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89] 흔들리는 마음을 멈출 때 | 전체의 흐름을 타라

Buddhastudy 2025. 3. 20. 19:48

 

 

선에서는 특히 구마라지 스님이 번역할 때는

마음 ()’자가 떨어져서 생각 ()’에서 생각의 모양인데

생각 자는 생각의 모양인데 그 관념인데

마음 자를 떼고 모양 ()’자만 남겨서

이라고 하는 불교용으로 정착이 되었는데

그러니까 아상, 나라고 하는 그 관념이 생김으로써

이 전체 흐름하고 어긋나기 시작한

어긋난 것이 두카라고 하는 고통이라고 그렇게 부르는 거거든요.

 

정말 전체 흐름을 따라간다? 수능한다?

그러고 사는 것이 최고의 지혜인데

우리들은 라는 것이 있어서

그 나가 자기 기준이 있어서

이 세계가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그 나라고 하는 것이 자기 기준으로

이걸 좋다 나쁘다 하고 재단하면서

탐진치가 벌어져서 고통이 벌어지는

딱 그 원리거든요.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이걸 다시 수습하기 위해서는

라고 하는 그 좁은 관념에서 벗어나서

소위 말하는 인두꺼비라고 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두껍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에서 벗어나서

나의 본래면목이 의식이고

그리고 이 본래면목으로서의 의식은

눈앞에 이 전체로서 드러나고 있어서

내가 개체이지만 동시에 이 전체라고 하는

화신, 보신, 법신이 소화가 되어서

내가 동시에 법신이면서, 보신이면서, 보신은 에너지,

법신이면서, 법 다르마면서

보신, 에너지이면서

또 이 개체라고 하는 것이

동시에 삼위가 일체가 되는 그런 자기를 자각해서

이 흐름에 따라가서 살아가면

문제가 없다, 이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지금 공부를 통해서

매일매일 이것을 익혀나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퀀텀 점프는 양자 점프잖아요.

어떤 완전히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획기적인 도약

그 도약이 현상에서 본질로의 도약이에요.

그게 한 번 일어나야 되고

그다음에는 다시 본질이 현상하고 하나가 돼야 돼.

 

현상에서 본질로 갔다가

거기서 머물 수 없어.

그래서 현상으로 돌아와야 되는데, 중도가 되어야 되는데

그래서 돌아와서 결론은 뭐냐?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우리 공부가 그래서 어쩌라고? 할 때

마지막 결론은

눈앞에 있는 현실밖에 없다.

이게 본질하고 현상이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미 본래부터 그렇다.

 

그거를 우리가 딱 깨달아서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게 지금 우리 공부의

그래서 어쩌라고?”에서의 결론인 거예요.

그래서 어쩌라고?” 할 때는

이 눈에 보이는 이것밖에 없다고, 이게 다라고.

 

여기서 최대한 잘 살아야 된다고.

여기서 최대한 잘 살아야 된다고

그러면 여기의 법칙은 인과의 법칙이라고.

그러니까 본질로서 이 현상을 살아가는데

여기의 법칙은 인과의 법칙.

최대한 이 순간 내가 지혜롭게

인을 잘 지어서 과를 만들어내는 것

그게 결론이다.

 

그러면 인을 잘 짓는다는 건 뭔가?

인을 잘 짓는 거는 뭔가?

지혜와 자비라는 거예요.

 

현상에서 최고로 살아가는 방법은

이 현실에서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은

법신, 보신, 화신이 하나가 되어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은

인을 잘 만들어서 과를 성취하는 건데

그 인은 지혜와 자비라고요.

 

그러니까 정말로 지혜는

본질의 자리에서 현상을 보는 게 지혜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본질 입장에서는

모든 현상이 자기의 자식 같은

자기의 분신이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이것이 우러나온다, 이거죠.

 

인과를 잘 만들어 나가는 게 최고의 지금 모습이에요.

한탄할 필요 없어요.

신세 한탄할 거 없어.

있는 자리에서 인과를 잘 지어 나가는 것.

이게 이 공부의 끝이에요.

 

이 공부의 끝은

너무나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기본인 인과로 다시 돌아 나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현실밖에 없어.

현실 자체가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이 하나 된 모습이에요, 이미.

본래부터 그래.

 

그러니까 여기서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은

인과를 잘 지어 나가는 것.

과거에 인을 지은 결과가 지금이죠.

 

여러분, 지금 이거를 내가 만들었어요?

누가 만들어서 내가 이리 된 거예요?

철저하게 내가 만들었다, 이거예요.

그 과를 딱 받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앞으로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정확하게 인과가 펼쳐진다.

그러면 지금 내가 최선을 다하는 거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지혜와 자비다, 이거야.

 

문수와 보현

이거를 뭐라고 표현하든

딱 우리가 이거를 잘 쓰는 거다, 이거예요.

 

여러분 주관이냐? 객관이냐? 하고 싸우는데

알고 보면

주관도 객관도 모두 현상에 속하고

현상은 인연 따라 나타난 꿈 같은 거예요.

주관도 객관도 현상에 속하는 거예요.

 

따라서 주관인 아무개

이 아무개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서 이 세계를 재단하고 있다.

이 말 이해되세요?

 

그리스에 그런 철학자가 있었어요.

이름이 프로타고라스인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인간은 만물의 자, 척도다.

모든 걸 인간이 자기 입장에서 모든 걸 다 재고 있다.

그리고 이걸 진리라고 생각했어.

 

근데 알고 봤더니

그 모든 것의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자기 자신이 생각일 뿐이라는 것.

객관만 생멸하는 게 아니라

주관도 생멸하기 때문에

이것은 실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죠.

 

다시 말하면

바다에 파도가 칠 때

파도의 거품은 수많은 모양으로 다양하게 일어나지만

그 거품이 실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신에 거품 하나하나가 무엇인가?

전부 물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거품을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거품이 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정말 중요한 거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관이나 객관이나 전부 다 거품 같은 거다.

그러면 거품을 이루고 있는 재료가 무엇인가?

물이잖아요.

그것처럼 주관도 의식이고 객관도 의식이에요.

중요한 것은 주관이냐? 객관이냐?가 아니고

주관도 의식이고 객관도 의식이니까

이 한 개의 의식, 이게 중요한 거다.

그러니까 그 통찰을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굉장히 기뻐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기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회의 그 어느 학문도

전부 현상계를 말하지

이 모든 현상이

본질이 나타난 것이라는 말을 하는 거는 없잖아요.

있어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전 세계 나라를 구해서

공부 중에서는 최고 깊은 공부를

이렇게 지금 우리가 하고 있어요.

 

*!

소리 들어보세요.

현상의 모든 것들은

소리처럼 인연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무상

영원하지 않고

또 소리는 생겼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실체라고 할 수가 없어서 무아죠.

소리만 그런 게 아니고

현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이걸 유위법이라고 해요.

 

유위법이란 말은

인연 따라 생긴 모든 것

유위법_ 인연 따라 생긴 모든 것들은

무상하고, 무아예요.

 

근데 이거를 집착하면 고통이 생기는 거죠.

집착하면 고통이고

집착하지 않으면 열반,

제행무상, 제법무아인데

이것을 모르고 이 유위법을

집착하면 일체개고가 되고

집착하지 않으면 열반적정이 되는 것

그러니까 열반적정이 부동심이다, 이거예요.

 

지금 우리 공부는

부동심으로 현상을 살아가기

이게 지금 공부의 지금 목적이에요.

 

/그래서 본질에서 보면

주관이든 객관이든 실체가 없이 찰나 생멸하는 것이어서

진리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본질의 입장에서는

주관이든 객관이든 모두 객관 현상일 뿐이다./

 

여러분 주관이 알고 봤더니 객관인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알고 봤더니 유령이었어.

 

내가 실체에 있는 모든 존재인 줄 알았더니

알고 봤더니

나도 인연 따라 생겼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그러면 진짜 나는 무엇인가?

지금 현실 전체로서 있는

개체가 아니라 전체로서 있는 이 생명 자체.

혹은 의식 자체.

이게 참나다 이거예요.

 

나가 개체의 나에서, 이건 화신이고

이 에너지 자체가 보신이고

그리고 이 공간 자체가 법신으로

이게 나의 확장이에요.

 

우리 공부는 결국은

나의 확장, 화신에서 보신으로, 법신으로

내가 확장되는 그런 공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법신의 입장에서 보면

나도 현상일 뿐이죠.

법신의 입장에서 보면

진짜 주체는 법신, 자기고

모든 현상은 객체예요.

 

손님이야, 손님.

왔다 가는 손님이야.

그 손님 중에 김 아무개도 들어 있다, 이거예요.

 

그럼 진짜 주인은

이 불생불멸이면서도 모든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 전체.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 전체가

동시에 법신, 보신, 화신이라고 하는 이 사실

삼위일체가 딱 되어서

이것이 계합이에요, 계합.

 

이 현실에서 내 마음이 떠나지 않는 것

내 마음이 현실에 딱 뿌리내리고 있는 것

이게 부동심이에요.

그럼 현실은 본질과 현상으로 되어 있어서

본질의 입장에서는 하되 하는 바가 없고

근데 현상 입장에서는 하는 바가 없는데 또 하고 있고

이게 소화가 된다.

삼위일체로서 따로따로 놀지 않고.

그러니까 삼위일체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어서 신비라고 하잖아요, 신비.

 

제가 공부했던

한참 제가 강의 오랫동안 들었던 김호근 목사님

김호근 목사님한테

제가 한번 물어본 적이 있거든요.

선생님, 철학은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봤어.

 

김호근 선생님이 뭐라고 답변하셨냐 하면

내 철학은 하나, , 셋이지

하나, ,

성부, 성령, 성자 이것이 하나인 것

그게 내 철학이지그러시더라고.

 

항상 이야기를 하실 때

이 세 가지를 딱 말씀하시고

이것이 하나다

항상 그렇게 그 논조를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당신의 모든 공부는

하나, ,

근데 그 하나, , 셋이

태극기의 원 안에 있다, 그러셨어요.

그러니까 이분도 참 재미있는 분이에요.

기독교회 목사님인데

또 불교와 주역, 또 논어, 맹자 같은

이런 것도 아주 열심히 즐겨 공부하였어요.

 

그런데 결국은 들어보면

기독교나 불교나 특히 깨달음의 세계를 다루는 선불교나

결국에는 이 삼위일체라고 하는 신비

이 안에서 모든 것이 회통된다.

 

여러분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그냥 나온 거 아니에요?

정말로 치열한 논쟁이 있었어요.

삼위일체가 진리냐? 아니냐?

이거를 가지고 정말로 목숨 걸고 싸웠던 시대가 있어요.

그런 걸 통해서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진리다라고

딱 못을 박은 그런 신학 논쟁들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은, 경험적으로.

 

딱 결론이 뭐냐 하면 경험적으로

여러분 보세요.

경험적으로 일종의 우리가 이 깨달음의 경험인데

경험적으로 눈앞에 이거 전체가

한 개 의식이면서

한 개 에너지이면서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삼라만상이에요.

 

지금 경험적으로

지금 정법안장_ 바른 법은 눈에 있다.

이것이 경험적으로

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눈의 자리에 지금 들어와 있는 이 세계

이 세계가 동시에 법신이면서, 보신이면서, 화신인 거예요.

이게 동시이기 때문에 논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

그래서 신비라고 할 수밖에 없어.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이것이 확실해.

 

지금 따라오십니까?

경험적으로는 확실해.

근데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돼.

 

동시에 법신이면서 보신이면서 화신이다.

동시에 성부면서 성령이면서 성자라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돼.

근데 경험적으로는 그래.

 

그러니까 이것이 딱 이렇게 하나가 되어서

오늘은 두 가지 중요한 일을 이야기했어요.

 

첫 번째는 결국 우리 공부가 마지막에는 한 덩어리가 되어서 계합된다고 하는데

한 덩어리가 뭐냐?

마지막에 돼서 딱 한 덩어리 되가는 것.

한 덩어리가 뭐냐?

딱 눈앞에 보이는 이 현실.

지금 이 순간 모든 사람이

그냥 자기 눈앞에 보이는 이 현실.

 

다시 말해서 형용사를 다 떼면

한 덩어리라는 거는 무엇이 한 덩어리인가?

현실.

 

이미 우리가 현실 속에 있는데

문제는 인간마다 현실하고 싸워.

왜냐?

인간마다 자기 잣대가 있어서 이 현실을 재단하는데

현실이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싸워요.

 

그러니까 인간마다 현실과 싸우는데

얼마나 어리석냐?

현실이 바로 신인데, 인간이 신과 싸우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고통이지.

 

이게 지금 남 이야기가 아니에요.

현실 전체가 한 개의 법신이면서

아주 다양한 개성을 지닌 화신으로 드러난 거라면

그 기준이 내세울 거는 아니잖아요.

기준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기준이 내세울 건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개체로서의 기준은 있지만

항상 전체의 입장을 같이 생각한다면

자기 기준이

기준이 아니게 되는 것

그게 지혜죠.

 

그래서 사랑으로 전환하는

지혜와 사랑을

우리가 현실에서.

 

진짜 이게 실력이에요.

제가 공부를 해 보니까

마지막에는 우리 공부는

실력 있는 인간이 되자

저는 그렇게 결론이 나지더라고요.

 

왜냐하면 개체는 자기가 살아가는 상황이라는 게 있어요.

그런 상황에 닥쳤을 때

개체로서 최선을 다해서

이 길을 찾아 나서서 해법을 하는 것

피하지 말고, 그런 갈등의 세계를 피하지 말고

그 갈등의 세계 한복판에서

최선을 다해서 지혜를 가지고

지혜는 본질의 입장에서

두루두루 서로 간에 윈윈할 수 있는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이런 방법을 찾아내는 것

이게 우리 공부예요.

 

공부의 이름으로 도망가면 안 돼.

현실을 도피하면 안 돼.

현실이 있는 그대로 불법승

이 삼보가 딱 하나 돼 있는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이 현실을 어떻게 내가 최선을 다해서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가?

이게 지금 우리 공부의 목표이고, 효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력 있는 인간,

이해되세요?

 

우리가 지금 한국에 태어났으니까

지금 이런 상황이 주어졌는데

지금 우리가 한국이 아닌 어떤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잖아요.

그럴 경우에도 공부한다고 해서 뛰쳐나와서 산에 가는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이 공부를 통해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나도 좋고 남도 좋은 해결책을 찾아내서

실제로 해결해 나가는 것

그게 우리 공부예요.

 

그러니까 [실력 있는 인간이 되자]

실력 있는 인간은 딱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지혜와 자비

 

그러니까 지혜와 자비는 어디서 오는가?

이 중도의 이 현실에 개합했을 때.

그때, 보다 높은 차원에서 보는 지혜가 생기고

그리고 전부 다 나의 분신이기 때문에

사랑으로서 품어서 일을 해결해 나가는 그런 일을 모색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 공부가

결론이

흔들리는 게 깃발이냐? 바람이냐? 에서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닌, 나의 분별심이 흔들린다.

분별심은 다른 말로 하면 아상이에요.

나의 아상이 흔들린다.

 

그 아상을 돌아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거대한 공간, 거대한 시간, 그리고 이 수많은 삼라만상 인간

이것이 3위가 일체라고 하는 이 사실에

우리가 완전히 계합을 해서

지금 어떤 의미로, 여러분 어떤 의미로.

 

보세요.

이것을 삼위일체의 이 세계에 내가 계합하는 것을

내가 계합하려고 노력하면 끝이 없어요.

왜 그래요?

 

노력하는 것 자체가 나누어져 있어서.

이 삼위일체의 완벽한 중도 실상하고

노력하는 내가 떨어져서 노력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노력하는 한

이 분별과 분리감은 극복되지 않아요.

 

정말로 이런 자리에서 큰 돌이킴이 와서

내가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이 모든 걸 만들어냈구나.”

그래서 한 번 진짜 멈추는 것

정말 쉰다 쉰다, 쉬어라 쉬어라 하는데

정말로 쉰다는 게 한 번 딱 가슴에 가슴을 쳐서

한 번 딱 쉬면

그 자리가 완벽한 삼위일체의 자리예요.

 

이게 어떻게 보면

뒤집으면 어렵지 않아요.

그렇지만 어려운 이유는

죽으라고 노력을 하고

죽으라고 뭔가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게 어려운 거야.

한이 없어.

 

한번 정말 딱 돌이켜서

실제로 있다고 하는 것은 눈앞에 현실밖에 없는데

문제는 이미 현실이잖아요.

나의 지랄발광과 상관없이 이미 현실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를 정말 멈추고 딱 하면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른 길이지.

내가 뭔가를 노력하고 뭘 하는 한은

노력하는 자와 노력하는 대상의 두 분별이 끊어지지 않아서

현상계로 벗어날 수가 없다.

영원히 없다.

노력하는 한, 현상계를 벗어날 수가 영원히 없다.

인두겁을 벗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정말로 이미 완벽하게 되어 있는 현실을

한 번 정말 딱 받아들여서

일시에 그냥 놓아버리는 것.

 

이 현실밖에 없어요.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거밖에 없어요.

 

계합한다는 것은

결국 이 현실하고 하나 되는 건데

현실은 이미 현실인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탁 놔버리면 그냥 이것 밖에 없어.

 

이렇게 지금 탁 오게끔 만드는 어떤 단초로서

오늘 우리 배운 거는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닌

내 마음이 노력하는 그 자체가 흔들리는 거다.

지금 그게 흔들리는 거다.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딱 그냥 스톱,

그냥 일거에 딱 스톱하고 있으면

그냥 이거, 눈앞에 있는 이거

완벽한 진리의 모습인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계합한다는 거지

계합한다고 할 때 대상은 현실이지

그리고 나도 이미 현실의 일부지

이미 나까지 포함한 현실은 이미 완벽해.

 

그러니까 이 말을 딱 정말 알아차리고

한번 탁 놓아버리는 용기

이게 공부할 때 꼭 필요한 부분이에요.

 

이게 하루아침에 안 되니까

지금 이렇게도 말하고, 지금 저렇게도 말하고 하는데,

오늘은 지금

흔들리는 것이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우리 마음이, 지금 이 치구심이

어리석게 구하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거다.

놓아버리면

이미 삼위일체가 완벽하게 되어 있다.

 

좋은 인연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