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59] 잠재의식의 변화 | 있으니깐 느낀다

Buddhastudy 2024. 11. 28. 20:03

 

 

본질이 지금도 있어요.

본질이 지금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그럼 본질이 무엇인가?

의식 자체가 본질이에요.

의식의 상태는 생각,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듯이

의식의 상태는 다르지만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그것 자체는 의식이다.

 

그럼 지금 의식이 우리 각자가

그러니까 자기 의식을 한번 이렇게 스스로 알아챈다 그럴까?

그것은 이렇게 주로 이렇게 지적해 주는

그걸 듣고

아 이거구나하고 알아듣는 게

가장 보편적인 일이에요, 가장 일반적인 거예요.

 

그래서 의식은, 이런 의미에서의 의식은

평상 의식이라고, 평상심.

평상심을 요즘 말로

우리가 알아듣게 번역하면

평상의식

 

그러니까 자나 깨나 의식 자체는 있어요.

의식의 상태는 변하지만

자나 깨나 의식 자체는 있어요.

밤에 잘 때도 의식이 없으면 아예 숨을 못 쉬니까.

 

우리가 밤에 안 죽는다, 이 말은

잠을 자더라도 의식은 있다는 이야기고

그리고 깨어서는

그 의식이 지금 있는데

이렇게 작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작용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평상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작용하는 의식

지금 이 순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지금 이 의식.

또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의식.

과거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의식.

 

그러니까 의식이라고 할 때

우리가 하여튼 가장 기본적으로는

멀쩡하게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는 거예요.

살아있다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감각

살아있잖아요.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물질인 몸이 스스로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는 없다.

물질이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고 하는 이 감각은

물질이 하는 게 아니고

의식이 하고 있고

이 의식은 이런 식으로 말을 듣고

지금 끄덕끄덕하고

보고, 듣고 하는 이거니까.

 

근데 참 이게 안타까운 일은

이것이 다시 자기를 대상으로 볼 수는 없어요.

절대주체라서.

절대주체라서 이것이 대상으로 확인될 수는 없어서

그건 좀 안타깝네.

 

그래서 이걸 느낄 때는

이렇게 살아있네, 지금 이렇게 있네하는 쪽이

가장 일반적인 느낌이에요.

지금 있네, 살아있네, 지금 존재하네

무엇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는 걸 느끼는 것은

물질이 느낄 수는 없다.

지금 멀쩡하게 이렇게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의식이 이렇게 있다고 하는 것을 느낀다.

이 감각

이 감각 자체가 의식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처음에는 발견하고

가면 갈수록 이 감각이 더 선명해져요.

또렷해진다고 할까?

감각이 스스로 분명하다고 할까?

 

그래서 이렇게 처음에는 이게

이거구나하고 또 살짝 분별심이 나오면 흐려졌다가

분별심이 또 잦아들면 분명해졌다가

챙기면 있는 것 같고

아니면 다시 생각에

분별심은 생각이니까

그 생각이 많으면 생각이 덮여서 느껴지지 않았다가

생각이 사라지면 다시 또 또렷하게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요 어떤 숨바꼭질 같은

이게 지금 극복해야 할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어쨌든 그 이전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쨌든 간에, 그냥 무조건

일단 자기 의식을 한번 느끼는 거.

 

지금 여러분 존재하십니까?

존재해요?

존재하는 그 느낌이

의식이 있으니까 존재하지.

의식이 있으니까 존재한다고 느끼지.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존재하고, 보고.

의식이 눈을 통해서 의식이 보는 거예요.

지금 보는 거예요.

듣는 거예요. 듣는 거.

보는 거, 듣는 거

느끼는 거,

참 매끄럽네. 이거

귀신같이 안 느껴요?

느끼는 거 우리 부처님이 이렇게

, 땅을 느끼는 거

느끼는 거다 이거에요, 느끼는 거.

 

그리고 제가 매끄럽다는 걸 알잖아요.

제가 책상을 이렇게 만지니까

그러니까 아는 거.

 

대표적으로 작용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보는 작용

지금 이 순간 보는 작용하는 주체

보는 것 한마디로

지금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그리고 아는 것

지금 남이 뭐라고 안 해도

스스로 지금 오후라는 거는 그냥 자동적으로 알잖아요.

지금 오후다.

또 지금 여기가 인사동이다.

인사동 아는데 따로 뭐 노력할 필요 없죠.

그냥 노력하지 않아도 아는 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력하지 않아도 보고

노력하지 않아도 듣고

노력하지 않아도 느끼고

노력하지 않아도 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선시에

풀 향기가 나고 바람이 분다.

바람이 살갗을 스쳐 온다.”

그게 지금 이 소식을...

선시 그런 말 많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을 하는 것은

이것을 직접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의 작용을 통해서

이 본체를 드러내는 것.

 

그 수밖에 없잖아요.

이거는 눈에 안 보이니까

이걸 뭐라고 할 수가 없으니까

지금 이것의 작용을 나타냄으로써 이거를 나타낸다.

 

이 작용만 보면

손가락을 보는 거고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본다는 말이 이 말이죠.

 

다시

현상을 통해서

현상에서의 작용을 통해서

본체를 본다,

이 수밖에 없다. 이거예요.

 

현상은 풀 향기가 나고 바람에 스치운다.

이것은 현상인데

이게 손가락이다.

손가락이 뭘 가리키는가?

풀향기를 맡고 바람이 지나가면

그 바람이 지나가는 살갗의 감각을 느끼는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다 현상을 통해서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먼저 한번 알아채서

이것은 이 현상계하고의 관계가 확립돼야 돼요.

이걸 알아챈다고 끝이 아니고.

이것과 현상계의 관계가 정립되는 이야기

이제 그다음에 나옵니다.

 

/현상과 본질은 차원이 다르다./

근데 이 말이 소화하기 어려워요.

이해는 되는데

내 몸에서 이걸 체득하기, 느끼기는 쉽지 않은 말이에요.

 

/현상과 본질은 차원이 다르다.

이 차원의 차이에 대한 안목이 마음공부의 급소다./

 

그러면 차원의 차이를

현상과 본질에 대한 차원의 차이에 대한 안목이

마음공부의 급소다 할 때

신수와 혜능의 차이가

신수는 현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고

혜능은 현상뿐만 아니고 본질의 차원에 대한 이 근본적인 차이를

자각하고 있는 상태다.

 

이건 어떤 거냐 할 때

차원의 차이

딱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차원의 차이는

꿈과 깸이 다르듯이 현상과 본질은 다르다 예요.

 

꿈의 차원하고

꿈에서 깨어난 뒤의 깸의 차원이

서로 다른 그 감각을 기르기

이게 마음공부의 아주 급소에요.

 

그래서 꿈과 깸은 서로 차원이 다르다는 말, 이해되세요?

같은 꿈속에서 한국이냐 미국이냐의 차이보다

꿈과 깸의 차이는

아예 그냥 차원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이 감각을 기르려면

이 감각을 기르는 데 방해꾼이 있어요.

이 감각을 기르는 데 대한 방해꾼이 있어요.

그 방해꾼의 이름이 뭐냐?

에고예요.

 

그러니까 지금 꿈과 깸에서

보세요, 이게 왜 중요하냐?

동일시의 대상이기 때문에.

동일시의 대상이기 때문에 중요해요.

 

동일시의 대상이라는 건 뭐냐?

지금 여러분

밖에 보이는 것은 객관이죠.

맞아요?

근데 그걸 보고 있는 나 자신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동일시 할 때, 나라고 할 때, 나라고 동일시할 때

꿈속에 나를 동일시하느냐?

깨어난 나를 동일시하느냐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예요.

 

다시

현상 속에 나를 동일시하느냐?

본질의 나를 나라고 하느냐?

동일시 말 빼고.

현상 속의 나를 나라고 하느냐?

본질로서의 나를 나라고 하느냐의 차이가

이게 또 급소다, 급소.

우리 마음공부의 급소다.

 

그러면 지금 일반인들한테

당신 누구요?” 그러면

잠재의식적으로 몸을 나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그러니까 물으면

잠재의식적으로 답을 자동적으로 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나이가 몇 세요? 그러면

60살이요 이렇게 말을...

이때 60살은 뭐예요?

현상 속의 나잖아요.

 

근데 이 지금 깨어 있는 이 의식을 나라고 할 때는

나이가 60살이 아니잖아요.

뭐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지금 제가 여러분한테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물으면

여러분이 잠재의식에서 벌써 60살이요라고 한다, 이거예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면

잠재적으로 잠재적으로 영등포에서 왔습니다

이렇게 답을 한다. 이거예요.

 

이게 남이 물을 때

내가 뭐라고 답하느냐가 나의 동일시잖아요.

근데 이게 보통 사람은

잠재의식적으로 굳어져 있어서,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있어서

꿈속에 나, 현상 속에 나를 나라고 하고

지금 살아가는 게 상당히 굳어 있다, 이거예요.

굳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아무리 들어도

돌아서면 다시 옛날의 나가 된다 이거예요.

 

지금은 알아듣는데

의식 그러면

의식은 나이도 없고 오고 가지 않습니다라고 알아듣잖아요.

알아만 듣지만 동일시는 안 한다, 이거예요.

 

왜냐하면 현상의 나를 동일시하고 있는 이 습관이, 고정관념이

강력하기 때문에

어떻게 강력하냐?

잠재의식적으로 굳어져 있어서.

이 말도 이해되나요?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에서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현상의 나를 나라고 하고 살아가는 이 습관은

여전히 혜안이라고 하는

꿈속이라고 하는 데서 못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 꿈에서 벗어나서

꿈속에서 깨어난 나가 되려면

법안을 떠야 하는데

법안을 뜨는 방법이 뭐냐?

 

이게 지금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보통 공부하는 분들의 가장 핵심은

법안을 뜨는 건데

법안을 뜨려면

자기도 모르게 현상 속에 있는 기존의 나를

나로 알고 살아오는 이 고정관념에서

본질인 의식이 나라고 하는 이것으로 넘어가기가

이게 지금 가장 공부의 아주 키포인트다.

 

그러면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법안을 뜨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나는 의식인데 의식의 가장 큰 특징은

깨어난 거예요.

의식의 가장 큰 특징은

깸이에요. .

 

의식의 특징

여러분 의식은 깨어 있죠?

맞아요?

그래서 내가 의식인 사람은

자기가 깨어 있어.

깨어 있다는 말은

꿈에서 깼다는 거죠.

 

그럼 꿈은 무엇인가?

이걸 분명하게 안다 이거예요.

깸과 꿈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이거 구분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아상이다.

현상 속에 나를 나라고 하는 그 아상이다.

 

근데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 공부에 가장 중요한데

그러려면 현상 속에 나를

나라고 하는 그 고정관념에서 한번 벗어나는데

그래서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가?

 

이 세계가 꿈인데

나는 깨어서

깨어난 의식으로서

꿈 같은 현상을 지금 이렇게 살아간다.

지금 이것을 경험한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법안을 뜨는 게 핵심인데

법안을 뜨면 어떻게 감각되는가?

깸이 꿈을 경험하고 있어.

근데 나는 깸이라서 꿈에 속하지 않아요.

 

마치 영화를 보면서

내가 영화 속에 빨려 들어간 게 아니라

영화 밖에 스스로 관객으로서 있으면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그 느낌

이게 법안을 뜬 거예요.

 

근데 이것이 잘 안 돼.

일반인들은 이것이 잘 안 돼요.

왜냐?

자기도 모르게 이 현상계 속에 있는

꿈속에 있는 이 나를

나라고 하는 그 동일시, 혹은 집착, 고정관념이 막강해요.

 

그래서 이것을 쉽사리 떨쳐버리기가 어려워.

그래서 혜안에서 법안을 뜨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할 때

이 핵심은 지금 잠재의식이다.’

이런 그 법회에서 아무리 앞에 앉은 사람이

이거라고 아무리 알려줘도

말귀는 알아듣지만

실제로 이 잠재의식이 변하지는 않아요.

 

잠재의식을 변하는 가장 핵심이

이걸 유지시키는 것이 분별심이다.

이 말은 이해되세요?

 

분별심이 몸에 완전히 배어 있기 때문에

잠재의식이 잘 안 바뀌어.

이해되십니까?

 

분별심을 기독교에서는 선악과라고 하잖아요.

선악과

즉 분별심이 너무나 깊이 우리한테는 젖어 있어서

기독교에서는 이거를 할 수 없이 원죄라고까지 불러요.

원죄.

 

이거는 단순하게 원죄라는 말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워낙 분별을 하면서 살아오셔서

그 오래된 인류 공동의 잠재의식이

지금 나한테 전달이 되어 있다, 이거야.

모든 교육 체계의 모든 것이, 시스템이

분별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내가 여기 태어나서 몇십 년을 살았으면

여기에 벌써 상당히 찌들어 있다.

 

잠재의식은 한마디로 말하면

머리의 문제가 아니고 몸의 문제예요.

이 말 여러분이 좀 이해해 주시면 좋겠네.

잠재의식은 몸에 박혀 있어요.

 

그래서 혜안에서 법안을 뜨는 이 단계를 우리가 이룩하려면

법안을 뜨려면

몸에 붙어 있는 분별하는 이 습관을

몸이 극복을 해야 돼.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머리로는 알죠, 이 정도 되면.

보니까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이

유튜브 보시고 찾아오시잖아요.

그러면 유튜브 보고 바로 찾아오는 분은 없어요.

적어도 최소한은 한 6개월?

많은 분은 2~3년을 보시다가, 보시다가 찾아오시거든요.

그러면 그분들의 이구동성이 뭐냐 하면

이치는 알아듣겠습니다, 이거예요.

이제 하도 들으니까

어떤 분은 또 하나를 막 여러 번 들었다고 하세요.

 

그래서 자기가 이치 알아들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반복해서 보니까

알아듣겠다는 거예요.

근데 왜 찾아오시느냐?

몸이 말을 안 들어.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은 여전히 분별이 심하고

여러분도 그렇죠?

 

잠재의식을 어떻게 바꾸느냐?

몸에서 그것이 바뀌어져야 돼요.

그럼 어떻게 하면 몸에 붙어 있는 잠재의식을 바꾸느냐?

다시 말하면

얼마나 지독하면

기독교에서는 원죄라고까지 부르는 분별하는 이 습관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시비심이에요.

딱 한마디로 말하면.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심

 

그래서 필요한 게

혜안에서 법안을 들기 위해서 몸을 바꾸는 것

이걸 수행이라고.

 

나의 본성인 공적영지가 실제 내 몸에서 이루어지는 것

다시 말하면

평상시에 나의 의식 상태가 공적영지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렇게 고려되어야 법안이다, 이거예요.

상황 이해되죠?

 

그래서 지금 이런 과정이 있어서

이거는 실참실수實參實修를 통해서

내가 머리로는 아무리 본질을 알아도

이게 의식이라는 걸 아무리 알아도 아무런 힘이 없다.

왜냐하면 몸이 말을 안 들어.

몸은 분별심에 찌들어 있으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에 찌들어 있어서

그거는 몸이 말을 안 들어서...

 

여러분, 머리가 이길까요? 몸이 이길까요?

몸이 이겨요.

머리가 절대 몸을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몸에서

몸이 공적영지 모드로 확립되는 것, 체득되는 것

이게 지금 법안을 내는 아주 핵심 키워드라서

그래서 공적영지 자체가 화두고

그 화두, 공적영지 상태가 내 몸에서 익어 들어가는...

 

그러니까 몸이 아는

공공적영지 모드를 몸이 스스로 알아서 그 모드를 유지하는

그것이 되지 않는 한은

그냥 엎어진다.

 

우리들도 공부를 할 때

조금 더 요령 있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저는 부처님이 문과가 아니고

문과도 있지만 이과라고 봐.

이과가 조금 더 세다고 봐요.

 

논리적으로 잘해서

누구든지 꼼짝 못하게끔 딱 이렇게 해서 제시를 해서

그게 불교의 가장 가장 기본 토대가 되어서

서양에서는 여러분 불교를 종교라고 안 본대요

첫 번째, 불교를 철학이라고 본대요.

두 번째, 불교를 과학이라고 본대요.

그리고 세 번째, 불교를 수행이라고 본대.

 

다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 과학, 수행

굉장히 프렉티컬한, 굉장히 실질적이고 유용한 접근 방식이거든요.

그게 부처님이 이과라서 그런 것 같아.

아주 구체적으로

인간의 괴로움에서 모든 걸 출발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