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눈을 통해서 실제 보고 있는 건
생명 자체가 보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신기하죠.
이 하나의 생명이
수없이 많은 눈을 통해서 동시에 보고 있네.
신기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한 개면서 또 이렇게 많은 일체다 이거예요.
한 개 생명이, 한 개 의식이, 한 개의 마음이, 한 개의 불성이
한 개 공적영지가
수많은 눈을 통해서
인간의 눈만 통해서 보는 건 아니잖아요.
동물의 눈, 곤충의 눈.
어마어마한 차원인 거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여러분이 공부하실 때
깨달음을 좀 단순하게
“이게 뭘까 저게 뭘까” 해서 못 깨닫는다 이거야.
지금 이 전체인데
“이게 뭐지 저게 뭐지?” 해서는 절대 못 깨닫는다. 이해되세요?
그래서 “이게 뭐지 저게 뭐지?”를 하지 마라.
이게 Be still, 이게 뭐지 저게 뭐지 이걸 하지 마라.
“불성이 뭐지?” 하지 마라
그래 가지고 영원히 못 깨닫는다.
왜냐하면 불성 따로 있고, ‘뭐지? 하는 나’가 따로 있잖아요.
그런 상태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가 없다, 이거를.
이 말도 쓸 수 있네.
조금 전에 제가 [생명]이라고 했죠.
또 이 말도 쓸 수 있나요?
[전체].
그러니까 전체를 깨달을 때
내가 “전체가 뭔가?” 해서 절대 못 깨달아.
왜냐하면 나하고 전체가 둘이잖아요.
지금 ‘불이’라는 말도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불이’ 둘이 아니다. 전체다
이러면 어떻게 돼요?
전체다, 하나다.
‘전체’라는 말 대신에 또 ‘하나다’라고도 할 수 있네.
그러면 하나를 깨달을 때
나가 하나를 깨달을 수가 있냐? 이거예요.
나가 있으면서 하나가 따로 있으면 이게 하나냐? 이거예요.
전체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뭐냐고 해서는 영원히 쪼개진다.
왜냐하면 묻는 나가 있고, 대상으로서의 전체가 있어서
이 전체가 될 수가 없다.
불이가 될 수가 없다. 하나가 될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물으면 안 된다.
‘뭐지?’해서는 안 된다.
쪼개면 안 된다.
‘뭐지?’라는 말 자체가 이법, 불이법문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이법의 문으로 들어간다.
이 법문이다.
불이법문이 아니라
‘뭐지?’ 하면 이분법의 본문으로 들어간다.
이 말 따라옵니까?
그러니까 물으면 안 된다.
그 물음을 삼켜라.
물음을 삼키고 가만히 있어라.
Be still,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으면 ‘뭐지?’ 하는 것이 생각이죠.
그놈이 잠재워진다.
그놈만 잠재워지면
멀쩡하게 지금 이거 전체다 이거예요.
지금 보이는 이거 전체
그러니까 지금 포인트가 지금 목적이 깨달음이죠.
깨달음은
밤에 꾸는 꿈이건
낮에 꾸는 생시건
이 안에 있지 않다.
이걸 보는 자다. 전체를 보는 자다.
근데 그 전체를 보는 자가 어디 있는가?
지금 현재 이 눈을 통해서 지금 보는 이거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거를 대상으로 해서 내가 소유하려고 하는, 잡으려고 하는
이걸 대상으로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치구심
어리석게도 이거를 막 잡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문제예요.
그래서 항상 문제는 치구심이 문제예요.
그러니까 치구심이 쉬는 것이 Be still, 고요히 하라. 고요히 있으라.
다른 말로 육조혜능 스님은
이 대목 지나서 나오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이 Be still.
그때 너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때, 바로 이러할 때
너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하면
고요히 있어라 Be still
and know that, 지금 보는 이거 진짜
대문자 I, 소문자 말고 대문자 I
I am God, 지금 God이 본다고 하는 이 사실을 깨달아라.
바로 내가 김아무개가 아니고
김아무개라고 하는 환상이에요.
꿈속의 사람은 환상이잖아요.
실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이 전체가 꿈이라고요.
이 꿈 속의 요 한 조각을 가지고 ‘나’다 하는 게 지금 문제다 이거예요.
그래서 둘로 나누지 말라. 이 말을
간화선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여겨서
간화선에서 깨달음의 전제 조건을 ‘打成一片’이라고 불러요.
타_ 강조하는 것, 동사를 강조한다.
성_ 이루다.
타성이라는 말은 이룬다.
무엇을?
한 조각을 이룬다, 하나를 이룬다, 전체를 이룬다.
전체를 이루는 방법은
“전체가 뭐지?” 해서는 영원히 전체가 안 되고 쪼개진다.
‘뭐지?’하지 마라 이거예요.
‘뭐지?’하는 그 치구심, 구하는 마음,
진리다, 법이다, 이런 명분, 이상을 추구하는 그 마음,
그 마음을 버려라
이게 핵심이다. 그냥
깨달음의 핵심
타성일편이 돼야 되는데, 한 덩어리가 돼야 되는데,
한 덩어리가 되려면
‘지금 이 전체가 뭐지?’ ‘자성이 뭐지?’ ‘불성이 뭐지?’ 해서는
영원히 이분법적으로 쪼개진다.
타성일편에 대한 좋은 아주 가르침이 있어요.
타성일편, 한 조각을 이룬다, 한 덩어리가 된다 이 말이거든요.
한 덩어리가 된다.
이 말에 대해서 아주 좋은 천하의 조주가 깨달은 대목이에요.
다시 한번 음미해 봅시다.
유명한 이야기예요.
조주가 10대 후반에 틴에이저 시절에
자기 스승인 남전에게 물었다.
조주가 남전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여하시도, 도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남전이, 남전은 마조의 제자예요.
마조가 8조예요.
육조혜능 스님 있잖아요.
몇 조 몇 조는 6조만까지만 쓰고, 7조라는 말을 안 쓰기로 했어.
6조가 이제 안 쓴다.
이 말 괜히 써서 내가 죽을 뻔했다, 질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몇 조라는 말 안 쓴다하고 안 했거든요.
근데 우리가 편의상
우리 법력을 가지고, 우리 한국의 법맥을 가지고 따져본다면
7조는 남악회양, 6조스님의
남악회양은 또 유명하잖아요.
남악회양이 막 오니까 육조스님이
“어디서 오는가?”
이때도 남악회양이 20살 그때네.
“어디서 오는가” 하니까
“숭산에서 옵니다” 그랬더니 육조가 남악에게
“어떤 물건이 오는가?”
답을 못 했다 이거예요.
여러분 지금 우리 눈을 통해서 뭐가 봐요?
지금 여러분한테
“어떤 물건이 보는가?” 하면
여러분이 쉽게 입을 열 수 있겠느냐? 이거예요.
배웠다고 “의식이 봅니다” 이러면 바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놔 봐라.”
거기에 대해서 확실해야지.
뭐라고 물어도, 지금 뭐라고 답을 해도
아니다 합니다. 100%.
왜냐하면 답하는 그것은 관념이기 때문에
이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꽉 막혔다 이거예요.
왜냐하면 실제로 모르니까
“어떤 물건이 왔는가?”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거기 딱 막혔다 이거 답을 못했다.
8년 만에 와서
설사일물, 한 물건이라고 해도 즉부중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닙니다.
설사인물 즉부중, 한 물건이라고 설사 해도, 딱 맞는 적중한 말은 아닙니다.
“닦고 깨달을 것이 있더냐?”
“닦고 깨달을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은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보는 이것이
다시 말하면 필드가 필드 위에 펼쳐지는 현상한테 물 들어요. 안 들어요?
희한하잖아요. 물이 안 든다 이거예요.
지금 저는 저 tv 있잖아요.
크잖아요.
tv에 비춰서 저 뒤에 분들이 비춰 보이거든 tv화면에
tv화면이 저 빛이 그려지는 저 이미지에 물드느냐? 이 말이에요.
아니 실제로 한번 보세요.
저기 물 들어요. 안 들어요?
안 든다 이거예요.
“물이 안 듭니다.”
그것이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가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은 것이다.
그래서 7조가 된 거예요. 남악회양이.
남악회양이 8조 마조한테 똑같은 또 이야기를 했잖아요.
마조가 딱 앉아 있으니까
남악회양이 남악에 살았어요.
그 남악에 전법원이라고 하는 절이 있었어.
거기에 남악이 살았어요.
전법원 앞에 지금도 전법원이 지금 남악호텔이 돼 있어, 이름이.
저는 다 가보고 하는 소리예요.
그러니까 그 전법원 남악호텔 뒤에, 불과 한 3분밖에 안 걸려.
그 뒤에 큰 바위가 있어요.
근데 그 바위에 마조가 가서 앉아 항상 앉아 있었어.
그러니까 남악이 가서 그 유명한 이야기잖아요.
벽도를 갈았다.
그러니까 앉아 있는데 옆에서 삐삐직삐직하고 막 돌을 가니까
신경질 팍 내면서
“스님, 왜 방해하냐?”고 뭐 하느냐고 그러니까
“나는 벽돌 갈아서 거울 만들려고 한다.”
“아니 벽돌 간다고 무슨 거울이 됩니까?”
“너는 왜 앉아 있는가?”
“부처되려고 앉아 있습니다.”
“앉아 있는다고 무슨 부처가 되느냐?”
지금 마경,
마_ 갈아가지고, 경_ 거울 만드는 거
마경대가 지금도 있거든요.
똑같이 거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마주가 앉아 있는 것이
앉아 있는 것은 현상이다 이거예요.
아무리 현상을 갈고 닦아도 거울이 안 된다.
거울은 지금 본질이잖아요.
“너는 왜 앉아 있는가?”
“부처되려고 앉아 있습니다.”
지금 카테고리가 다르다 이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차가 가지 않을 때, 말을 쳐야 되느냐? 차를 쳐야 되느냐?
말을 쳐야죠.
그럼 너가 지금 앉아 있는 것은 차고
그 앉아 있는 것을 움직이는 그놈이 말이다, 이거예요.
몸뚱이는 차고
몸뚱이를 지금 통해서 지금 보고 듣는 것, 작용하는 것
한마디로 말해서 작용하는 것.
그 말에 마조가 깨달았다 이거예요.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앉아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자기 눈을 통해서 보는 것.
지금 이것을 깨달았다 이거예요.
그리고 마조의 제자가 남전이에요.
그 남전에게 조주가 가서 물었다.
지금 법맥이 8조가 마조, 남전이 9조, 10조가 조준해
이러면 좀 가닥이 잡혔나요?
그러니까 10조인 조주가 9조인 남전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불이법이 무엇입니까”
같은 말이죠.
그랬더니 답변하기를
평상의식이다.
평상의식이, 이 말이
본래의식이란 말이에요.
본래 의식이다.
언제나 있는 언제나 있는
이걸 평상이라고 불렀어. 평상 혹은 보편이라고도 불러요. 보편
언제나 있는 그 의식이
그게 부처다. 그게 그게 도다.
“도가 무엇입니까?”
“평상심이 도다.”
평상심을 지금 우리들은 평상의식으로 번역을 하면
더 확실하게 들어와요.
평상의식이 꿈도 꾸고, 생시도 꾸고
또 생시에 앉아서 영화 보면
여러분 영화가 어디서 나타나요?
사실 영화 보면 쏙 빠지지 않나?
속 빠지잖아요.
영화에 쏙 빠지는 거나
꿈에 쏙 빠지는 거나
지금 여기에 지금 쏙 빠지는 거나 같아요.
빠지는 게 뭐냐 하면
실제로 보는 것은 평상의식이 보는데
평상의식이 자기가 평상의식이라는 걸 깜빡하고 폭 빠져서
지금 여기에 빠지니까 두리번두리번하다가
“뭘 나로 하지? 이게 난가 보다” 하고 이걸 잡았어.
지금 그 착각 속에서 살아온 지가 지금 제법 됐어.
왜냐?
장편소설이라서.
지금 그런 상황이에요.
지금 음미해 보세요.
불이법이
불이법, 한 덩어리가 된다.
이런 말이 무슨 말인가?
조주가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평상의식이 도다”
조주가
“어떻게 하면 평상의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요 질문이 여러분의 지금 심정 아닌가요?
“어떻게 하면 평상의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니 오늘 공부를 좀 명료해야 돼.
따라오고 계십니까?
보세요.
“도가 뭡니까?”
“평상의식이 도다.”
“어떻게 하면 평상 의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근데 평상의식이 밤에 꿈꿀 때는
밤에 꿈을 이미 꾸고 있어요. 안 꾸고 있어요.
꾸죠
낮에는 낮이라고 하는 생시라는 꿈을 꾸고 있어요? 안 꾸고 있어요?
꾸고 있죠.
이걸 지금 꾸고 있는데
이거를 두고 따로 이걸 얻어야 되나요?
못 깨닫는 이유?
치구심 때문에 .
[치구심]을 다른 말로 하면
[구하는 욕망]이지.
지금 진리를 구하고 있다 이거예요.
부처를 구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못 깨닫는다 이거예요.
그러면 한번 자기한테 이걸 적용시켜 보세요.
조주가 치구심을 부리고 있다.
아직 깨닫기 전이니까.
“도가 뭡니까?”
“치구심이다” 이거예요.
치_ 치달려서 구한다.
이거 그냥 구하는 게 아니고, 막 너무 성급하게 구한다 이 말이에요.
성급하게 구하는 마음.
그러면 보세요. 조주가
“도가 뭡니까?”
치구심이죠. 맞아요.
물론 아직 못 깨달았으니까 궁금해 궁금해 죽겠어.
“도가 뭡니까?” 그러니까
“평상의식이 도다.” 이건 고지 그대로 딱 이야기했죠.
그럼 조주는 또 치구심을 내.
“어떻게 하면 평상의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게 도라고 하니까.
여러분 평상의식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남전이
“평상의식을 구하려고 하면
즉시 평상의식하고 어긋나버린다.”
이 말 이해되세요?
자기 치구심을 돌아보라 이거예요.
이 순간 나도 모르게
지금 도, 평상의식을 내가 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도가 뭡니까? 묻고
평상의식이 도다 하니까
“어떻게 하면 평상의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얻으려고 하는 순간
여러분, 얻으려고 하는 순간
대상으로서 얻으려고 하는 순간
두 조각이 나버린다, 이거예요.
지금 전체잖아요. 답이.
타성일편, 한 덩어리잖아요.
한 덩어리를, 이거를 대상으로 구하려고 하는 순간
조각이 나버려서
이 전체를 등진다는 거예요.
평상의식을 등져버린다.
평상의식을 얻으려고 하는 순간, 평상의식을 등져버린다.
그러니까 이거를 돌아보라 이거예요.
문제는 뭐냐?
구하는 나의, 어리석게 구하는 이 성급한 마음이다.
이 성급한 마음으로 구하는 순간
진리의 커튼이 쳐져 버린다.
두 조각이 나버린다.
불이법이 불이법문의 문이 닫혀버린다.
구하는 순간 닫혀버린다.
평상의식을 구하는 순간 평상의식을 등져버린다, 어긋나버린다.
그 한자로는 乖라고 나와요.
즉괴, 즉시 이렇게 하면 乘승 자죠.
대승불교 할 때
탈 것이 ‘승’인데
이 두 개를 빼버리면 괴
괴는 어긋난다예요.
즉괴, 바로 어긋나버린다.
보세요. 전체가 우리가 찾는 건데
찾으면
찾는 놈하고 찾는 대상이 나누어지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지금 전체를 찾는데, 전체를 찾으면
바로 부분이 되어버려, 맞죠?
그래서 버려야 돼요.
이걸 찾아서는 안 돼.
이 원리를 알아차리면 찾는 그걸 버려야 돼.
혹시라도 여러분이 어떤 체험을 했다, 깨달았다.
반드시 깨달음이 부분으로 나누어져 버려요, 이 세계를.
그 깨달음을 버려야 돼.
내가 지혜를 얻었다 그러면
그 지혜하고 지혜 아닌 것으로 나누어져 버려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면
깨달음과 깨달음 아닌 것으로 나누어져버려.
부처가 됐다 그러면
부처와 중생으로 또 나누어져.
그러니까 이 점이 급소다, 급소.
이 말 알아듣기 어려워요.
왜냐하면 죽으라고 구해.
그런 거 있죠.
‘못 말린다’ 이 말이죠.
여러분이 자기를 돌아보시면
못 말리는 마음이 구하고 있다.
그래서 그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즉각 불이법문으로 들어가서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았던 것을
유마거사는 일묵, 한 개 침묵으로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길을 표시했다.
이거예요.
그랬더니 문수보살이
우뢰와 같이 장하다고
그 침묵이.
통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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