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월도스님_BTN즉문즉설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18_3. 감내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이 온다는데 사실인가요?

Buddhastudy 2017. 9. 14. 20:50


그것은 제가 볼 때 이해하기가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근기에 따라서 어려움을 준다는 것은 안 맞는 것 같아요. 단지 내가 그 근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깊은 근기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를 보면 똑같은 몸무게와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산꼭대기를 숨도 안차게 뛰어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중간에 가서 헐떡거리고 주저앉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근기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근기는 본인 노력한 것만큼 나타나는 거라 볼 수 있어요. 그 근기가 세기 때문에 힘든 고통을 주고, 근기가 낮기 때문에 아주 참을만한 어떤 고통을 준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인생의 삶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에 노닐고 있지만, 단지 업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업의 차이는 있을 수가 있겠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쉬엄쉬엄 하는데도 잘 되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어떤 사람은 24시간 노력하는데도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지는 놈이 있어요? 없어요? 이런 것이 업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거겠죠. 그럼 이런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복이 있는 사람은

또 다른 복을 짓기 위해서 노력하면 되는 거고,

내가 업이 두터운 사람은

그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불자가 되는 것이지,

결코 누구에는 더 큰 것을 주고,

누구에게 적게 주는 것은 절대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업의 차이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쌍둥이도 달라요? 안 달라요? 다른 이유가 바로 그런 업의 차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 어머니가 자식을 잉태해서 낳을 때, “, 요놈은 좀 잘되게 해주고, 요놈은 조금 시원찮게 해달라.”는 경우가 있어요? 없어요? 10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잖아요.

 

다 잘되기를 발원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자식은 잘 되고, 어떤 자식이 잘 안 된다는 이유는 바로 업의 차이일 수 있으나, 업만 바라다보고 그냥 그렇게 세월을 일관하지 말고, 업의 이해했거든 또 다른 좋은 업을 위해서 노력해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업장소멸이라고 하는 것만 목적으로 살지 마세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복을 짓기 위해서 사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죠. “나는 복을 지을 거야.” 그런데 여러분, 복의 차이는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결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여러분, 복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거냐하면 부처님께서도 복을 짓기 위해서 노력하셨어요. 부처님 제자 중에 아나율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아나율은 잠이 참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느 날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는데, 아나율이 부처님 설법을 듣다가 졸았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참 공부도 잘하고 아주 쓸 만한 제자인데도 불구하고 잠이 많아서 법문을 하는 순간 조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아나율에게 지적을 했어요. “아나율이여, 너는 참 훌륭한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여래께서 법을 설하실 때 너는 졸더라.” 이렇게 지적을 했어요.

 

아나율은 너무너무 부끄러웠습니다. “, 위대한 스승이시여. 당신이 내게 이런 큰 사랑을 베풀어주심에도 불구하고, 제가 어리석게도 잠을 잤습니다. 제가 졸았습니다. 이제 다시는 잠을 자기 않겠습니다.” 그래서 아나율은 그때부터 잠을 안 잤어요. 그냥 눈을 똑바로 뜨고 잠을 안 잤어요. 잠을 안자다 보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눈에서 진물이 나오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눈에 안질이 생겨 그는 눈을 감지 않고 자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로, 오직 부처님 가르침을 눈뜨고 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가다가 눈에 병이 들어서 눈이 멀어버립니다. 눈이 멀어버린 아나율이 그렇지만 자기는 절대 마음으로는 자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갑니다.

 

아나율이 어느 날은 옷을 꿰매 입어야 되는데 바늘귀를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나율이 바늘귀를 눈이 소경이 되었으니까, 꿰고 꿰다가 안 되니까 소리를 쳤습니다. “여보시여, 누구 도반들이여. 나를 위해서 복을 좀 짓고 싶은 사람 내게 복을 좀 지을 수 있도록 해라. 내게 바늘귀를 꿰어서 복을 좀 지어라.” 이 얘기죠. 복을 짓고 싶은 사람, 내게 바늘귀를 꿰어 달라.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때 부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아나율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아나율이여, 그 바늘귀를 줘라. 내가 바늘귀를 꿰어서 복을 짓고 싶구나.”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때 아나율이나 제자들이 뭐라고 얘기 하냐 하면 부처님, 부처님은 이미 많은 복을 구족하셔서 사생의 자부가 되셨고, 복과 지혜를 넉넉히 구족하신 부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복을 짓기 위해서 바늘귀를 달라고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이때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그렇지 않다 아나율이여. 이 세상에 복을 구하되 나처럼 간절히 복을 구하는 사람이 없느니라.” 이렇게 얘기를 하세요. 이게 무슨 얘깁니까? 바로 복이라고 하는 것은 지어도 지어도 끝이 없는 부분이고, 이미 부처님께서는 그런 공덕의 주인공이 되어서 부처를 이루었다는 얘기거든요. 우리가 부처님을 부를 때 뭐라고 부릅니까? ‘복과 지혜를 양족하신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지혜가 되었거든 마땅히 업을 소멸하는 것에 국한하지 말고 복에 굶주린 사람처럼 열심히 복을 찾아서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불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죠?

 

우리는 복에 굶주린 사람이 되어야 되요. 지난 것은 절대 따지지 마시고,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복에 굶주린 사람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멋진 불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복짓는 불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