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은 본질이고
현상심은 본질에서 다시 현상이 이렇게 일어난 거예요.
이것이 무심과 평상심이
딱 균형을, 절묘한 밸런스를 딱 잡아서
무심과 평상심이 딱
눈앞에서는 무심과 평상심이 지금 같이 드러나고 있다, 이거예요.
모든 게 현상과 본질이 같이 드러나고 있다.
죽비가 모양은 현상인데
이게 재질은 본질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본질과 현상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모든 것이 본질과 현상이 만나서 일어난다.
무심과 평상심이 만나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거기에 대한 절묘한 감각이 생긴다, 이거예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그 감각이
갈수록 이렇게 분명해지는 것
그거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땅히 머무르지 말고 그 마음을 낸다.’
마음껏 살아라 이 말이에요.
결국 우리 공부는 잘살자는 거예요.
무심이 본질이잖아요.
근데 공부의 끝이 무심이 아니에요.
평상심이에요.
평상심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잘살자는 거예요.
대신에 이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은
무심에서 살면 잘 살아.
이해되나요?
유심에서 살면
유심, 욕망에 끌려다니는 삶은
굉장히 우리를 힘들게 하죠, 고통스럽게 하죠.
근데 무심, 텅 빈 채로
그 무심에서 지혜가 일어나서
그 지혜로 살아가는 것.
평상심
선정과 지혜
따라옵니까?
무심, 평상심이라는 말이나
선정과 지혜
선정지혜를 줄여서 정혜, 정혜쌍수, 정혜등지
등지_ 평등하게 지닌다
정과 혜를 평등하게 지닌다.
이게 전부 중도에 대한 밸런스에 대한 감각이에요.
본질과 현상에 대한
‘현상이다’ 하는데 현상 사라지잖아요.
그럼 사라지고 ‘본질이다’ 하면
또 현상이 또 이렇게 드러나 있어.
그러니까 여기에 대한 절묘한 감각이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본질과 현상 중에서
자전거를 타고 간다면
양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자전거가 넘어진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칼날 위를 걷듯이
참 이게 아슬아슬하지만
절묘한 중도에 대한 감각이 있어서
무심과 평상심, 본질과 현상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같이 지금 구현하는 그런 감각이 길러져요.
그러려면 먼저 자기 중심이
무심이라고 하는 중심이
확립이 되어야 돼요.
무심이 확립되려면
유심으로는 안 돼.
그러면 유심에서 무심으로 가려면
앉아야 돼.
이런 이치를 안다고 해서
그 마음이 비워지지는 않아요.
오케이?
앉아야 돼요.
앉아서 입정이라고 하는 거울을 몸에 딱...
정에 들어간다.
그래서 정력을 기른다.
정에 들어가서 있는 그 시간을 내가 늘려간다.
그러면 그 힘이 딴딴하면
이 경계에 마땅히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게 돼요.
이해되세요?
정력도 없으면서
‘이 경계에 내가 물들지 않는다’ 하고 아무리 뻥을
그럼 뻥인 거지
이해되나요?
딱 그 마음자리, 무심자리 우리 존재의 본질
거기에 딱 중심이 익어 있어야 돼.
그게 머리로 익는 게 아니고
가슴으로 내려와서
배로 와서
딱 단전에서
딱 확보가 되는 거.
그게 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는 흔들리게 돼 있어요.
그렇죠?
/이런 말에 깨달았다./
중도를 이렇게 표현했구나.
/언하에 대오하였다./
여러분 이 앞에
제일 시작해서 육조 혜능이 나무꾼 시절에
짐을 내려놓고 나무를 땔감을 여관에 가서 팔고
돈을 받고 나오면서
어느 손님이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다가
이 구절에서 깨달았다고 나오죠.
그때는 개오라고 표현했어요, 이 책에.
개는 열릴 개, 열려서 깨달았다.
요게 한번 이 자리를 한번 확인하는 것을 개오.
그러니까 혜안은 개오라고 표현을 했어요, 책에서.
지금은 이 법안은 대오라고 표현을 했다.
다르죠? 표현 자체가 다르죠?
그러니까 그런 거 아주 미세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이렇게 캐치하는 거예요.
/언하에 대오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가?
두 번째 깨달음의 내용은
/일체 만법이 자성을 여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만들었다./
두 번째 깨달음
첫 번째 깨달음은 본래무일물이었어요.
맞아요?
지금 여기서 신수의
현상에서의 깨끗해지는 상대적인 청정에 대해서
본래 청정, 본질 청정을 말할 때는
본래 무일물을 말했어요.
이거는 상대적인 청정
근데 지금은 세 번째가 시가 나오는데
시를 말하기 전에 지금 말하잖아요.
이걸 깨달아서 말씀을 올렸다.
뭐냐?
일체만법이, 모든 현상이, 자성을 여의지 않았다.
본질에서 일체 현상이 나온다는 거를
방향성을 보세요, 방향성.
처음에 깨달았을 때는
현상에서 본질을 본 거예요.
두 번째 깨달음은
본성에서 현상이
모든 현상이 본성에서 나온다는 것
그러니까 본질에서 현상을 보는 것
이 차이점이 있어요.
쉽게 말해서 이걸 비유할 때
현상에서 본질을 본다는 것을
‘당나귀가 우물을 본다’고 선에서는 이야기를 해요.
당나귀는 누구냐 하면
수행 도중에 있는 수행자를
그러니까 수행자는 자기를 낮춰서
우둔한 당나귀라고 불러요.
그러면 ‘당나귀가 우물을 보았다’
이 말은 현상의 입장에서 아직
에고의 입장에서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에고가 본질을 한번 딱 본 거, 확인한 거
그것을 당나귀가 우물을 본다
려처정
처는 흘깃 볼 처에요, 흘깃 본다.
당나귀가 우물을 흘깃 본다. 여기 혜안 처음에 본질을 발견한 걸 말한다면
그래서 제자가
“당나귀가 우물을 보았습니다” 하니까
스승이
“이제 시작이니까 공부를 이제부터 잘 지어가야 한다.”
잘 지어가야 한다는 내용은
선정삼매를 몸에 완전히 딱 해서
몸이 무심자리를 알아야 한다.
지금 들어옵니까?
운동할 때 처음에 폼을 배웠다, 이거예요.
그랬으면 폼이 몸에 익도록 해야 된다, 이거예요.
그래서 제자가 그때 질문을 했어.
“제가 폼을 알았습니다.
그럼 폼을 계속 열심히 갈고닦아서 몸에 익히면
그다음 어떻게 됩니까?”
했을 때, 스승의 답변이
“우물이 당나귀를 보느니라” 이게 바뀐다 이거예요.
색즉시공- 혜안
공즉시색- 법안
유심에서 무심으로 가는 것은 혜안
무심에서 평상심으로 현상으로 돌아 나오는 것은 법안
그래 되면 법안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본질도 법이고, 현상도 법이에요.
본질이 법이다 할 때는 다르마, 진리를 뜻하고
현상이 법이다 할 때는 에브리싱, 제법무아 이런 말 쓰지 않아요.
모든 것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죽비는 죽비라고 할 것이 없다.
왜냐?
죽비는 본질이 나온 거라서.
그래서 같은 법이 두 가지
본질을 가리키기도 하고
현상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둘 다 소화될 때를 법안이라 그래요.
이해돼요?
중요한 대목이에요. 그죠?
법이라는 말 하나만 제대로 알아도
굉장히 공부는 깊어져요.
처음에는 법이 진리인 줄 알아, 오케이?
근데 막상 진리를 터득하고 나면, 익어지면, 몸에 익으면
그 진리는 따로 없고
이것이 진리예요.
공은 따로 없고 색이 공이 되는 것.
그러니까 현상계에 대한 대긍정
처음에는 현상계를 부정해.
근데 현상계를 부정하는 것은 혜안
신수가 현상계에 대해서 열심히 하자고 할 때
현상계를 부정해서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할 때는 혜안
근데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한 번 더 공부가 더 열려서
그 법이 법의 자리에 있지 않고
모든 현상으로 지금 드러나고 있어서
이 세상은 본질도 법이고, 현상도 법이라서
법으로 통일되어 있구나 하고 똑 떨어지게
중도, 혹은 연기라는 말로
혹은 일심, 한 개 의식
이런 말로 딱 떨어지게 도로 돌아 나오는 게 법안
그래 돼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아까 식으로 말하면
유에서
유의 반대말로서의 무로 갔다가
그 무가 다시 유와 하나가 된 것을 지금 세 번째
다시
2번은 천안이에요.
열심히 현상에서 갈고닦아서 깨끗해지는 것,
1번은 천안
2번은 혜안
혜안에서 머물지 않고 다시 현상하고 돌아 나와서 하나가 되는 게 법안
그리고 이것이 마음대로 실천되는 게 4번 불안
이렇게 지금 육조단경에 첫머리에서
지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안
첫 번째 육안은 분별심
분별심에 대해서는 게송을 쓸 필요 없죠?
누구나 다 그런 평등하게 분별 잘하니까.
근데 천안은 신수 게송이 천안을 말하고
거기에 반대되는 본래 무일물의 게송은
유에 대한 반대로서의 무를 말하기 때문에 이것은 혜안
아직 반쪽짜리 무에요.
근데 그 무가 다시 유하고 하나가 되어서 된 진짜 무
그것을 법안이라고 하고
그 법안이 실천되는 세계
자유자재로 구사되는 세계는 불안.
그래서 요 네 가지 게송이
육조단경 첫머리에 나와서
확실하게 우리한테 공부의 단계를 일러주고 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1번 해야 돼요.
1번 하는 두 가지 방법
천안을 뜨는 두 가지 방법
첫 번째, 각찰이에요.
이건 보조국사가 아주 강조한 대목이에요.
첫 번째 각찰
각찰은 뭐냐 하면
각은 깨어서, 찰은 살핀다, 깨어서 살핀다.
요즘 말하는 위빠사나, 사띠 공부, 깨어서 살핀다.
이게 천안을 기르는 아주 중요한 공부법
그리고 각찰하고 + 외식제연外息諸緣
웬만한 인연은 좀 쉰다.
그 인연 따라다니면
본질을 놓치기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에
웬만한 곳은 쉰다
쉰다는 말을 휴,
휴식할 때 휴, 쉴 휴
헐이라는 말도 써요. 쉴 헐
둘 다 쉰다는 거예요.
휴헐
웬만한 인연은 이제 좀 쉰다.
그러니까 각찰과 휴헐
이게 천안을 기르는 방법이에요.
그러면 각찰은 일상에서 하기
들어옵니까?
일상 경계에서 각찰
깨어서 찰은 경찰이 살피는 사람이다 이거예요.
각_ 깨어서 살핀다.
뭘 살펴요?
생각, 감정이 요동치는 거를 살핀다.
살피는 힘을 가지면
생각은 가라앉죠, 딸려 가지 않는 것.
그래서 결국은 각찰의 목적은
각찰하는 자기로 돌아오기
생각은 따라나가 나가는, 집 나가게 되잖아요.
감정도 한 번 화가 뚜껑 열리면 막 밖으로 치닫거든
생각 감정은 밖으로 집 나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각찰하면 그거 따라 안 나가고 집에서 버티기.
그래서 나중에는 각찰의 힘이 강하면
돌아보면 거기가 집이에요.
거기가 무심자리예요.
지금 집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집은 무심자리를 말한다.
그러니까 본질의 자리다, 여기가.
그러니까 각찰을 일상에서 해야 돼요.
그리고 웬만한 인연은 좀 쉬어야 돼.
그렇게 해서 점점점점
우리 현상에서의 거친 번뇌가 찾아 들어가서
고요해지는 그 단계까지 점점...
하면 할수록 일상에서의 힘은 커지겠죠.
그러니까 그것만 잘 해도
거의 웬만한 어려움은 이겨낼 수 있어요.
그리고 이것이 명상이에요.
천안을 뜨는 것이 명상이에요.
근데 깨달음의 세계는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밖으로 안 나가면
자기를 돌아보게 돼.
회광반조
자기를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돼요.
그럼 여기가 감각이 생겨
여기가 나의 존재의 고향이네.
그러니까 이거를 일상에서는 한다.
그러려면 각찰의 힘이 커지려면
좀 웬만한 번잡한 인연은 좀 쉬어줘야 돼요.
이걸 하기 시작하면
이쪽으로 에너지가 모여요.
놀랍게도 하기 시작하면
천지가 도와줘.
천지만 도와주는 게 아니라 천지신명이 도와줘.
이해되세요?
계속 그쪽으로 인연을 만들어줘요.
그래서 좋은 도반, 좋은 선생님이 계속 나타나.
그러니까 그게 에너지가 그쪽으로 돌아가서
알고 보면
진짜 우리를 도와주려고 많은 사람들이 옆에 있는데
우리가 안 쳐다보는 것뿐이에요.
이제 그쪽으로 쳐다보기 시작하면
굉장히 많은 소스가 들어와요.
그러면 공부가 아주 집중도가 높아지고, 빨라져요.
그래서 “좋은 도반이 공부시킨다” 이 말이
부처님이 하신 말이잖아요.
도반이 100% 공부시킨다고 그러잖아요.
좋은 도반을 만나는 게 중요해요.
그러니까 그런 인연을
번잡한 인연을 줄이고
도반의 인연을, 도의 인연, 도연을 이렇게 길러가는 것
그런 것도 우리가 공부하는 요령이에요.
/마침내 오조께 말씀드렸다./
그러니까 두 번째 깨달음의 게송이에요.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구족되어 있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하고 본질에 대한, 자기가 본질을 확실히 본 거에 대해서 말씀한 뒤에
마지막 하나가 더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백미예요.
/자성이 능이 만법을 냄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앞에는 자기가 확인한 본질을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는 현상으로 돌아 나오는 거 보세요.
/자성이 능이 현상 만법을 만들어내는 것
이걸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일체유심조란 말이에요.
일체유심조를 일체가
의식이 만들어낸다고, 자성이 만들어낸다고 하는
이걸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하기자성본자청정何期自性本自淸淨
하_ 어찌
기_ 기대했겠습니까?
자성_ 스스로의 성품이
본자_ 본래부터 스스로 청정하다는 것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하기자성본불생멸何期自性本不生滅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생멸하지 않음을
본질은 불생불멸함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구족되어 있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이거는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갖추고 나온 걸.
참 신기하네요.
부처님 똑같죠.
깨닫고 보니까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부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일체중생이 똑같이 완벽하게 다 가지고 있구나.
그러니까 그게 우리 자성의 뜻이에요.
/그리고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 자체는 동요가 없어요.
왜냐?
차원이 달라요.
그런데 자성은 이런데
우리는 지금 반쪽은 자성인데
반쪽은 또 이렇게 몸을 가지고 현상으로 지금 또 드러나 있죠.
그러면 이것을 소홀히 할 수는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자성이 능이 만법을 냄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본질의 우리의 의식이, 방향이
분별되는 현상에 있다가
한 번은 본질로 한 번 돌려가 갔어요.
갔다고 해서 그 길로 끝없이 가는 게 아니라
여러분, 본질이 이렇게 확인되면
이게 본래 청정하고, 본래 생멸이 없고, 본래 구족되어 있고
본래 동요가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되면
우리 마음이 안심을 할까요? 안 할까요?
본래 그렇다면 안심할까요? 안 할까요?
안심하죠.
안심 뒤에는 뭐가 따르느냐 하면
깜짝 반전이 있어요.
본질은 지금 완벽하죠.
그리고 그것이 확인되면 안심이 되죠.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완벽해.
그러면 보세요.
우리가 본질을 건드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본질을 더 깨끗하게 할 필요
본질을 더 완벽하게 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본질을 놓는다고.
정말 본질이 확인되면
이제는 본질에 집착하지 않아도
보통 사람들은 본질을 아등바등 쥐려고 해요.
이거 이해되세요?
근데 처음에는 그래
워낙 시끄럽다가 고요한 걸 한번 보고 나면
거기에 집착을 또 하게, 본질에 집착을 하게 돼요.
근데 집착하다가 이게 익어지면
“어 이거는 내가 집착 안 해도 아무 상관이 없네”가 와요.
근데 이것이 그냥 안 오고
익어져야 와.
익어지지 않으면 이거 놓칠까 봐
이거 또 본질을 또
허공 중의 본질이라는 걸 또 만들어 놓고
막 이러고 있다 이거예요.
근데 익어지면, 몸으로 익어지면
그래서 몸으로 공부해야 돼요.
몸은 놓아요.
몸은 그 비밀을 알아.
“본질은 내가 어떻게 해도 아무 상관이 없이 완벽하구나”
그러면 더 이상 본질에 대해서 신경 쓸 일이 없잖아요.
그럼 현실을 잘 살게 되는 거야. 이제는.
관심이 공부 과정에는 본질적으로 쏠렸지만
딱 거기가 굳건해지면
다시 이렇게 반대로 나온다니까 이렇게.
법안의 의미는
그 방향이 다시 한 번 턴을 해서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그래서 보살행이라는 것이 여기서 펼쳐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공부는
본질적으로 가서 머무르는 게 목적이 아니야.
가봤자 거기는 아무 상관 없어.
처음부터 완벽했었어요, 사실은.
그러면 그쪽은 놓아버리고
이 현상에서 최선을 다하기.
근데 본질의 입장에서 현상을 봐야지
최선을 다할 수가 있어.
그래서 보세요.
처음에는 현상에서의 분별, 본질에서는 무분별.
근데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무분별후득지無分別後得智
무분별 후에는 지혜가 나와서
분별 무분별후득지
후득지를 가지고 평상심을 사는 거야, 여기서.
그거는 후득지의 분별을
참된 분별이라고 해요.
이해되세요?
그래서 공부는
인과에서 인과
본질에는 인과가 없어요.
그냥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어서
본질에는 인과가 동시라고 표현해요.
본질은 인과가
현상에서는 인과가 있죠?
시간이 있으니까.
본질은 시간이 없으니까 인과동시에요.
그런데 인과동시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인과를 다시 살아내.
그러니까 우리 공부는 인과를 잘 사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공부하는 사람이
본질에 취하게 되면
인과를 무시하게 돼.
그게 아니고
더욱더 인과에 충실하게 되는 게 공부예요.
지금 상황 이해되세요?
/무심도 한 겹이 막혀 있다.
평상심이 도다./
인과를 무시하면 안 되고
철저하게 공부가 되면 될수록
인과를 더욱더 잘 알고, 조심하고, 인과에 충실한 사람이 된다.
상황 이해되세요?
결국에는 한 번은 대부정을 하지만
그걸로 머물지 않고
대긍정으로 이 세상으로 돌아 나오는 거다.
그게 법안이다, 이거예요.
저리로 들어가는 건 혜안이지만
다시 나오는 것은 법안이...
그러니까 법안이 되어야 돼.
근데 법안이 되려면 한 번 혜안이 되어야지.
그러니까 공부가 어려운 거예요.
어떤 때는, 아직 혜안을 못 뜬 사람한테는 “부정하고 가라”
근데 거기에 머무는 사람한테는 “빨리 나와라”
부정하고 갈 때는 “입 닫아라”
지금 이해돼요?
지금 워낙 분별이 이거
분별이 워낙 수다 쪽으로 가니까 “입 닫아라” 하고
근데 입 닫아서 푹 익어 들어간 사람한테는 “이제 살아나라”
그 죽은 거야.
“죽은 데 머물면 안 돼. 다시 살아나야지” 하고 또 끄집어내요.
그러니까 조사들은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아직까지 들떠 있으면
푹 익게 지도를 하고
이제 익어서 어느 정도 푹 되어서
여러분, 막걸리가 불불불불 끓다가
착 가라앉아서 이제 변질이 돼서
맛있게 지금 익었다 이거예요.
그럼 먹어야지. 그거 그냥 둬?
먹어야지.
그러니까 딱 익은 다음에는
마음껏 사람들이 퍼먹게끔
자기를 그렇게 잘 익은 막걸리를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한테 제공하는 것
이게 지금 인간의 도리예요.
그래서 조금 어려운 것은
어떤 때는 부정해야 되고
어떤 때는 검증해야 되고
그게 사람마다 다르다 이거예요.
이해돼요?
그거를 명안종사는 가려서 지도를 그때그때 하기 때문에
이거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할 때
나도 살아야 되나?
아직 죽지도 못한 놈이 나도 살아야 되나? 하면
아니지, 죽어야지.
근데 죽어서 죽음에 집착하고 있으면 안 돼.
또 살아나야지.
그러니까 십자가의 고난, 부활
십자가의 고난을 겪을 때하고
부활할 때가 다르다 이거예요.
근데 고난이 목적이 아니다, 이거야.
부활이 목적이지.
십자가의 고난은 무심,
부활은 평상심
그러니까 이것을 잘 가려서.
그러면 이런 줄 알면
나는 착실하게 과정을 밟으면 되잖아요.
겉넘지 말고
그러면 내가 길을 잘 밟으면 저절로 길이 나타나요.
이걸 충실하면.
근데 건너뛰면 다시 돌아와야 돼.
그러니까 착실하게 내 자리에서 쭉 가다 보면
어느새 길이 열리고, 열리고, 인도해 줘요.
천지신명이 인도해 줘요.
보살과 천사들이 길을 인도해 줘요.
단 어떤 사람한테?
착실하게 자기 길을
정성을 들여서 걷는 사람한테.
그러니까 우리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대신에 내가 내 도리를 하는 거예요.
그 점만 놓치지 않으면 돼요.
톨스토이도 사실은 성경을 깊이 공부했거든.
그래서 토이스토이가 그랬잖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어디냐?
여기다
가장 중요한 시간이 어디냐?
지금이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사람
부처예요.
지금 누가 부처인가?
지금 이 순간 나한테 나타나는 그 사람이 진짜 부처.
우리는 눈을 가지고 둘을 동시에 본다.
이 공부를 하게 되면
동시에 본다.
현상인 모양도 보지만
내용인 본질도 같이 본다.
모양은 삼식이지만 저도 삼식이에요.
모양은 삼식이지만
본질은 지금 이 순간
본질이 이 순간 이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여러분
한 번 나타나고 끝날까요?
아니면 정말로 끊임없이 나올까요?
뭘 걱정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다 못 써요.
지금 나한테 닥친 사람을 부처로 내가 알아먹어서
좋은 관계를 맺기에도 바빠요.
이거 다, 인생을 다 못 써.
이해돼요?
근데 무슨 지나간 걸 가지고 뭘 해.
여기 없는 걸 가지고 뭘 해.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여기에 없는 것은 생각이에요.
생각 안에서만 존재해.
근데 여기 있는 것은 사실이죠.
지금 있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모든 사실은 본질이 인연 따라 나에게 주어지는 선물
선물, 프레젠트는
현재이면서 선물
지금 모든 것이 선물.
그러면 눈이 밝은 사람은
이 선물을 받을 거고
눈이 어두운 사람은 이게 선물인 줄 모르고 싸울 거고.
그러니까 세상에 바보 중에 이런 바보가 있나?
노땡큐하고 싸우고 있으니까 가난해지지
그러니까 정말로 풍요로운 거예요.
여러분 이게 진짜 풍요
내가 뭐 간절히 바래서 오는 풍요 말고
저절로 주어지고 있는 풍요.
이해되세요?
이거 눈이 없으면 결핍
이렇게 이거를 놓치고
계속 자기 신세타령 하는 결핍 속에 찌들어 살고
눈 뜨면 모든 것이 풍요로
같은 것이 결핍이냐? 풍요냐?
내 눈에 달렸어요.
그렇죠?
감사합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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