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보면 과거에 그가 어떠했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눈 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그가 어찌 그런 복을 받느냐?” 라고 질투심은 불러일으킬 수 있겠으나 결코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콩을 심으면 콩을 얻게 되어 있고 팥을 심으면 팥을 얻게 되어 있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도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지금 육도윤회 중에 인간이라고 하는 좋은 환경 속에 살고 있지만 같은 인간으로 살면서도 육도윤회의 근본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으로 살고 있는데도 짐승 같은 사람 있어요? 없어요? 정말 먹을 게 지천인데도 못 먹고 쩔쩔매는 사람도 있어요? 없어요? 쌓아놓고도 굶고 있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보면
하는 것 없이 잘 되는 사람들은
전생에 지은 공덕이 아주 풍부한 사람들입니다.
하는 것 없이 안 되거든요,
그것은 전생에 지은 업이라고 받아들이세요.
여러분들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요. 돈을 몇 푼 갖고 있는데 어떤 친구가 돈 빌려달라고 하거나 보증서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분명히 그놈이 돈을 떼어먹을 거 같은데도 돈을 빌려주고 싶은 사람 있어? 없어? 그런 생각 전혀 없어요? 분명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저놈은 돈 빌려주면 떼어먹을 놈이고, 저 사람은 도장찍어주면 절대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그 정에 못 이겨서 “그래도” 하고 한번 믿어줬다가 쫄딱 망한 사람 있어요?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와서 누구한테 원망을 하냐하면 스님한테 와서 원망을 해요. “스님, 세상이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나는 기도도 열심히 했구요, 봉사도 많이 했구요, 스님 법문도 많이 들었는데요, 왜 내가 그에게 도장을 찍어줄 때 찍어주지 말라고 절대 말렸어야 되는데 안 말려줬다.” 이거에요.
제가 그래요. 전생에 지은 업이다. 얼마큼 당신과 그가 업의 관계가 형성이 되었으면 그가 분명히 그럴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찍어줄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게 인과라고 우리는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면 그런 인과를 우리가 어떻게 하고 가야 될 거냐? 녹이고 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 인과를 녹이는 방법이 바로 지혜입니다. 열심히 기도하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보면 현생에 지은 것을 현생에 받는 것을 /현생보/라고 그래요. 우리가 현생보 받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현재 잘못해서 누구에겐가 잘못했다라고 벌을 받는 것을 현생보라고 이야기를 해요. 지금 좋은 일 하고 난 다음에 스님이 상을 주는 것은 뭐에요? 현생보에요. 절에 오셔서 열심히 기도해서 공부 못했던 아이가 공부 잘해서 출세를 했어요. 이게 현생업이에요. 현생에 노력해서 현생에 받을 수 있는 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농사를 지으면 봄에 파종해서 가을에 거두는 곡식도 있고, 봄의 파종에서 3년, 4년, 5년 6년 후에 거두는 곡식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올해 농사를 지어서 올해 받는 것을 현생보라고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고, 올해 인삼씨 넣어서 6년근 인삼을 캐려면 6년 후에 캐어야 되잖아요.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순생보/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아, 지금 지어서 다음 생에 받는 거니까.”
그다음에 /순차보/라는 것이 있어요. 지금 복을 지어서 지금 업을 지어서 다음 생에 받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 생에도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일컬어서 순차보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한생을 살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통해서 윤회하기 때문에 그 윤회의 업은 당장 눈앞에 나타나지만 미래에도 나타나고, 이것을 반복하는 것을 육도윤회라고 얘기하고, 그 육도윤회의 가르침을 이해를 해보면 “아 업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내가 지금 현재에 열심히 잘하는 것은 지금도 받을 수 있고, 다음 생에도 받을 수 있고, 그 다음 생에도 받을 수 있는 거다.”
현재 잘못하고 인생을 보면서 그가 잘되는 일이거든, “아, 그는 지금은 저렇게 살지만 언젠가는 그런 업이 반드시 온다. 고로 상대방이 어떻게 될 거를 생각하지 말고 내 자신을 잘 관찰해 볼 수 있는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죠. 남이야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말든. 부처님이 이와 같은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남을 볼 새가 없어요.
누구를 보면 됩니까? 나를 보면 되요.
그래서 조고각하라. 나를 봐라. 내 발 밑을 봐라.
그런데 자신을 보려고 하는 의지는 많이 갖지 않아요. 누구만 갖고 싸워요? 너만 갖고 싸워요. 그래서 남이 잘되는 모습을 보면 막 행복해야 되는데, 남이 잘되는 모습을 보면 배가 아픈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이런 모습들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심리학에 이게 나와요. 심리학자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그냥 똑같이 10만원씩 벌고 살 때는 늘 불만이 없데요. 그런데 어떤 놈이 갑자기 100만원 벌어오는 놈이 있으면 그때부터 배가 아파 죽는데요.
그런데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면 나는 10만원을 받고 살아도 100만원을 벌고 사는 사람에게 박수를 쳐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요? 안 아파요? 배가 아파서 뒤로 넘어가요.
바로 이 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질투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삶을 괴롭게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남이 잘되는 모습에 지극한 찬사를 보낼 수 있는 멋진 보살도를 행할 수 있는 그런 불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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