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7] 생각을 쉬면, 저절로 드러난다 | 꿈과 현실의 비밀

Buddhastudy 2024. 5. 29. 18:44

 

 

/잠시 침묵하신 후 다시 말씀하셨다.

선지식 들이여, 보리 자성은 본래 청정합니다.

보리자성 본래청정

다만 이 마음을 쓰고 있으니 즉각 깨달아 승부를 하십시오.

단용차심이니 직료성불/

 

육조스님의 깨달음을 딱 드러낸 가장 압축한 말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조계 종지, 조계종의 종지, 조계대사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까지 지난 시간에 했죠.

 

오늘은 그 선해를 보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양구라고 한다./

양구한다이런 말을 씁니다.

 

/모든 생각을 쉬면

저절로 본질이 드러나므로

양구라는 말은

의식 상태가 본질과 하나가 되어 적적

적적은 생각이 적적하다, 이거고

성성은 의식이 뚜렷하게 깨어 있는 것을 말한다./

 

양구라고 하는 말은

번잡한 인연을 쉬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저절로 생각은 가라앉고

그리고 의식은 또렷해지는 그걸 말한다.

 

/육조대사가 양구한 것은

가만히 있음으로써 자기 불성을 드러내 보여준 것이다./

그러니까 불성이 뭐냐 할 때

적적성성한 의식, 그게 불성이죠.

그래서 양구한다, 이 말은

자기 불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그 자체가 침묵의 말이다.

이거예요.

그 자체가 자기 불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 말에 부슬거사가 창건하고

고려 말에 나옹대사가 출가한 문경 묘적암에/

묘적암,

문경에 가면 대성사가 있어요.

대성사 조금 들어가는 입구에 묘적암이라고 하는 비구니 암자가 지금도 있죠.

묘적암이 있는데

근데 거기를 한번 가봤더니 현판에,

현판 아시죠? 기둥에 이렇게 세우는 거

그 기둥 옆에 벽일 거예요.

 

/‘일묵여래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말은 한 번 침묵이 우뢰와 같다.

우뢰는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 중에서 가장 큰 소리, 천둥소리

그리고 침묵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침묵 중에서 가장 조용한 소리죠.

 

그러니까 한 번 침묵하는 것이

마치 우뢰와 같은 그런 침묵으로 말을 한다.

거기에 일묵여래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좋은 말이죠.

 

/한 번 침묵이 우뢰와 같다는 뜻이다.

이것은 유마경에서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법,

불이법문_ 둘이 아닌 법의 문

둘이 아닌 것이 이 세계의 본질이죠.

이 세계의 본질로 들어가는, 그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법에 대해서 물었을 때

문보살에게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대답한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침묵으로 답을 했다.

이게 큰 가르침이네요.

 

지금 모든 우리들의 숙제는 어떻게 하면 본질로 들어갑니까?

이 말이잖아요.

본질로 들어가는 문이 무엇입니까 하니까

침묵이다.

 

그래서 그 대목을 한자로 압축하면

일묵이 여래, 마치 천둥소리보다도 더 큰 침묵이다.

 

이와 같이 양구라는 말이 일목여래의 뜻이에요.

양구한다.

조금 전에 제가 입정하겠습니다그랬잖아요.

입정, 정에 들어가겠습니다.

할 때 이 정이 일묵여래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본문 시작하기 전에

잠시 침묵하신 후, 잠시 침묵을 먼저 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말할 때

일상의 입장에서 말을 한 게 아니고

양구하면서 본질에 들어갔고

그 본질의 입장에서 말씀을 시작한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으레 이런 전통하에

이런 법회를 할 때

먼저 입정하겠습니다하고 죽비를 쳤잖아요.

그럼 그게

각자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각자 자기의 본질로 돌아가서 지금 듣자

본질이 법이죠. 그렇잖아요.

 

각자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본질

저는 저의 본질로

돌아가서 법회를 하자

그게 법이에요.

 

각자의 본질이 진리인데

어떻게 하면 본질로 돌아가는가?

현상에서의 잡다한 생각이 고요해질 때, 저절로 본질로 돌아간다.

지금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 자체에서 여기서 이미

모든 법문이 다 끝났다고 할 수 있죠.

/이어 육조대사의 안목을 보여주는 설법이 나온다.

육조대사가 공식적으로 법상에 올라가 입을 연 첫마디로서

가히 조계종의 종지라고 할 수 있다.

깨어 있는 우리의 본질은 본래부터 청정합니다.

이 말은 가히 인류 정신계의 혁명 같은 말이다./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거는 본래부터라는 말 같아요.

본래부터

본래부터 이미그래서 깨달음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걸 깨닫는다는 거예요.

본래부터 이미 청정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게 선이다.

 

그래서 인류 정신계의 혁명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역대 조사가 나오기 전에는

여러분, 모든 인류의 마음공부법은 아주 간단명료해서요

 

뭐냐 하면

이 세계에는 창조주가 있고

그 창조주가 자기를 카피해서 이 세상을 만든 거예요.

그럼, 이 세상을 만들면서

창조주는 원본이고

이 세상의 존재자들은 카피본이에요.

그러면 원본을 카피하면 어쩔 수 없이 오염이 생기는 카피본에는.

이해되죠?

그래서 그 카피가

인간이 누구인가 할 때, 원본의 복사다, 이렇게 본 거예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그래서 인간은 선도 가지고 있고, 악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은 뭐냐 하면

창조주를 복사했기 때문에

창조주의 선을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복사본이라서 오염이 되었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오염을 정화시켜서 원본하고

그러니까 복사본의 운명은 뭐냐 하면

복사본의 존재 이유는

오염된 부분을 정화시켜서 원본하고 하나 되기

이게 지금 붓다가 깨닫기 전에

모든 인류가 알고 있던 이 마음공부법이었어요.

 

육체와 정신을 정화해서

이 복사돼서 오염된 부분을 정화해서

본질하고 하나가 되는 거

거의 인간이 가지고 있던 기본 마음공부 구조였는데

혁명이라는 말은

오염되어서 정화시켜야 되는 것이 아니더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불교의 깨달음은

적의 관계이지

원래 현상은 상대세계라서

이런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함께 있는 거고, 본래 그런 거고

그러나 깨끗한 것도 본질이고, 더러운 것도 있는 그대로 본질이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러니까 요 색과 공의 관계가

부처님 이전에도 있었다 이거죠.

색과 공 자체가 없었던 건 아니다.

본질과 현상이 이런 것이 없었던 건 아닌데

그 관계가 주종 관계였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였다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적이라고 하는 걸로 연결되는

불이, 혹은 연기라고 하는 식으로 표현되는

딱 두 가지가 하나더라.

알고 봤더니 하나더라.

 

그러니까 하나를 깨닫는 거지

현상의 오염을 닦아서 깨끗하게 만들어서 계합하는 것이 아니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점이 혁명이다, 이 말입니다.

 

/모든이의 자성, 즉 본질은 본래부터 완벽하게 깨달아 있다./

지금 이 말이거든요.

모든 이의 본질은 본래부터 완벽하게 깨달아 있다.

 

/우리가 갈고 닦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본질은 이미 깨달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요 말을 우리가 잘 알아들어야 돼요.

일반인들의 상식은

내가 갈고 닦아서 깨끗하게 해서 본질하고 하나 되어서 구원받는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쉬워요. 상식적으로는.

 

근데 지금 이 새로운 혁명은

그게 아니다. 갈고 닦는 게 아니고

현상은 본래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섞여 있어요.

그러니까 물이, 깨끗한 샘물이든, 혹은 흙탕에 섞여서 더러운 물이든

물 자체의 본질은 항상 청정하다 이거예요.

그걸 깨닫는 거다 이거예요.

 

침묵이라는 말하고,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거 하고

이 둘을 딱 매칭한 말이

구약 성경의 시편 4611

구약성서 시편이 있는데 그 시편에 4611절이에요.

거기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제가 잠깐 써볼게요.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이런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있어요. 원문 그대로예요.

-Be still, 고요히 있으라

still은 고요한 거죠. 우리 한자에 멈출 지하고 같아요.

멈추어라 이 말하고 같아요.

멈추어서 고요히 있어보라

-and, 그러면

-know, 알 것이다

-that I am God, 내가 신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참 대단한 말이 있네요.

물론 시편은 저자가 예수님보다도 훨씬 앞 세대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I라고 할 때 여기에 대한 해석이

어떤 분들은 그분께서 신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Be still, 예수님은 아직 오기 전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기 전에 예언자라고 거기서 부르는

고요히 있어보라. 그러면 그분이 바로 신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할 때

그분이라고 안 하고, He is God라고 안 하고

I am God이라 썼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예요? 이 말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고요히 있으면

에고는 고요해졌죠. 생각은

에고는 생각이에요.

Be still, 스틸이라는 말은 생각이 없다. 이 말이거든

생각이 고요해지면 에고는 없어요.

그러면 에고가 없을 때 나는 뭐냐? 이거예요.

I am God이라는 말이에요.

 

지금 유마거사가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법에 대해서 문수보살이 한번 말씀해 보세요.”

했을 때 가만히 있었다 이거예요.

윤박사가 가만히 있음으로써 I am God, 이게 불이법문이에요.

 

불이법문은 뭐냐 하면 둘이 없다는 말이잖아요.

불이법문

둘이 없는 진리로 들어가는 문

 

여러분, 진리가 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둘이 없다. 불이

여기서 지금 답이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럼 만약에 불이라는 말에 충실하다면

I가 있고 God이 있으면 어떻게 돼요?

불이가 아니고 이법이 되죠, 이분법이 되죠.

진리는 이분법이 아니다, 이 말이거든

 

그러면 내가 있고, 신이 있고 하면

이거는 둘이다, 이법이다 이거야, 이법.

근데 진리는 불이법이다 둘이 있다.

여기에 충실하다면 보세요.

여기서 충실하다면 나 따로 신 따로가 아니고

내가, I am이라는 말은

우리 한자로 하면

’, 색즉시공할 때

‘I God’이다 이거예요.

현상즉 본질이라는 말하고 같고

그러니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I am God이라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불이법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거 하나에만 충실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거에만 충실하면

내가 있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있고

따로 진리가 있다든지, 따로 부처가 있다든지, 따로 신이 있다고 할 때

일반적인 상식은 그렇죠.

 

그러면 우리가 불이법문에 들어가려면

이 둘을 다 가지고는 못 들어가요. 맞아요?

그래서 하나를 버려야 되잖아요.

하나를 버릴 때 일반인들한테 물어보면

나와 부처가 있으면

이 둘 중에서 둘이 함께 있어서는 진리의 문으로 못 들어가니까

하나는 버립시다.

그럼 일반인들한테 뭘 버릴까요?” 하고 물어보면

1번 나를 버린다.

2번 부처를 버린다.

 

1? 2?

손 안는 사람은 뭐예요?

실제로 버릴 수 있는 거에서

라는 말 대신에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거

지금 여러분 이렇게 앉아 있죠, 맞아요?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것하고

본질인 부처하고

그 둘 중에서 실제로 버릴 수 있는 걸 해보자 이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을 한번 버려보세요.

엠블런스 소리 들립니까?

듣는 것이 있죠.

그거 한번 버려보자 이거예요.

버려집니까?

못 버리겠어요?

 

그러면 2번에 가서 부처 한번 버려봅시다.

다른 말로 하면 부처 없이도 살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다는 사람도 있고 ㅎㅎㅎ

 

사실은 여기 앉아 있는 것하고 부처하고 같은 거죠.

지금 불이 중에 하나는 버려야 되잖아요.

실제로 버릴 수 있는 것은

지금 여러분 앉아 계신 있는 그대로의 여러분 없이

부처가 존재 가능하냐? 이거예요.

어때요?

여러분이 없는데 부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면 더 크게 봐서, 여러분이 없는데 신이 있을 수 있나요?

그래서 지금 뒤바뀐다 이거예요.

존재의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것이 지금 공부의 핵심 포인트예요.

 

지금 양구라고 하는, 조용하게 있는 거

멈출지, Be still, 멈출

know that I am God, 이게 볼 자예요.

그러니까 요 시편의 이 말은

불교에서는 지관이라고 해. 이것을 지관

다른 말로는 정혜

남방불교 쪽에서 쓰는 용어를 쓰면 사마타, 위빠사나 이렇게도 쓸 수 있어요.

 

그러면 이거를 합쳐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왜 고요히 있으면

내가 바로 본질이라는 것을 안다.

이 현상이 있는 그대로 본질이라는 것을 안다.

이게 깨달음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왜 그러는가를 한번 잠깐 생각해 봅시다.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한번 말해볼게요.

궁금하나요?

 

깨달음이 뭔지를 한번 여러분께서 실감 나게끔 제가 한번 이야기를 해볼게요.

깨달음이란

우리가 꿈을 꿔봤죠, 꿈꾸는 사람이 있죠?

꿈꾸는 사람이 있고 꿈속에 사람이 있죠?

깨달음이란 뭐냐 하면

꿈꾸는 사람이

자기를 꿈속의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다가

문득 자기는 꿈속에 나오는 그 사람이 아니라

꿈꾸는 사람임을 알아차리는 거.

 

지금 따라오는 사람도 있고

한 번 가지고 안 되는 사람도 있어서, 한 번 더 말해볼게요.

 

깨달음이란

꿈꾸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꿈에 미혹되어서, 매혹당해서, 도취되어서

꿈속의 사람을 자기라고 착각했다가

문득 자기는 꿈속에 나오는 그 사람이 아니고

이 꿈을 꾸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

이게 깨달음이라는 거예요.

 

이거를 그 장자라는 책에 보면

어느 날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자기가 나비가 되어서 아주 가볍게 훨훨 날아다녔다.

그랬는데 문득 잠에서 깨보니까

어 나비가 아니고 장자네이렇게 된 거예요.

거기서 한 줄 덧붙이기를 장자가 이 말에

호적몽이라고 하죠.

호랑나비 나비 중에서도 호랑나비, 호적 호랑나비 꿈

장자가 뭐라고 했냐 하면

어 이상하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건지

장자가 자기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건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라고 하는 인간이 된 꿈을 지금 꾸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데

이렇게 끝난단 말이에요, 그 말이.

 

꿈속의 나비입장에서는

장자라고 하고 온 것이

나비의 꿈속에 나타난 사람이 꿈속의 사람이야.

그러면 어떤 게 진짜냐 이거예요.

 

우리도 지금 수없이 꿈을 꾸죠.

사실은 과학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는데

단지 기억하는 꿈이 있고, 기억 못하고 그냥 흘러버렸을 뿐이지

꿈은 꾼다 이거예요.

꿈을 깨고 난 뒤에 이 기억이 그 사람 거라면

꿈을 깨서 그 사람이 사라졌으면 기억도 사라져야 되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제가 지금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 지금 기억은 꿈속의 사람의 기억이 아니고

지금 이 꿈에서 깨어 있는 나인데

또 나도 보면, 그러니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현실도 꿈하고 별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

놀랍게도 이 현실에도, 생시에도, 시간이라는 게 있어요.

시간이라는 게 있어서

지나간 거는 시간과 함께 사라지죠.

뭐만 남아요?

기억만 남죠.

 

꿈도 마찬가지예요.

꿈도 깨면 허망하게 사라지는데 기억은 남아.

생시도 진짜 허망하게 꿈과 똑같이

아니 저는 저의 60년이 그냥 사라지고 없다니까.

이게 어디 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근데 기억은 있어.

그러면 그 기억이 누구의 것이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문제들이 하나의 급소다, 깨달음의 급소다.

 

꿈의 내용이건 생시의 내용이건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다.

근데 그 자체는 지나가고 없다.

 

그러면 논리적인 결론이 뭐냐 하면

꿈속의 사람이 꿈을 보는 게 아니라

그 꿈의 기억을 누가 하느냐 하면

그 꿈을 꾸는 의식이 기억하고 있고

그 사람이 죽음으로써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면

그러면 꿈의 내용을 꿈꾸는 사람이 봤다고 하겠지만

꿈속의 사람은 사라져도

지금 기억하고 있다이 말은

이 실제로 꿈을 본 거는 꿈속의 사람이 본 게 아니고

그 꿈을 꾸는 의식이 본 거다 이거예요. 맞아요?

 

그럼 지금도, 이 생생한 대낮에 지금 이리 보고 있잖아요.

그거 기억하죠?

그러면 이 보고 기억하는 것은

이 생시 속의 사람이 아니고

의식이 이것을 지금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이 눈을 통해서 실제로 이 생시를 보는 것은

이 생시 속의 사람이냐? 생시 속의 사람은 김 아무개잖아요. 저 같으면

여러분 같으면 이 아무개, 뭐 이러잖아요.

김아무개가 지금 보는 게 아니다 이거죠.

뭐가 보느냐?

이 생시라고 하는 꿈을 꾸는 의식이

지금 보고 있는 거다 이거예요.

 

아니 제 말이 논리적이잖아요.

한번 반론을 제기해 보세요.

왜냐하면 꿈속의 사람이 보는 게 아니라

그 꿈을 꾸는 사람이 실제로는 보는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생시도,

생시라고 하는 이 꿈속에 나타난 김아무개가 지금 본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아니고

의식이 김아무개의 눈을 통해서 지금 보고 기억하고 있다, 이거예요.

 

눈을 통해서 보고 계시죠, 맞죠?

그럼 여러분 눈 뒤에는 뭐가 있어요?

실제로 보는 것이 있다 이거예요.

그게 의식이다 이거예요.

실제로 의식이잖아요.

의식이 눈을 통해서 보는데

그 의식이 김 아무개는 아니다 이거예요.

 

김아무개는 뭐냐 하면

요 꿈속의 나나, 또 생시 속에 지금 나는 생각하는 나예요.

그건 생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Be stil, 그 생각이 멈추면, 생각이 멈춰서 고요해지면

현상에서의 나는 사라진다.

그럼 죽은 건 아니다.

남는 게 뭐냐 이거예요.

 

생각이 고요해지면 김아무개, 혹은 나라고 하는 그런 것들은

아상은 사라진다

깨어 있는 게 있잖아요.

그게 지금 God의 다른 이름이 의식이다, 이거예요.

 

밤에 꾸는 꿈도 꿈이고

생시에 꾸는 지금 이것도 생시라고 하는 꿈이다.

꿈속에 나타나는 그 사람이 진짜 나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걸 보는 것은

꿈속의 사람이 꿈을 보는 것도 아니고

생시의 사람이 이 생시를 보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보는 건 뭐냐?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