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깨닫기 위해서 핵심 포인트가
이 분별심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어요.
왜냐?
깨닫는 대상은 이 본질과 현상을 다 아우르는 중도, 일심인데
이것은 언제나 전체예요.
전체인데 이 전체를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분별해서 나누어서 한쪽을 잡으려고 해요.
‘진리다’ ‘거짓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한쪽으로 이 전체를 나누어서 한쪽을 잡으려고 하는 거
이게 지금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 그러면 이거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한 번만 보십시다.
지금 육조 혜능이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바로 여러분의 분별심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지금 당장 이 순간,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진리를 이거라고 부분으로 잡으려고 하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아주 중요한 핵심이에요.
지금 염불하시는 분은 아미타불
참선하는 사람들은 진여자성, 아미타불
기독교인 같으면 하나님, 혹은 성령님
이것을 나누어지지 않는 전체인데
이것을 부분으로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거를 못 잡는다.
이때 ‘잡는다’는 말은 ‘깨닫는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진여자성을 깨달으려면
전체인 것을 우리가 깨닫는 건데
지금 아직까지 못 깨달은 사람은 왜 못 깨닫느냐 하면
아주 간단하다, 이유가.
이 진여사성이 전체인데, 진리는 전체인데
이 전체를 부분으로 내가 깨달으려고 한다, 이거예요.
진리는 아주 단도직입으로 말을 하면
진리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전체가 진리예요.
다시
진리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전체가 진리예요.
근데 우리는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다시 말하면
현실 자체, 혹은 현실 전체.
지금 눈앞에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당면하고 있는
이것 전체가 이대로 진리인데
우리는 이것을 이대로 이거를 두고
다른 어떤 부분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거예요.
이것을 분별해서 어리석게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뜻밖에도
우리가 지금 진리를 놓치고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지금 깔아뭉개고 앉아 있는 지금 여기
지금 여기 이 현실
이 전체, 지금 경험하는 이 전체
이것이 진리인데
이거를 두고
누구나 모든 사람이 100% 항상 진리를 대하고 있어요.
그 속에 있어, 자기가.
그런데
이거를 두고 따로 무언가를 찾는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못 깨닫는 아주 간단 명료한 단순한 이유예요.
그리고 찾는 그 마음이 지금 흔들린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현실을 한번 보세요.
이 현실을 할 수 없이 우리가 파악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나누어서 말을 해 본다면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 자체가
그러니까 현실 자체
현실 자체는 세 가지로 기본적으로 구성돼 있어요.
하나는 공간
두 번째는 시간
세 번째는 삼라만상을 대표해서 인간
옛분들이 이미 이렇게 이야기를 해 놨잖아요.
우리 말에 ‘간’이 붙는 말은 3개밖에 없다.
그래서 공간, 시간, 인간
이게 지금 합쳐진 게
지금 우리 눈앞에 보고 있는 이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현실 이대로
그러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여실지견
여실지견 있는
실_ 현실하고 여_ 똑같은 지견
현실에서, 현실에 부합되는 지견
여실지견 이게 지금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의 내용이거든요.
여실지견을 깨달은 거예요.
그럼 여실지견의 내용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지금 이 순간 대하고 있는 눈앞의 현실
이 통으로, 전체.
이게 진리예요.
그 진리를 말로 한다면
공간은 법신이라고 부르고
왜냐하면 공간은 안 변하잖아요.
그러니까 법신이라고 부르고
시간은 이 법신이 에너지가 꽉 차서
법신의 무한대의 이 빈 공간에 에너지가 꽉 차서
에너지가 움직이는 것을 시간이라고 이렇게 불렀어요.
그러니까 이걸 보신이라고, 시간은 보신
그리고 인간으로 대표되는 삼라만상은 그 에너지가 형성된 것
법신, 보신, 화신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성부, 성령, 성자
이렇게도 표현할 수가 있는 것.
삼위일체, 이것이 하나인 것
일심이라고 한 개 의식이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마주치는 이 현실 전체가 한 개 의식이다.
한 개 의식이
본질과 현상으로 지금 이렇게 나누어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 본질은 법신이고
현상은 보신과 화신
법신은 공간
보신은 시간
화신은 인간
이게 합친 게 일심, 한 개 의식이고
일심이 바로 눈앞에 적나라한
그냥 아주 간단하게 쓴다면 현실이에요.
눈앞에 나타나 있는 이 적나라한 진리를
이미 있는 것 그대로 완벽하게 이렇게 드러나 있는데
이거를 우리는 지금 이걸 두고
이 중에 뭔가
이건가 저건가 하고, 깃발인가 바람인가 하고
지금 따지는 분별심
그러니까 이것 때문에 못 깨닫고 있다는 거예요.
그 분별심이 중생심이에요, 한마디로.
그러면 부처의 마음은
불심은 흔들리는 그것을 자각을 하고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보면
깃발이나 바람이나
깃발 바람을 포함한 이 전체
지금 눈앞에 지금 드러나고 있는 이 전체
이게 그냥 있는 그대로의 진리 실상이에요.
말로 하면 진짜 간단 명료한데
어떻게 간단 명료하냐?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삼위일체가 된 그냥 신이다 이거예요.
그런 말을 가끔 우리가 했잖아요.
“현실이 곧 신이다” 이런 말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드러난 이것을
이 전체가, 그냥 공간, 시간, 삼라만상
요거 자체가 그냥 통으로 그냥 한 개 의식인데
이게 그냥 진리다 이거예요.
근데 이거를 우리들은 분별해서
그 부분을 이건가 저건가 하고 찾으니까
지금 마음이 흔들려서 이걸 놓치고
우리가 분별 망상이 일으키는 갈등과 고통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뒤집어 말하면 정말로 간단명료한 것 같아요.
여러분 보세요.
지금 법신 보신 화신 합친 것,
시간 공간 인간 합친 것,
본질과 현상 합친 것
그게 결국에는 눈앞에 있는 이 전체 한 개 의식의 세계.
이것이 한 개 의식이라는 것이
개념으로 있지 않고
지금 구체적인 눈앞에 현실로
눈앞의 현실
이게 지금 본질+현상이고
공간, 시간, 인간이 합쳐진 거고
법신, 보신, 화신이 합쳐진 거고
성부, 성령, 성자가 합쳐진 거고
그러니까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신비, 그게 뭐냐?
지금 눈앞에 있는 이 현실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요 전체가 있는 그대로 완벽한 진리 자체라서
문제는 우리가 모든 사람한테
언제나 이 현실이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거를 두고 눈이 다른 데로 가서 뭔가를 찾는다 이거예요.
돌아보면 참 기가 막힌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진리가 무엇인가?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나타나 있는 이 전체가 진리다.
그냥 한마디로
그래야 진리일 거 아니에요?
진리에 무슨 예외가 있으면 진리가 아닐 거 아니에요.
그리고 진리가 숨어 있으면 진리가 아니잖아요.
이렇게 환하게 지금 다 드러나 있다, 이거예요.
그 드러나 있는 이것이 무엇인가?
한 개 의식인데
그 의식이 세 가지 양상을 가지고 있다.
둘로 말하면 본질과 현상이고
셋으로 말하면 본질은 법신이고, 현상은 보신과 화신
에너지와 에너지가 뭉친 이 모양을 가진, 모양으로 드러나 있는, 이 삼라만상이
전부 다 법신에서 나와서 법신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게 공간과 시간과 인간이라고 하는.
그러니까 기가 막힌 게 옛분들이 답을 말해 놓았다, 이거예요.
하필이면 ‘간’자가 붙는 단어가 이 3개밖에 없는데
그 3개가 이 한 개 의식을 우리가 분별해서 구분해 본다면
이런 식으로 분별되는데
그중에 어느 개체가 아니고, 부분이 아니고
이 세 개가 합쳐진 거
공간이면서, 시간이면서, 삼라만상인 것
이게 지금 의식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지금 우리가 깨달음의 내용이기 때문에
여러분께 당부드릴 것은
여러분, 눈앞에 현실이
다시 말하면
공부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현상밖에 모르니까
그냥 드러난 현상으로서의 ‘산은 산이다’, 하는 거예요.
근데 공부를 만나면 현상만이 다가 아니고
현상은 본질이 나타난 것이라서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
그 본질을 발견하게 되면
‘산은 산이 아니다’라고 그걸 표현을 하는 거예요.
본질은 공이니까.
그런데 그 한 번 본질을 확인해서
그다음 공부는 공부가 완성되려면
그 의식이라는 것이 텅 비어서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내 몸을 포함해서 딱 지금 경험하는 이 세계, 전체
그러니까 의식이라는 것이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눈앞의 현실 전체가
한 개의 의식이 드러난 것이다, 이거예요.
이게 전체 다지, 이거 외에 따로 뭐가 있지는 않다.
그러니까 ‘산은 산이다.’
일반인 입장에서는 현상밖에 모를 때는 ‘산은 산이다.’
근데 본질을 발견하면 ‘산은 산이 아니다.’
근데 그 본질과 현상이 눈앞에서 하나의 통으로 현실로 딱 드러나기 때문에
‘역시 산은 산이다.’
그러니까 ‘역시 산은 산이다.’
이게 지금 이 현실에 대한
한 번 갔다 온 사람의 안목이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공부하실 때
계속 이 눈앞에 현실을 두고
뭔가를 이렇게 찾고, 혹은 잡고, 혹은 ‘이거다’ 하고 하고 있으면
이 눈앞의 현실하고 그거하고 떨어지게 되어서
완전한 공부가 아니다.
그러니까 본질을 한 번 발견하고, 의식을 한 번 발견하는데
그 의식이 어떤 좀 약간 그 뭐라 그럴까?
이런 개념적인 흔적이 남아 있거든요, 대개는.
근데 그것이 싹 사라지고
눈앞의 현실이 100% 요대로 의식이다.
그 의식의 모습은
공간, 시간, 인간.
더 줄이면 본질과 현상.
이대로 지금 눈앞에 현실로 이렇게 딱 드러나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공부의 끝은 뭐냐?
완벽하게 현실로 돌아오는 거예요.
이것밖에 없어요.
여러분 그렇지 않나요?
결국에는 눈앞에 현실밖에 없어.
이게 공부의 끝이다, 이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되면 좋은 게 뭐냐 하면
더 이상 분별심이 잠재워져요, 분별심이.
분별해서 찾는 추구하는
좋다 나쁘다 하는, 옳다 그르다 하는, 그것이 잠재워져요.
그러니까 지금 흔들리는 것은
여러분들의 분별심인데
문제는 그 분별심이 잠재워지려면
이 눈앞에 현실 전체가, 혹은 현실 자체가
이게 그냥 한 개 의식이라고 하는
그것으로 딱 떨어지면
그다음부터는 흔들림이 없다.
그러니까 부동심을 얻는 비결을 말하고 있어요, 제가.
부동심을 얻는 비결은
눈앞의 현실이 진리이기 때문에
여기를 벗어나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거예요.
눈앞에 현실이 진리라는 말은 참 기분 얼마나 좋은 말이에요
여러분이 현실을 벗어난 적이 있어요?
항상 이렇잖아요.
다른 말로 해볼게요.
부처님한테는 이 현실이 다르게 보일까요?
부처님한테는 이 현실에 대한 지각이 우리랑 달리 뭐 좀 특별할까요?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면 예수님한테는 이 세계가 달리 보일까요?
아니다. 똑같다. 우리랑 똑같다.
왜냐?
현실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 몸도, 우리도, 이 속에 있잖아요.
나를 포함해서 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 이것이 그냥 딱 떨어지게
이게 그냥 진리다.
근데 우리는 이거를 두고 뭔가를 찾는다 이거예요.
찾는 순간 현실을 등져버리고 벗어나게 되잖아요.
공부 과정에서는
현상밖에 모를 때는
현상으로서의 현실은 물론 다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분법에 빠져요.
근데 이 현상으로서가 아닌
의식 자체, 본질 자체로서의 이 현상이 드러나고 있는 그 원재료, 원 바탕
그거를 한번
“지금 깨어 있는 이것이 의식이구나” 하는걸, 한 번 자각은 해야 돼요.
근데 그다음 공부는
그 의식이
이 현실을 두고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현실 자체가 의식이라는,
이렇게 딱 방점이 찍어지면
현실이 진리라고 하는 방점이, 현실이 의식이라고 하는 방점이 딱 찍어지면
그다음부터는 찾는 마음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항상 현실 속에 있으니까
여러분 현실 벗어날 수 있어요?
현실이 다예요.
현실 외에 따로 뭐 없어요.
공부가 끝에 오게 되면
현실로 딱 돌아오게 되고 현실은 항상 눈앞에 있잖아요.
내가 깨나 잠드나 깨나 그냥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뭘 깨닫는가?
결국에는 현실을 깨닫는 거다, 이거예요.
그럼 현실은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100% 완벽하게 공간, 시간, 인간으로 주어져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더 이상 찾을 것이 없다.
다만 이것을 깨달아야지.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이 현실, 그냥 진짜 있는 그대로
이게 통으로 한 개 의식이다.
의식의 세 가지 양상은
법신, 보신, 화신
공간, 시간, 인간
눈앞에 이거 그대로 공간, 시간, 인간.
이게 그냥 현실.
통으로 이거다 이거예요.
이거 하고 계합한다.
그리고 계합해 보면 본래 이렇게 완벽해 있다.
나 혼자 지금 마음이 흔들려서
괜히 깃발이 흔들리냐? 바람이 흔들리냐? 하고
지지고 볶는 그 세월을 가졌다.
그래서 괴로웠다.
근데 그 괴로움을 통해서
우리가 마음공부로 들어오게 되고
그럼 깨닫게 되면
최종적인 결론은
뜻밖에도 눈앞의 현실
이게 최종적인 결론이다, 이거예요.
지금 딱 눈앞의 이 현실이라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의 눈앞, 이거 외에는 없다.
여러분, 우리들의 모든 추구가 결론은 어디로 오는가?
지금 딱 요 눈앞의 현실로 와서 끝이 난다.
아무 일이 없다.
본래부터 아무 일이 없다.
혼자서 이거를 두고 뭔가가 있는 줄 알고
지지고 볶고, 지지고 볶고 하다가 돌아오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까 송나라 시대 어느 비구니 스님의 시가 생각나네.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봄을 맞으러 산에 올라서
‘봄이 언제 오느냐?’ 하고
봄을 찾으러 온산을 뒤졌더니
결국 못 찾았는데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니까
집들에 매화꽃이 피었더라./
이런 시 기억나세요?
지금 보세요.
보물 찾으러
이 말은 진리를 찾으러
산에 올라서 온 데를 뒤져서 어디 있나 했는데
결국 못 찾고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뜻밖에도 집 앞에 매화꽃이 환하게 피어서 봄소식을 알리더라.
공부가 지금 현실에서 살다가
이것이 아닌 뭔가 진리가 따로 있는 줄 알고
그걸 찾아서 헤매고 헤매다가 못 찾고
결국은 터벅터벅 돌아왔는데
뜻밖에도 모든 사람이 지금 여기 맞이하는 이 현실
이게 최종적인 진리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딱 오면
이 진리를 깨닫는 게 왜 중요한가?
분별심과 치구심이 멈춰요.
여러분 분별심과 치구심이 멈춘다.
이 말은 번뇌망상이 멈춘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행복은 번뇌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멈추는 그 마음을 부동심
부동심의 반대말이 지금 흔들리는 마음
이게 분별심이에요.
이 분별심이 언제 끝나느냐?
우리가 찾고 있던 그 진리가
이 엄청난 철학자가 나왔는데
보세요. 여러분 결론입니다.
이렇게 많은 그 지금도
로마 바티칸 궁전에 한쪽 벽에 이렇게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굉장히 큰 그림이에요.
그 아테네 학당에 60여 명의 철학자들이 이렇게 펼쳐져 있는데
60여 명의 철학자들이 다 각기 다른 주장을 했잖아요.
이해되세요?
근데 그 모든 사람이 육조 혜능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어.
그 모든 사람을 다 합쳐버린 것.
너도 옳다. 너도 옳다. 너도 옳다. 너도 옳다.
황이 정승 같네.
싸우는 두 사람이 왔는데
이 사람이 막 자기 주장하니까
“네 말이 옳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막 주장하니까
“네 말도 옳다.”
그러고 이 두 사람이 가고 난 뒤에 그 비서가
“아니 이 사람도 옳다 그러고, 저 사람도 옳다 하면, 누가 옳은 겁니까? 말이 됩니까” 하니까
“그래 너 말도 옳다” 그렇다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모든 게 각자 옳다.
모든 게 그 위치에서 그냥 그렇게 하는 거다 하고
이 모든 걸 싹 다, 싸그리 그냥 다, 한 품으로 다 품어버리는 것
이게 지금 육조예요.
여러분 우리가 엄청난 공부하고 있지 않나요?
지금 모든 동서양 철학을 딱 다 한 꾸러미에 다 꿰버리는.
그것이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분별심이 움직이고
그 분별심 하나가 이 현실로 돌아와 버리면
부동심
있는 그대로, 이 이상 진리는 없어요.
그러니까 참 육조 혜능이라고 하는 분이
왜 이렇게 조계라고 하는 이름이 이렇게 큰가?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을 한 꾸러미에 다 탁, 한 꾸러미에 다 집어넣었다.
그거 집어넣은 게 뭔가?
지금 눈앞의 현실이다, 이거예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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