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의 역사는 고려 대각국사 의천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대각국사 의천께서 바로 출현하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불교는 그 사상이 제대로 정립되었다고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장르의 가르침을 선과 교로 나누고 있습니다. 선을 한 사람들은 선이 최고라고 이야기를 했고, 교를 접한 사람들은 교가 최고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서로 부딪혀서 우월주의를 다퉜던 것이 대각국사 의천께서 출현하시기 전의 한국불교였다면,
대각국사 의천께서 바로 천태종을 개립하시면서 바로 교관총지, 교와 관은 결코 다름이 아닌 하나라고 하는 가르침을 펴셔서 이 고려불교를 통섭하셨던 분이 바로 대각국사 의천이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대각국사의 의천에 의해서 대립이 되었던 천태종은 그야말로 고려불교의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그리고 난 이후에 고려 말엽에 와서 바로 수유배불정책 이조가 건립되면서 숭유배불정책에 의해서 불교는 은둔의 불교가 일컬어 갈 수 밖에 없었고, 성리학이 발전을 한 시대가 이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종6년 때에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는 이름으로 천태종의 종맥은 역사의 은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날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조선불교가 존재했다라고 하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 선종과 교종이 있었는가 보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선교양종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묶어서, 종파의 개념의 불교를 없앴던 것이 바로 이조불교의 모습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500년 동안 은물 되었던 천태종을 구인사를 창건하시고 천태종을 중창하신 상월원각대조사님께서 바로 천태종을 중창하시면서 은물이었던 천태종이 역사의 맥에서 다시 그 맥을 띄우기 시작한 것이 구인사요, 근래 천태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상월대조사의 중창의 역사로 시작된 저희 천태종은 1700년의 한국불교의 모든 부분을 한부분도 상속받은 게 없습니다. 절 하나, 암자 하나를 받은 게 없습니다. 구인사에 그야말로 국유림을 무단점거 하시고, 그곳에 초막을 지으시고 그곳에서 수행을 하셔서 깨달음을 얻으셨던 상월원각대조사에 의해서 천태종은 중창의 맥을 가지고 다시 뛰기 시작을 했습니다. 잘 아시겠습니다 마는, 우리 천태종의 지역사찰들을 보면, 거의 이렇게 광수사 처럼 3층 건물, 4층 건물, 5층 건물 이런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라고 묻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왜 천태종 절들은 빌딩건물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많고, 왜 목조건물이 아닌 시멘트 건물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린 그럴 때마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1700년의 불교역사 중에 한부분도 상속받은 게 없고, 오직 대각국사의 사상 하나를 계승한 종단이 천태종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눈물겨운 역사가 우리에게 있다.
상월대조사님께서는 1945년 5월 단오 날에 구인사를 창건을 하십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상상하는 법당과, 우리가 생각하는 요사체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바람 겨우 막을 수밖에 없는, 불을 때면 연기가 방을 가득 채울 수밖에 없는 남루한 그런 초암법당에서 상월대조사께서는 수행을 하셨고, 그 공간에 깨달음을 공존하신 많은 중생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오기 시작했던 것이 구인사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구인사를 찾아오는 많은 신도들은 상월대조사의 가르침에 의해서 소원을 이루기 시작했고, 그 소원을 이루는 것은 거저 이루는 것이 아닌,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수행의 장르를 가르치기 시작했던, 주경야선의 가르침, ‘일체중생 실유불성’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모든 중생이 수행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 상월대조사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에 힘입어 수행을 경험하셨던 많은 불자들은 구인사에 살고 싶지만, 생계는 이어가야 되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고향에 돌아가신 그분들은 오직 상월대조사의 가르침대로 낮에 움직여 일했고, 저녁에 앉아서 수행하고 싶은데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기에 남의 집 사랑방에 모여 삼삼오오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분들의 정성으로 한푼 두푼 냈던 돈을 모아서 사궐세 방을 전세방을 전전하면서 그 종풍은 키워져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전국 어느 사찰이든지 가보면 반드시 시작했던 것이 어느 신도의 어느 사랑방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는 것이 천태종 지역사찰들의 역사의 시작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광수사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이 됐습니다. 이것이 천태종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였던 신도들이 저축하고 저축해서 땅을 한평 사고, 두평 사고, 세평을 사서 그렇게 사림을 늘리고 늘려서 지금 전국에는 250만의 신도가 모이는 대종단으로 거듭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왜 절을 시멘트건물을 짓느냐고 이야기를 하면, 그게 무슨 절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가끔 만납니다마는 저는 그럴 때마다 “당신 눈에는 그것이 시멘트 건물로 보이는지 모르지만, 나는 부처님의 생생한 법문으로 들리고, 부처님의 도량에 손색이 없는 진리가 그곳에 있다”고 저는 믿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내려준 역사의 산물에 취해 사는 것이 아닌, 우린 우리 스스로가 부처님의 진리를 써가고 있고, 그 진리의 주인공이고 싶어서 노력해가고 있는 우리 스스로가 긍지를 가지고 더욱더 발전하는 천태종의 불자들이 되어주시길 간곡히 호소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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