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번뇌를 이야기 할 때 꼭 앞에 108이라는 숫자를 붙입니다. 108번뇌. 여러 부분의 장르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번뇌의 개념을 이해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번뇌라는 것은 우리 생각은 한 가지만 생각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도 계속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것을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색성향미촉법 육경을 대해서 만나는 순간 마다 생각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월도 스님이 법문을 이렇게 하고 있거나 상담을 하고 있거나 이런 방송을 하고 있으면 항상 방송하는 그 순간에는 스님이야기만 집중을 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가끔은 눈은 월도스님을 바라다보고 있는데 집에 있는 가스레인지를 잠갔나. 안 잠갔나를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고,
지금 앞에 있는 스님이 법문을 하러 왔으면 법문만 하면 되는데, 월도스님이 법문하는 내용만 듣는 것만이 아니고 “옛날보다 늙었네. 안 늙었네.” “옛날에는 시커멓더니 희어졌네.” 이런 쪽의 생각을 하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보는 순간에 판단을 구하는 거예요. 보는 순간에. 그래서 보는 순간에 월도스님의 입을 보고 말에 집중을 하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거와 전혀 관계가 없는 생각들이 일어나요? 안 일어나요? 그것을 일컬어서 번뇌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번뇌는 시시각각 일어나는데, 눈으로 보는 순간에 이미 3가지가 딱 생각이 나요. 월도스님을 보는 순간에 “키가 작다.” 월도스님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크다.” 또 월도스님보다 뚱뚱한 사람은 “말랐다.” 월도스님보다 마른 사람은 “아, 보통 체격이다.” 뭐 이런 쪽의 판단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눈을 보는 순간에 그 한 가지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모든 대상을 통해서 판단을 하게 되어 있어요. 눈으로 보는 순간에 그 판단을 3가지로 이야기를 하는데,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 라고 판단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귀로 듣는 순간에 월도스님 목소리가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참 스님 목소리가 좋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성우 정도가 되는 사람들은 “별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준은 절대치가 있는 게 아니고 모든 기준은 상대적 기준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보는 안목이 각각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의 주인공은 '나'라는 사실을, 내가 세상의 기준인 거예요. 그래서 절대의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상대의 기준으로서 세상을 평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귀로 듣는 순간에 목소리가 좋으면 “더 듣고 싶다.” 그 목소리가 별로다 싶으면 “별로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정말 기분 나쁘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안 좋아요? 더 듣고 싶어요? 안 듣고 싶어요? 더 듣고 싶은 거예요. 누군가를 나를 비난하는 소리를 하면 그 소리를 듣고 싶어요? 안 듣고 싶어요? 안 듣고 싶어요. 싫다. 그 다음에 칭찬도 아니고 내 얘기도 아니고 그저 그렇다 그러면 그저 그렇게 판단하는 거예요.
눈으로 3가지를 판단하는 거예요. 귀로 들어서 3가지로 판단하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도 아주 진기로운 향내가 맡아지면 더 맡고 싶어요? 안 맡고 싶어요? 맡고 싶잖아요. 그래서 이 안이비설신의 육근, 육근이라고 하는 촉매가 나라고 하는 의식의 세계로 밖에 있는 경계를 끌어들여서 판단하는 것을 일컬어서 육근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육근은 혼자서 될 수가 없고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돼. 그 대상을 일컬어서 육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육경의 대상을 만나서 3가지로 판단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6x2=12. 12가지가 3가지로 판단하니까 36이 되고, 그 36에서 우리는 지금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겪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현재라고 이야기 하는 순간의 현재는 없어졌어요? 안 없어졌어요? 없어진 과거란 말이죠. 그 과거와. 지금 현재 느끼는 부분과. 또한 미래의 다가올 부분을 통해서 셋을 곱하면 108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108이라고 하는 숫자가 한순간도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108번뇌를 항상 안고 사는 중생일 수밖에 없고, 이 108번뇌라고 하는 장르를 청정하게 꺼내서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한순간에 안 되잖아요. 여러분도 해보셔서 알지만, 많이 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가 있는 고로, 열심히 노력하는 거 외에는 번뇌를 비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수행이고, 그 수행의 끝에 결실을 맺어 들이는 것이 지혜다. 그 지혜를 열매를 따기 위해서 번뇌라고 하는 잡초를 열심히 뽑아내는 자체가 상월원각스님의 이 멋진 불교였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열심히 정진하셔서 지혜라고 하는 튼실한 열매를 각자가 수확할 수 있는 불자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스님법문 > 월도스님_BTN즉문즉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11_6. 공부는 뒷전이고 가수나 연예인이 된다고 합니다. (0) | 2017.08.16 |
---|---|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11_5. 마음먹기 달렸다. 마음만 먹는다고 일이 해결되나요? (0) | 2017.08.16 |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11_3. 돌아가신 홀어머니께 참회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나요? (0) | 2017.08.14 |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11_2. 참회와 반성은 다른 것입니까? (0) | 2017.08.14 |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10_5. 결혼 전과 약속이 다른 며느리 (0) | 2017.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