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책을 읽어도, 글자 하나하나가 전부 다 의식이 나온 거다.
이것만 알면 어린이 동화책도 법문이고
지나가는 사이렌 소리도 법문이고
모든 게 법문으로 된다.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 마음이 가 있으면 공부가 익어갑니다.
/선의 입장에서 보면 마도 본질인 의식을 가리키고, 반야도 같은 것이며
바라밀도 결국 이 순간 작용하는 우리의 의식을 나타낸다.
알고 보면 1700 공안의 당체도 모두 같은 것이며/
이 말 이해되세요?
1700공안도 전부 다
여러분 물었잖아요.
부처가 뭡니까? 물었잖아요.
부처가 뭡니까? 그러면 내 부처가 내 의식이잖아요.
내 부처를 보여주려면
가만히 있어도 되는, 가만히 있어도 되고
말 한마디 해도 되고
뭘 해도 아는 사람끼리는 그냥 이게 다 부처다, 이거에요.
이렇게 통한다, 이거예요. 이심전심으로.
[이심전심]이란 말이 무슨 말이에요?
요즘 말로 번역하면
[의식에서 의식으로 통한다.]
나도 의식이 있고, 상대도 의식이 있어서
의식과 의식이 통한다.
어떤 사람은
‘부처가 뭡니까?’ 물어보면
‘부처가 뭡니까?’ 하고 묻는 그거
이 말도 알아들으세요?
‘부처가 뭡니까?’하고 묻는 그것이 부처다.
‘소 타고 소 찾고 있다.’ 이 말도 옵니까?
의식이 자기의식이면서 의식 속에서 의식을 찾고 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찾고 있다.
지금 1700공안이 낱낱이 다 이걸 말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하나를 풀면 다 푼다, 이거예요.
1700공간이 다 똑같은 낙지가 같으니까.
근데 그거는 있어요.
1700공안이 이거 하나를 가리키긴 가리키지만
사람들이 자기 꾀에 속는 사람이 많아서
의식이란 말에 속기 때문에
다양하게 이 의식을 나타내주는 모양이 다양하긴 해요.
그렇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든 1700공간이 의식 하나를 표현한 것이다.
이 말도 이해되죠.
그러니까 보세요. ‘개한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때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무’, 그러면
‘무’라고 하는 것이 저주의 본래면목을 드러낸 거다.
이 말 이해되세요?
무라고 하건 유라고 하건
왜냐하면 어떤 질문에는 유라고도 했다는 거예요, 소주가.
또 어떤 데는 또 무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유나 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지금 오후인데, 점심 먹은 지가 좀 돼서 노곤하죠.
여러분 제 말 따라가면
‘점심 먹고 오후에 노곤하다’에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 제가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제 입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공안이 그런 말이다, 이거예요.
공안이 ‘오늘 오후는 좀 더 피곤하네’ 이게 공안이다, 이거예요.
이거를 제가 하면 공안이 안 되지만
이 사람들이 하면 이게 다 공안이 됐다.
이런 말들이다, 이거예요.
특별한 게 아니다.
시장에서 싸우는 소리, 시장에서 싸우는 소리도
귀가 열린 사람한테는, 안목이 있는 사람한테는
그 고함 지르고 하는 것도 전부 다 이거죠.
그러니까 사람한테서 뭐가 나오겠어요? 나오는 모든 것이
그러니까 인간한테 나오는 것뿐만 아니고
이 세계 자체가 한계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계의 어떤 모습도 전부 다 의식이다, 이거예요.
소동파의 오도송, 소동파가 어디서 화두에 걸렸느냐 하면
도지사가 되어서 아는 절에 방문했는데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스님이 안 계셔.
그래서 ‘동파 다녀갑니다’ 하고 편지를 남기고 갔어요.
그랬더니 그 스님이 돌아와서 보니까 소동파가 도지사예요.
그러면 엄청나잖아요.
그러니까 ‘동파 거사가 왔다 갔구나.’
근데 소동파가 이 공부에 뜻이 있다는 걸 아는데, 아직 못 깨달았다는 걸 알거든요.
그러니까 딱 그 편지를 딱 잡아서
“스님 순찰 중에 절에 들렸더니 스님이 안 계시네요.
동파 거사가 이렇게 달려가면서 인사 남깁니다.”
그 편지를 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다시 동파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뭐라고 보냈느냐?
“왜 나를 기다렸소?” 그러면서
“유정법문만 들으려고 하지 말고, 무정설법도 들을 줄 알아야지” 하고
딱 한마디 편지를 써 보냈어요.
근데 소동파가 유정설법은 뭐냐 하면
사람한테서 듣는 설법
그러니까 그 전에 들린 이유는
그 스님한테서 설법 한마디 듣고 가려고 모처럼 순찰 중에 들렸다 이거예요.
그러면 스님 입장에서는
“어찌 유정설법만 들으려고 하시오
무정설법도 들을 줄 알아야지.”
근데 그 말에 소동파가 화두가 걸렸어.
“무정설법을 듣는다는 게 무슨 말이지?”
무정설법은 뭐냐 하면
돌이나 나무가 하는 설법이에요.
돌이나 나무나 흐르는 구름이 하는 설법
자기는 들을 줄 몰라. 까막눈이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화두가 걸려서 자나 깨나
“무정설법이 뭐지?”
“무정설법이 뭐지?”하고 계속
이게 안 풀리니까, 이게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하루는 말을 타고 가는데
그 당시 도지사들은 시찰을 많이 했나 봐요.
그래서 계속 시찰 다니면서 말을 타고 가는데
푹 이제 답답했던 거지
궁금한데 안 풀려서.
“무정설법이 뭐지?”
사람한테 듣는 거는 유정설법을 듣는 거예요.
유정, 정은 마음이에요. 정식이라고 해서 마음
그러니까 생각 감정을 가진 인간의 마음
그 인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는 설법을
지금 여러분도 지금 들으시잖아요.
근데 무정설법, 지금 이 따뜻한 오후에 햇살이 불법을 지금 나타내고 있는데
설법하고 있는데
들을 줄 아냐? 이 문제예요.
그래서 ‘이게 뭐지?’ 하고, 계속 이렇게 하다가
지나가다가 계곡에서 소식이 딱 왔네.
그래서 그 유명한 소동파의 오도송이 그거예요.
산색기비청정법신
산의 모든 빛깔은 청정법신이 드러난 것이다.
소동파가
적어도 자기 의식이 부처라고 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이미 그때
자기 본심이 의식이 부처다 하는 정도까지는 알고 있었어.
근데 그게 자기 중심으로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어, 의식이.
여기도 많은 분이 그럴 거예요.
그런데 서동파의 오도송은
의식이 더 확장돼서 이 전체를 다 삼키니까
두두물물이 이 한계의 청정법신
한계의 의식이 인년따라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라는 걸 아직 못 깨달았어, 거기까지는
아공은 되었는데 법공은 아직 안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때 무정설법이 아주 좋은 긴요한 화두인 거예요.
그때 딱 그 말 타고 가다가 딱 깨달음이 왔어.
그냥은 안 오죠.
계속 집중하고 있었다 이 말이죠.
무정설법이라는 말이 도대체 ‘나무한테 돌한테 설법을 듣는다니 무슨 말이지?’ 하고
계속 집중하고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다가 딱 소식이 오니까
산색기비가 어찌 아니랴.
어찌 귀 아니랴
산색 산에 색깔 하나하나가 어찌 아니랴
청정신 청정법신이 아니랴
그리고 계성_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야래_ 밤새도록 장광설법하네.
일단은 그냥 써드릴게요.
그냥 한글로 쓸게요.
장광설
원문은 광장설이라고 돼 있어.
근데 우리 우리는 지금 장광설이라고 쓰지요.
음미해 보세요.
산색 하나, 산의 빛깔 하나하나가
전부 다 이 한계 의식이 드러난 거고
개울물이 밤새도록 장광설법을 하고 있죠.
그리고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소동파가 참 저도 먹물이지만
먹물의 버릇은 두 개만 말하고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소동파가 티를 묻혀놨어.
“이 깨끗한 이 맛을 뒷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하라”
그런 말 안 해야 하는 건데
괜히 티 묻은 거 아시겠죠?
근데 아무튼 소동파는 그랬어요.
그래서 자기가 무정설법을 가지고
이 의식의 확장이 일어났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많은 분들이 분별심이 남아있으면
그 분별심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자기의식은 이해하겠는데
이거 종이 하나 한 장, 한 장
마이크가 다 의식이라는 사실은
아직 분별심이 이걸 아직 용납 못하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때는 무정설법이라고 하는 것이 화두가 해당되는데
한 번 이렇게 탁 터져서
가슴에서 흘러나온 의식이 우주를 다 덮었을 때
그때는 낱낱이 모든 것이 티끌 하나하나가
그렇게 되어야 법안이 떠져요.
그렇게 되어야 법안이 떠져.
법안이 떠진다. 이 말은
티끌 하나하나가 다 법이다 이 말이에요.
무정설법이 법안의 소식이에요.
그래서 그래 되어야 여러분
이런 말을 왜 하느냐?
그래 되어야 번뇌가
티끌 하나도 전부 다 이 청정법신의 화신불인데
번뇌가 예외일까요? 아닐까요?
그러니까 번뇌즉보리, 법안을 말한다.
번뇌도 분별하는 자기한테는
이게 뭐 어쩌니 저쩌니 번뇌니 하지만
본질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예외 없이 모든 물길이 다 물이 되는 것
이렇게 되려면
아직 분별심이 남아있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결국에는 이 법안을 뜨는 것은
자기 그릇을 키워야 돼요.
우주를 담아야 돼.
그래서 예외가 없이 그릇이 커질 때 저절로 돼요.
근데 그전까지는 계속 깐죽거려.
이 분별심이 깐죽거려.
계속 이건가? 저건가? 하고
그래서 중생즉부처 이 말도 이해되세요?
중생즉부처, 번뇌즉보리
이런 말들이 완전히 의식이 확장되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부는 계속 해 봐야 되는 겁니다.
/시장에서 싸우는 소리나 낙엽 떨어지는 소리도
모두 이것을 드러내고 있다.
드넓은 바다의 모든 파도가 바닷물이듯이/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해요.
여러분 계속 뭘 까먹느냐?
이 말 까먹어요.
이 말은 처음부터 배웠잖아요.
근데 까먹어 문제는.
그 드넓은 바다에 모든 잔파도 하나하나가
다 모든 물결이 물이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이 한계 의식의 나툼이다.
/선은 이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여튼 공부를 크게 한다.
그릇을 키워야 된다.
다음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본문 보세요.
/잠시 침묵하신 후/ 양구라 그래요.
잠시 침묵하신 후 다시 말씀하셨다./
육조혜능 스님의 조계종지
육조 혜능 스님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거예요.
여기 시작하자마자 이 말이 나온다.
/선지식들이여
보리 자성은 본래 청정합니다.
다만 누구나 이 마음을 쓰고 있으니 즉각 깨달아 성불하십시오.
한자로 하면
보리 자성이 본래 청정하다.
단용차심이니 직요성불하라./
다시 한번 음미해 볼게요.
보리는 인도말 보디
붓다는 깨달은 사람
보디는 깨달음
깨달음은 다른 게 아니고 깨달아 있는, 깨어 있는이란 뜻이에요.
보디라는 말 자체가 깨어 있는, 깨어 있는 자성
자기의 본질이 깨어 있는
자기의 본질은 본래부터 청정하다.
오늘 제가 계속 모든 설명이
이 말 한마디 설명한 거네.
[현상 말고 본질
본질은 본래 청정이다.]
이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그 사람의 본질은 본래부터 청정하다.
이게 인간한테는 가장 복된 소식이에요.
나의 현상은
여러분, 현상은 청정한 게 아니에요.
용사혼잡 은현동시, 이런 말을 쓰는데
용사혼잡은 용과 뱀이 섞여 있다, 이 말이죠.
지금 여기도 용사혼잡이다.
이게 존재의 원리예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용과 사가 혼잡한 거예요.
용은 본질이고
사는 현상이에요.
용과 뱀이 같이 있다.
그럼 지금 나의 육체하고 생각 감정은 현상이죠.
그리고 본질은 현상이 같이 있다. 이거예요.
근데 본질은 청정하지만
현상은 상대세계라서 청정하고 더럽고가 항상 같이 있어.
이게 하나의 존재의 원리다 이거예요.
그래서 모든 물결이
모양은 완벽한 물결은 없어요.
다 달라.
근데 재료는 모든 물결이 같이 동일하게 물이다.
그러면 내가 물결이라면
현상으로서의 나의 모습은 완벽할 수가 없죠.
근데 본질은 본래 청정하다, 완벽하다 이거예요.
이거를 혼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현상에서의 나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건 법칙에 어긋난다.
그런데 현상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나의 본질은 완벽하다 이거예요.
이게 육조의 깨달음의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를 혼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애꿎게 현상을 가지고 완벽하려고 하는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다.
그건 불가능한 거다. 처음부터.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은현은 숨어 있는 것하고 드러난 것이 항상 동시에 있다.
본질과 현상이 항상 혼잡해 섞여 있다.
용사혼잡이다.
진흙에서 연꽃이 핀다.
이 말 같은 말인거 이해되죠.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래서 지금 중요한 거는
현상을 꿰뚫어 봐야 하는 거예요.
이 말 참 중요하네요 하고 보니까.
‘현상을 꿰뚫어 본다’ 이 말은
현상은 본래 상대의 세계예요.
근데 꿰뚫어 보면 하나하나가 절대예요.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제상_ 모든 모양이 있는 현상을 보면서
그것들 하나하나가 비상이라고 하는
본질이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본다.
이 말을 제가 왜 강조하는가?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렇게 사람들이 번뇌를 없애려고 해요.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고 싸우고 있어.
진짜 많은 사람들이 생각 없는 걸 좋다고 생각해요.
참선할 때 앉아서 생각 없는 걸 그렇게 애타게 하려고 해요.
목을 매고, 목숨 거는 것 같아. 제가 보기에는.
근데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그게 아니라 ‘생각을 꿰뚫어 본다’ 이거예요.
현상을 꿰뚫어 본다.
생각을 꿰뚫어 보면 생각이 뭐예요?
좋은 놈이나 나쁜 놈이나 그놈이 그 놈이다.
현상에서는 본래 상대다, 이 세계가.
육조단경의 가르침은
대승불교 선의 깨달음은
번뇌즉보리는
법안을 연다, 이 말은 법을 본다.
번뇌라고 하는 법을 본다.
번뇌라고 하는 법을 보면
모양은 번뇌지만
그 자체는 한계 의식의 드러남이다. 이거예요
부처다. 이거예요.
번뇌라고 하는 번뇌불이다. 이거예요.
여기에 예외가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야지 모든 고통이 결판이 나기 때문에
조견 오온 개공 도 일체고액이 되지
그게 아니라
생각을 없애고, 감정을 없애고 이렇게 해서
도일체고객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김홍근_육조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단경8] 구하는 순간, 어긋난다 (0) | 2024.05.30 |
---|---|
[육조단경7] 생각을 쉬면, 저절로 드러난다 | 꿈과 현실의 비밀 (0) | 2024.05.29 |
[육조단경5] 현재에 살아야 하는 이유 (0) | 2024.05.22 |
[육조단경4] 실패를 통해서 깨닫는다 _ 그냥 느껴라 (0) | 2024.05.16 |
[육조단경3] 오직 견성뿐 _ 지금 이 순간 작용하는 의식 (0) | 2024.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