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서는 특히 구마라지 스님이 번역할 때는
마음 ‘심(心)’자가 떨어져서 생각 ‘상(想)’에서 생각의 모양인데
생각 ‘상’자는 생각의 모양인데 그 관념인데
마음 ‘심’자를 떼고 모양 ‘상(相)’자만 남겨서
‘상’이라고 하는 불교용으로 정착이 되었는데
그러니까 아상, 나라고 하는 그 관념이 생김으로써
이 전체 흐름하고 어긋나기 시작한
어긋난 것이 ‘두카’라고 하는 ‘고통이라고 그렇게 부르는 거거든요.
정말 전체 흐름을 따라간다? 수능한다?
그러고 사는 것이 최고의 지혜인데
우리들은 ‘나’라는 것이 있어서
그 나가 자기 기준이 있어서
이 세계가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그 나라고 하는 것이 자기 기준으로
이걸 좋다 나쁘다 하고 재단하면서
탐진치가 벌어져서 고통이 벌어지는
딱 그 원리거든요.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이걸 다시 수습하기 위해서는
‘나’라고 하는 그 좁은 관념에서 벗어나서
소위 말하는 ‘인두꺼비’라고 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두껍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에서 벗어나서
나의 본래면목이 의식이고
그리고 이 본래면목으로서의 의식은
눈앞에 이 전체로서 드러나고 있어서
내가 개체이지만 동시에 이 전체라고 하는
화신, 보신, 법신이 소화가 되어서
내가 동시에 법신이면서, 보신이면서, 보신은 에너지,
법신이면서, 법 다르마면서
보신, 에너지이면서
또 이 개체라고 하는 것이
동시에 삼위가 일체가 되는 그런 자기를 자각해서
이 흐름에 따라가서 살아가면
문제가 없다, 이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지금 공부를 통해서
매일매일 이것을 익혀나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퀀텀 점프는 양자 점프잖아요.
어떤 완전히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획기적인 도약
그 도약이 현상에서 본질로의 도약이에요.
그게 한 번 일어나야 되고
그다음에는 다시 본질이 현상하고 하나가 돼야 돼.
현상에서 본질로 갔다가
거기서 머물 수 없어.
그래서 현상으로 돌아와야 되는데, 중도가 되어야 되는데
그래서 돌아와서 결론은 뭐냐?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우리 공부가 그래서 어쩌라고? 할 때
마지막 결론은
눈앞에 있는 현실밖에 없다.
이게 본질하고 현상이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미 본래부터 그렇다.
그거를 우리가 딱 깨달아서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게 지금 우리 공부의
“그래서 어쩌라고?”에서의 결론인 거예요.
“그래서 어쩌라고?” 할 때는
이 눈에 보이는 이것밖에 없다고, 이게 다라고.
여기서 최대한 잘 살아야 된다고.
여기서 최대한 잘 살아야 된다고
그러면 여기의 법칙은 인과의 법칙이라고.
그러니까 본질로서 이 현상을 살아가는데
여기의 법칙은 인과의 법칙.
최대한 이 순간 내가 지혜롭게
인을 잘 지어서 과를 만들어내는 것
그게 결론이다.
그러면 인을 잘 짓는다는 건 뭔가?
인을 잘 짓는 거는 뭔가?
지혜와 자비라는 거예요.
현상에서 최고로 살아가는 방법은
이 현실에서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은
법신, 보신, 화신이 하나가 되어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은
인을 잘 만들어서 과를 성취하는 건데
그 인은 지혜와 자비라고요.
그러니까 정말로 지혜는
본질의 자리에서 현상을 보는 게 지혜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본질 입장에서는
모든 현상이 자기의 자식 같은
자기의 분신이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이것이 우러나온다, 이거죠.
인과를 잘 만들어 나가는 게 최고의 지금 모습이에요.
한탄할 필요 없어요.
신세 한탄할 거 없어.
있는 자리에서 인과를 잘 지어 나가는 것.
이게 이 공부의 끝이에요.
이 공부의 끝은
너무나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기본인 인과로 다시 돌아 나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현실밖에 없어.
현실 자체가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이 하나 된 모습이에요, 이미.
본래부터 그래.
그러니까 여기서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은
인과를 잘 지어 나가는 것.
과거에 인을 지은 결과가 지금이죠.
여러분, 지금 이거를 내가 만들었어요?
누가 만들어서 내가 이리 된 거예요?
철저하게 내가 만들었다, 이거예요.
그 과를 딱 받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앞으로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정확하게 인과가 펼쳐진다.
그러면 지금 내가 최선을 다하는 거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지혜와 자비다, 이거야.
문수와 보현
이거를 뭐라고 표현하든
딱 우리가 이거를 잘 쓰는 거다, 이거예요.
여러분 주관이냐? 객관이냐? 하고 싸우는데
알고 보면
주관도 객관도 모두 현상에 속하고
현상은 인연 따라 나타난 꿈 같은 거예요.
주관도 객관도 현상에 속하는 거예요.
따라서 주관인 아무개
이 아무개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서 이 세계를 재단하고 있다.
이 말 이해되세요?
그리스에 그런 철학자가 있었어요.
이름이 프로타고라스인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인간은 만물의 자, 척도다.
모든 걸 인간이 자기 입장에서 모든 걸 다 재고 있다.
그리고 이걸 진리라고 생각했어.
근데 알고 봤더니
그 모든 것의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자기 자신이 생각일 뿐이라는 것.
객관만 생멸하는 게 아니라
주관도 생멸하기 때문에
이것은 실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죠.
다시 말하면
바다에 파도가 칠 때
파도의 거품은 수많은 모양으로 다양하게 일어나지만
그 거품이 실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신에 거품 하나하나가 무엇인가?
전부 물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거품을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거품이 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정말 중요한 거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관이나 객관이나 전부 다 거품 같은 거다.
그러면 거품을 이루고 있는 재료가 무엇인가?
물이잖아요.
그것처럼 주관도 의식이고 객관도 의식이에요.
중요한 것은 주관이냐? 객관이냐?가 아니고
주관도 의식이고 객관도 의식이니까
이 한 개의 의식, 이게 중요한 거다.
그러니까 그 통찰을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굉장히 기뻐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기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회의 그 어느 학문도
전부 현상계를 말하지
이 모든 현상이
본질이 나타난 것이라는 말을 하는 거는 없잖아요.
있어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전 세계 나라를 구해서
공부 중에서는 최고 깊은 공부를
이렇게 지금 우리가 하고 있어요.
*!
소리 들어보세요.
현상의 모든 것들은
소리처럼 인연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무상
영원하지 않고
또 소리는 생겼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실체라고 할 수가 없어서 무아죠.
소리만 그런 게 아니고
현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이걸 유위법이라고 해요.
유위법이란 말은
인연 따라 생긴 모든 것
유위법_ 인연 따라 생긴 모든 것들은
무상하고, 무아예요.
근데 이거를 집착하면 고통이 생기는 거죠.
집착하면 고통이고
집착하지 않으면 열반,
제행무상, 제법무아인데
이것을 모르고 이 유위법을
집착하면 일체개고가 되고
집착하지 않으면 열반적정이 되는 것
그러니까 열반적정이 부동심이다, 이거예요.
지금 우리 공부는
부동심으로 현상을 살아가기
이게 지금 공부의 지금 목적이에요.
/그래서 본질에서 보면
주관이든 객관이든 실체가 없이 찰나 생멸하는 것이어서
진리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본질의 입장에서는
주관이든 객관이든 모두 객관 현상일 뿐이다./
여러분 주관이 알고 봤더니 객관인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알고 봤더니 유령이었어.
내가 실체에 있는 모든 존재인 줄 알았더니
알고 봤더니
나도 인연 따라 생겼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그러면 진짜 나는 무엇인가?
지금 현실 전체로서 있는
개체가 아니라 전체로서 있는 이 생명 자체.
혹은 의식 자체.
이게 참나다 이거예요.
나가 개체의 나에서, 이건 화신이고
이 에너지 자체가 보신이고
그리고 이 공간 자체가 법신으로
이게 나의 확장이에요.
우리 공부는 결국은
나의 확장, 화신에서 보신으로, 법신으로
내가 확장되는 그런 공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법신의 입장에서 보면
나도 현상일 뿐이죠.
법신의 입장에서 보면
진짜 주체는 법신, 자기고
모든 현상은 객체예요.
손님이야, 손님.
왔다 가는 손님이야.
그 손님 중에 김 아무개도 들어 있다, 이거예요.
그럼 진짜 주인은
이 불생불멸이면서도 모든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 전체.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 전체가
동시에 법신, 보신, 화신이라고 하는 이 사실
삼위일체가 딱 되어서
이것이 계합이에요, 계합.
이 현실에서 내 마음이 떠나지 않는 것
내 마음이 현실에 딱 뿌리내리고 있는 것
이게 부동심이에요.
그럼 현실은 본질과 현상으로 되어 있어서
본질의 입장에서는 하되 하는 바가 없고
근데 현상 입장에서는 하는 바가 없는데 또 하고 있고
이게 소화가 된다.
삼위일체로서 따로따로 놀지 않고.
그러니까 삼위일체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어서 신비라고 하잖아요, 신비.
제가 공부했던
한참 제가 강의 오랫동안 들었던 김호근 목사님
김호근 목사님한테
제가 한번 물어본 적이 있거든요.
“선생님, 철학은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봤어.
김호근 선생님이 뭐라고 답변하셨냐 하면
“내 철학은 하나, 둘, 셋이지”
“하나, 둘, 셋
성부, 성령, 성자 이것이 하나인 것
그게 내 철학이지” 그러시더라고.
항상 이야기를 하실 때
이 세 가지를 딱 말씀하시고
이것이 하나다
항상 그렇게 그 논조를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당신의 모든 공부는
하나, 둘, 셋
근데 그 하나, 둘, 셋이
태극기의 원 안에 있다, 그러셨어요.
그러니까 이분도 참 재미있는 분이에요.
기독교회 목사님인데
또 불교와 주역, 또 논어, 맹자 같은
이런 것도 아주 열심히 즐겨 공부하였어요.
그런데 결국은 들어보면
기독교나 불교나 특히 깨달음의 세계를 다루는 선불교나
결국에는 이 삼위일체라고 하는 신비
이 안에서 모든 것이 회통된다.
여러분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그냥 나온 거 아니에요?
정말로 치열한 논쟁이 있었어요.
삼위일체가 진리냐? 아니냐?
이거를 가지고 정말로 목숨 걸고 싸웠던 시대가 있어요.
그런 걸 통해서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진리다라고
딱 못을 박은 그런 신학 논쟁들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은, 경험적으로.
딱 결론이 뭐냐 하면 경험적으로
여러분 보세요.
경험적으로 일종의 우리가 이 깨달음의 경험인데
경험적으로 눈앞에 이거 전체가
한 개 의식이면서
한 개 에너지이면서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삼라만상이에요.
지금 경험적으로
지금 정법안장_ 바른 법은 눈에 있다.
이것이 경험적으로
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눈의 자리에 지금 들어와 있는 이 세계
이 세계가 동시에 법신이면서, 보신이면서, 화신인 거예요.
이게 동시이기 때문에 논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
그래서 신비라고 할 수밖에 없어.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이것이 확실해.
지금 따라오십니까?
경험적으로는 확실해.
근데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돼.
동시에 법신이면서 보신이면서 화신이다.
동시에 성부면서 성령이면서 성자라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돼.
근데 경험적으로는 그래.
그러니까 이것이 딱 이렇게 하나가 되어서
오늘은 두 가지 중요한 일을 이야기했어요.
첫 번째는 결국 우리 공부가 마지막에는 한 덩어리가 되어서 계합된다고 하는데
한 덩어리가 뭐냐?
마지막에 돼서 딱 한 덩어리 되가는 것.
한 덩어리가 뭐냐?
딱 눈앞에 보이는 이 현실.
지금 이 순간 모든 사람이
그냥 자기 눈앞에 보이는 이 현실.
다시 말해서 형용사를 다 떼면
한 덩어리라는 거는 무엇이 한 덩어리인가?
현실.
이미 우리가 현실 속에 있는데
문제는 인간마다 현실하고 싸워.
왜냐?
인간마다 자기 잣대가 있어서 이 현실을 재단하는데
현실이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싸워요.
그러니까 인간마다 현실과 싸우는데
얼마나 어리석냐?
현실이 바로 신인데, 인간이 신과 싸우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고통이지.
이게 지금 남 이야기가 아니에요.
현실 전체가 한 개의 법신이면서
아주 다양한 개성을 지닌 화신으로 드러난 거라면
그 기준이 내세울 거는 아니잖아요.
기준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기준이 내세울 건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개체로서의 기준은 있지만
항상 전체의 입장을 같이 생각한다면
자기 기준이
기준이 아니게 되는 것
그게 지혜죠.
그래서 사랑으로 전환하는
지혜와 사랑을
우리가 현실에서.
진짜 이게 실력이에요.
제가 공부를 해 보니까
마지막에는 우리 공부는
“실력 있는 인간이 되자”
저는 그렇게 결론이 나지더라고요.
왜냐하면 개체는 자기가 살아가는 상황이라는 게 있어요.
그런 상황에 닥쳤을 때
개체로서 최선을 다해서
이 길을 찾아 나서서 해법을 하는 것
피하지 말고, 그런 갈등의 세계를 피하지 말고
그 갈등의 세계 한복판에서
최선을 다해서 지혜를 가지고
지혜는 본질의 입장에서
두루두루 서로 간에 윈윈할 수 있는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이런 방법을 찾아내는 것
이게 우리 공부예요.
공부의 이름으로 도망가면 안 돼.
현실을 도피하면 안 돼.
현실이 있는 그대로 불법승
이 삼보가 딱 하나 돼 있는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이 현실을 어떻게 내가 최선을 다해서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가?
이게 지금 우리 공부의 목표이고, 효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력 있는 인간,
이해되세요?
우리가 지금 한국에 태어났으니까
지금 이런 상황이 주어졌는데
지금 우리가 한국이 아닌 어떤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잖아요.
그럴 경우에도 공부한다고 해서 뛰쳐나와서 산에 가는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이 공부를 통해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나도 좋고 남도 좋은 해결책을 찾아내서
실제로 해결해 나가는 것
그게 우리 공부예요.
그러니까 [실력 있는 인간이 되자]
‘실력 있는 인간’은 딱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지혜와 자비
그러니까 지혜와 자비는 어디서 오는가?
이 중도의 이 현실에 개합했을 때.
그때, 보다 높은 차원에서 보는 지혜가 생기고
그리고 전부 다 나의 분신이기 때문에
사랑으로서 품어서 일을 해결해 나가는 그런 일을 모색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 공부가
결론이
흔들리는 게 깃발이냐? 바람이냐? 에서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닌, 나의 분별심이 흔들린다.
‘분별심’은 다른 말로 하면 ‘아상’이에요.
나의 아상이 흔들린다.
그 아상을 돌아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거대한 공간, 거대한 시간, 그리고 이 수많은 삼라만상 인간
이것이 3위가 일체라고 하는 이 사실에
우리가 완전히 계합을 해서
지금 어떤 의미로, 여러분 어떤 의미로.
보세요.
이것을 삼위일체의 이 세계에 내가 계합하는 것을
내가 계합하려고 노력하면 끝이 없어요.
왜 그래요?
노력하는 것 자체가 나누어져 있어서.
이 삼위일체의 완벽한 중도 실상하고
노력하는 내가 떨어져서 노력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노력하는 한
이 분별과 분리감은 극복되지 않아요.
정말로 이런 자리에서 큰 돌이킴이 와서
“내가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이 모든 걸 만들어냈구나.”
그래서 한 번 진짜 멈추는 것
정말 쉰다 쉰다, 쉬어라 쉬어라 하는데
정말로 쉰다는 게 한 번 딱 가슴에 가슴을 쳐서
한 번 딱 쉬면
그 자리가 완벽한 삼위일체의 자리예요.
이게 어떻게 보면
뒤집으면 어렵지 않아요.
그렇지만 어려운 이유는
죽으라고 노력을 하고
죽으라고 뭔가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게 어려운 거야.
한이 없어.
한번 정말 딱 돌이켜서
실제로 있다고 하는 것은 눈앞에 현실밖에 없는데
문제는 이미 현실이잖아요.
나의 지랄발광과 상관없이 이미 현실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를 정말 멈추고 딱 하면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른 길이지.
내가 뭔가를 노력하고 뭘 하는 한은
노력하는 자와 노력하는 대상의 두 분별이 끊어지지 않아서
현상계로 벗어날 수가 없다.
영원히 없다.
노력하는 한, 현상계를 벗어날 수가 영원히 없다.
인두겁을 벗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정말로 이미 완벽하게 되어 있는 현실을
한 번 정말 딱 받아들여서
일시에 그냥 놓아버리는 것.
이 현실밖에 없어요.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거밖에 없어요.
계합한다는 것은
결국 이 현실하고 하나 되는 건데
현실은 이미 현실인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탁 놔버리면 그냥 이것 밖에 없어.
이렇게 지금 탁 오게끔 만드는 어떤 단초로서
오늘 우리 배운 거는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닌
내 마음이 노력하는 그 자체가 흔들리는 거다.
지금 그게 흔들리는 거다.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딱 그냥 스톱,
그냥 일거에 딱 스톱하고 있으면
그냥 이거, 눈앞에 있는 이거
완벽한 진리의 모습인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계합한다는 거지
계합한다고 할 때 대상은 현실이지
그리고 나도 이미 현실의 일부지
이미 나까지 포함한 현실은 이미 완벽해.
그러니까 이 말을 딱 정말 알아차리고
한번 탁 놓아버리는 용기
이게 공부할 때 꼭 필요한 부분이에요.
이게 하루아침에 안 되니까
지금 이렇게도 말하고, 지금 저렇게도 말하고 하는데,
오늘은 지금
흔들리는 것이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우리 마음이, 지금 이 치구심이
어리석게 구하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거다.
놓아버리면
이미 삼위일체가 완벽하게 되어 있다.
좋은 인연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홍근_육조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단경88] 현실이란 무엇인가? 현실 밖에 없다. (0) | 2025.03.19 |
---|---|
[육조단경87] 몸과 마음의 힘을 빼기 (0) | 2025.03.13 |
[육조단경86] 의식인 나를 받아들이자 | 지금, 여기, 의식 (0) | 2025.03.12 |
[육조단경85] 왜 찾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 공개된 비밀 (0) | 2025.03.06 |
[육조단경84] 입장이 바뀔 때, 갈등에서 벗어난다 (0) | 2025.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