그 자리가

이 일체 모음의 자리인데

일체가 다 끊어지고 생멸이 다 단절된 자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모를 뿐이라는 자리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야

비로소 깨달음에 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번 이 논리를 가만히 살펴봅시다.

이렇게 일체 모름의 경지에 들었다면

그 수행자가 거기서 어떻게

어디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수행을 더 할 수가 있을까요?

이거 좀 이상하죠?

 

또 일체 모르는 그 자리에 간 수행자가

어떻게 이런 설법을 폭포수 쏟아지듯

전문용어로 유창하게 설법할 수가 있을까요?

이것은 자기모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기모순이 생기는 이유는

사실은 최초의 한 생각

공부란 이런 것이다라는

자기의 기본 생각을 아직 못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이 자기를 끌고 가기 때문에

다 몰라도 이 공부에 대한 생각만은 안 놓고

계속 붙잡고 있기에

또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말로 다 모르게 되면

자기가 사람인지 아닌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다 몰라야

앞뒤 말이 맞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이 또 되기 위해

수행을 더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또한 이렇게 단순히 깨끗이 닦으면

부처가 된다는 논리는

홀연히 생긴 무명번뇌가

부처가 된 후에 다시 또 일어나면 어떻게 하느냐?란 질문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대체 왜 이런 자가당착적인 문제가 생겨날까요?

그것은 왜냐하면 이런 수행 논리는

바로 색즉시공이란 생각에만

그 근거를 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화두참선이라는 거대한 수행법의 모든 것이

이런 논리 하에 구축되고 쌓아올려진 것이니

전체가 다 최초의 한 생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공즉시색도 마찬가지로

동등한 진리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일체의 만물과 생각이 다 본래 공한 것이다라는 전구이자, 동시에

그 공에서 일체의 만물과 생각이 다시 또 생겨나온다는 후구이기도 합니다.

이 후구에 관심을 기울여 보면

홀연히 생겨나는 무명번뇌

왜 생겨나는지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사실은 거기엔 다만 말이 무명번뇌이지

사실은 고정된 본래의 무명번뇌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만 제 생각에 매이고 걸려서

똑바로 서질 못한 것이었을 뿐

그래서 그 일어나는 상태의 생각을

다만 무명번뇌라고 이름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생각을 일으키고 그 생각을 쓰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능력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래 색즉시공이자 동시에 공즉시색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생각이 다 끊어졌다면

그것은 치매환자이거나

아니면 정박아이거나

아니면 일시적이지만 고도로 정신이 한쪽에 집중된

집중삼매 상태일 뿐입니다.

 

홀연히 생겨난 [무명번뇌]

우리가 그렇게 이름 지은 상태였을 뿐

사실은 그것이 본래 중생과 부처의 동등한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가 곧 보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진리란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상태이니

어디서 다시 무엇을 닦고 깨끗이 하고 할 여지가 더 있겠습니까?

 

다 최초의 한 생각에 놀아나서

여태까지 이런저런 수행과 체험을 하며

거기에 온갖 화려한 이름을 다 붙이고, 책까지 쓰고 있지만

사실은 다 아무것도 아니오

헛일만 한 것일 따름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수행이란 행위의 본질은

사실은 그 본질이라는 것이

우리가 만든 한 생각 속의 창조행위요

그에 의한 체험일 뿐이더라는 말입니다.

 

사실 모든 것은 다 이러합니다.

위빠사나든, 몽중일여든, 오매일여든

그 어떤 경지나 상태이든 간에

우리의 모든 수행이나 기도나 종교 활동은

다 그 본질상 우리의 창조 행위이자, 체험 행위일 따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더 집중해서

바라다보고 자각함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의 체험들일 따름입니다.

 

이 깊은 위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일체를 우리가 짓고 부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신비한 본성을

제대로 알아가는 첫걸음일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