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90] 나를 확장시키는 공부

Buddhastudy 2025. 3. 26. 19:06

 

 

아주 간단명료하게

지금 깨어 있는 이 의식이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

-이 의식이 보고 있고

-이 의식이 듣고 있고

-의식이 느끼고 있고

-그리고 이 의식이 지금 다 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의식인데

의식을 한번

, 이것이 의식이구나하고 스스로 한번 지각은 해야 돼요.

의식이 스스로를

의식이구나하고 지각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공부상에서

한 번 그런 점은 딱 찍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 점을 어떻게 찍는가? 할 때

가장 간단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깨어 있는 느낌이 있다, 이거예요.

살아있는 느낌

모든 인간이라면

지금 이렇게 있다고 하는, 존재하고 있다는, 살아있다는 느낌

그거다 이거예요.

그냥 간단하게.

 

그러면 그것이

의식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거다.

 

그렇게 한 번 확인하고 나면

모든 것을 의식이 하고 있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거.

 

여러분 의식이 바뀝니까?

지금 이 의식은 희한하게 안 바뀌어요.

지금도 이대로죠?

지금도 이렇게 말짱하게 깨어 있잖아요.

 

의식이 스스로를 의식하면

이렇게 말짱하게 지금도 깨어 있어서

이거는 변한 적이 없다.

그리고 수없이 말하는 의식은

크기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고, 뭐라고 한정 지을 수도 없고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의식은 그런데 중요한 말이

포함한다, 삼라만상을 의식은 포함한다.

의식이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한번 발견하고

내가 의식이네하고 발견하고

그리고 의식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살아가는 것

이게 진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수행이라는 것은

의식을 발견하기 전에는

그거는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고

그거는 더듬더듬 더듬는 거고

의식을 발견하고 난 이후에

아무개로서 살아왔던 그 입장에서

의식의 입장으로 옮겨가서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이제 수행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보이는 것은 현상이고

보는 것이 본질이다./

이거 하나만 우리가 딱 새겨 들으면

이 말 한마디만 우리가 정말로 딱 이렇게 가슴에 새겨 들으면

많은 것이 변합니다.

 

보이는 것은 현상이고

보는 것이 본질이다.

 

그럼 나는, 현상에 나는 변화하니까

진짜라고 할 수가 없고, 임시의 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나는

지금 이 순간 보는 이것.

회광반조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거죠.

 

이렇게 보면서

보는 이것을 자각하는 것

회광_ 의식을 돌려서

반조_ 거꾸로 비춘다.

그러면 참, 뜻밖에도 이렇게 멀쩡하게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있다, 있다라는 말이

참 진리를 나타낸다.

 

당신 누구요?”

나는 있는 것이다”.

“I am that I am”이라는 성경에 그런 말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있다, 이거예요

있다는 느낌.

 

공부의 핵심은

이렇게 지금 있다고 하는 이 느낌을

한번 탁 확실하게 딱 점을 찍는다고 보통 표현하죠.

, 이거구나

있다고 하는 이 느낌이구나이거예요.

있다고 하는 이 느낌이구나.”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있어요? 없어요?

 

그리고 흔히 제가 말 자주 드리는 문장이

정신 나갔어요? 있어요?” 하잖아요.

정신 나갔어요? 정신이 있어요?”

있죠.

지금 이렇게 정신이 있다고 하는 이 느낌

정신이 나가지 않고 이렇게 있다고 하는 느낌.

 

정신 나갔다, 이 말은

어딘가 생각에 끌려가서

앞에서 뭘 해도 못 보는 상태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느라고.

정신 나가는 거다, 이거죠.

 

근데 그렇지 않고

이 순간에 여기에 이렇게 멀쩡하게 깨어 있는 이것이

정신이 있다는 거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고 하는 이 느낌이

내가 지금 여기에 여기 있다.

그 느낌이 우리 공부에 항상 핵심 포인트다.

 

말하자면 일종의 기본형이다, 기본 폼이다.

그래서 이 기본 폼을 발견하고 난 뒤에는

수시로 있다고 하는 느낌이

계속 반복해서 내가 느끼는 것

이 폼을 몸에 완전히 익히는 것, 체득하는 것.

내가 지금 이렇게 있다고 하는 느낌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내가 있다고 하는 걸 느껴야

생각에 딸려가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있다고 하는 느낌을 느낄 줄 알아야

생각이 달려가잖아요.

 

생각이 딸려가면 고통이에요.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에서 벗어나면 되는데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의식이 깨어 있으면 돼요.

의식이 깨어 있으면 생각이 못 붙어요.

마치 이글거리는 불에 이 파리가 앉지 못하는 거와 같아서.

 

그러면 인간이 이렇게 현재에 깨어 있다는 이 말

그게 바로 의식의 발견을 통해서

의식이 자각한다, 각성한다.

 

이게 지금 가장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본 폼이다, 이거예요.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인간

지금 이 순간 깨어 있기.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기본 폼

인간이 이 모드에 있을 때는

고통이 발생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가장 핵심이다, 이거예요.

 

그럼, 그것은 어떤 상태인가?

흔히 말하는,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두 가지 면이 일어나요.

 

첫 번째는 깨어 있는 힘 때문에 생각이 고요해져요.

이거를 되게 공적이라고 부르죠.

근데 생각이 사라졌는데 멍하니 있으면

멍하니 약간 조는 듯이

생각은 사라졌지만 멍하니 있으면

그것은 무기공이라고 해서

일종의 의식이 깨어 있지 못하고

생각만 사라졌지

의식은 무의식 속에 침잠되어 있는

깨어 있지 못한 그런 상태예요.

 

그러니까 지금 기본 폼은

우리가 앉을 때 결국 뭘 하는가?

정확하게 깨어 있으면

생각은 가라앉아서 [공적]하고

그리고 의식은 또렷하게 깨어서 [영지] 하고

그러니까 요 [공적영지]라고 하는 이게

지금 모든 것의 기본 폼이에요.

그리고 이것을 사실상 [진정한 화두]라고 부르는 거죠.

 

공정영지라고 하는 그 기본 폼을

우리가 익혀 나가면 [선정력]이 길러져요, 선정력.

줄여서 정력

 

그러니까 정력을 기르는 게

지금 우리가 증진하는 목적이에요.

정력이 길러지면 길러질수록

현상의 나는 약해지고

본질의 나가 더 또렷하게 힘이 붙어 간다.

 

그래서 나는 본질인 의식이라고 하는 느낌이

이게 고요한 정력을 기르면 기를수록

나는 핵심 코드가 뭐냐 하면

공적영지 상태가 되면 핵심 코드가 뭐냐 하면

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어요.

나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간간이 들리는 소리나

또 눈을 가늘하게 뜨고 있거나 하면

모든 현상은 변해간다는 것.

 

그러니까 정력이 길러지면 길러질수록

나는 변하지 않는, 한정 지을 수 없는, 변하지 않는,

깨어 있는 자각이고

이 자각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보니까

이 세계는 정말로 찰나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는

그래서 실체가 있다고 할 수가 없는.

 

따라서 그 정력이 길러지는 가운데

공적영지의 말로 하자면

공적영지의 주체가 스스로 자각이 되면 될수록

나는 안 변하고 늘 똑같은 상태고.

 

그리고 이 보여지는 모든 것들은

이렇게 흐르고 있고, 생멸하고 있고

또 지나가서 어디 있는 게 아니라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눈에 보이긴 보이지만

실제로 이것이 있다고 하는 할 수가 없다는 게

스스로 자각이 되는 거죠.

가면 갈수록 분명해져요.

 

그러면 그다음에 어떤 또 느낌이 일어나느냐 하면

멀쩡하게 나는 이렇게 깨어서

변하지 않은 상태로 이렇게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지고 있어서

이걸 실재라고 할 수 없고

진짜 실재는 난데

근데 그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이 몸이라고 하는 김 아무개는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정력이 길러지면 길러질수록

스스로 이걸

나는 의식이라고 하는 자각을, 그런 생각을, 안 일으켜도

일종의 이 몸으로부터는 벗어나서

일종의 내가 굉장히 어떤 거대한 존재

기존에 알고 있던 이 몸속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지는데

이 모든 것을 내가 품고 있고

어떤 거대하고 또 신성한 존재, 스스로가.

그런 자각이 이렇게 일어난다 이거예요.

 

그렇게 되면 놀라운 게

이 깨어 있는 의식으로서의 나는

시간 공간에도 내가 제약되지 않는구나

 

시간 공간에도 내가 제약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한 발 더 나가면

생사에도 내가 제약되지 않는다는 것이

스스로 이렇게 분명하게 자각이 돼요.

 

그렇게 되면 살기는 사는데

모든 것이 나의 품속에 다 들어오고

그리고 내 품속에 들어오는 삼라만상은

그냥 인연 따라 이렇게 생겼다가 사라지면서

그리고 이것들도 이 품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이거 하나라는 것.

 

이것 속에서 잠시 일어나고 있는 이미지 같은 것이라서

실체가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인데.

근데 이 모든 것이

육조단경에 처음에, 육조 스님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의식이 이 모든 것을 능생_ 일으키게 한다는 것을

이것을 낳는다, 생기게 한다.

 

의식이 의식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일으켰다가 또 회수했다가

내보냈다가 회수하는

그래서 이것이 이미지 같이

찰나 간에 생존하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

갈수록 분명해진다.

 

그래서 이 현상으로 나타나는 삼라만상에

내가 집착하는 그 집착이 떨어져 나가는

그래서 모든 걸 포함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로부터 물들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자각이 갈수록 이게 분명해진다 이거죠.

 

그전에는 아무개라고 하는 개인으로 살다가

정력이 길러지면 길러질수록

의식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어 가서

의식으로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은현동시

결국에는 우리 공부가 깊어지면

이 평정심, 부동심, 공적영지의 정체성이 확립되면서

이거는 정력을 길러야만 이렇게 확립이 돼요.

 

그러면 이 정체성이 확립되면서

결국은 이 세상이 한 덩어리인데

이 한 덩어리가 동시에

하나는 바탕이면서 또 하나는 이렇게 드러난 이렇게 현상으로

본질과 현상이 완벽하게 지금 이 순간에 같이

한 개의 의식이

동시에 본질이면서 현상으로

이렇게 눈앞에 딱 펼쳐져 있는 이게 지금 실상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 이게 의식이구나하는 걸 발견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고

발견하면 기본 폼을 얻는 거고

그다음에는 끊임없이 이 폼을 익혀서

완전히 몸에 체득되어서

그것이 나의 기본 모드라는 게 있죠.

 

a 모드, b 모드 있잖아요.

지금은 분별심에 휘둘리는 모드예요.

근데 그게 아니라 부동심을 얻어서

그 부동심이 나의 기본 모드가 되어서

이 세계를 살아가.

그게 지금 우리가 하는 공부의 모습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서

그 법신이라고 말하는 본질로서의 나는

어떤 의미로는 이것이 그대로 =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나는 누구인가?’에서

가장 근사한 가까운, 가장 근사치에 접근하는 그 모습은

이 공간 자체예요.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공간 자체예요.

그래서 아까 제가 선정에서

선정에서 느껴지는 이 나의 정체성은

이 개체가 아니라

이렇게 깨어 있는

그러면서도 굉장히 자이언트인

이 크기를 한정할 수가 없을 정도로

자이언트로서 깨어 있는 이것이

나의 본래 모습,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그것이

착각되면 될수록

어떤 느낌이 더 또 일어나느냐 하면

공간이, 지금 이 공간에 대한 인식,

혹시 따라오십니까?

 

공간에 대한 인식,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 대한 인식

그럼 끝이 없잖아요.

지금 우리가 이 공간을 인식하면 끝이 없잖아요.

그게 나다, 이거예요.

이 끝이 없는 공간,

끝이 없이 퍼져나가는 확 열려서

끝이 없이 퍼져나가는 그 공간에 대한 지각

그게 나다 이거예요.

 

그래서 돌아보면

왜 그렇게 공부 과정에 답답할 때는

산꼭대기 가서 앉아 있으려고

산 중턱 바위에 올라가서 앉아 있으려고 왜 그렇게 했었나 하면

그게 나기 때문에.

거가 가면 저절로 내가 된다는 느낌

그래서 시원해지는.

 

이 공간에서 갇혀 있을 때는 답답한데

툭트인 곳에서 완전히 열려 있을 때는

너무너무 시원하고

내가 비로소 나가 되었다고 하는 그 느낌이 강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 살아가시면서

농부가 익어가려면

앉아서 선정력을 기르는 거와 동시에

일상에서는 공간을 자꾸 느껴봐야 돼요, 공간.

공간을 느끼는 그 순간 확 넓어지잖아요.

 

우리가 공간을 느끼는 그 순간 확

더군다나 이런 실내에서가 아니라

옥상에 나가서 한번

하늘 보고서 공간을 느껴보면 확 열리잖아요.

그게 나다 ,이거예요.

공간 자체가 나다.

 

그리고 그 공간이 희한하게도 움직여

그 공간이 움직이는 게 시간이에요.

시간이 또 이렇게 흐르고 있어

그러니까 참 신기한 거예요.

 

공간을 지각하고, 시간을 지각하고

그리고 인간으로서 시간 공간이 하나가 만나서

시간 공간 자체를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없는데

그걸 인식해 주는 의식으로서의 공간

의식으로서의 인간

그러니까 내가 동시에 공간이면서, 시간이면서, 인간인 이것이 하나가 되는

이게 지금 삼위일체의 신비고

천지인 삼재라고 하는

동양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천지인 삼재

이때 는 보물이라는 뜻이에요.

세 가지 보물

천지인.

공간, 시간, 인간

이 세 가지 보물이 지금 내한테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

이것이 세 개지만, 또 하나라는 것

 

이게 지금 본질과 현상, 삼위일체

이런 모든 것들이

실제로 지금 나의 깨어 있는 자각 속에서

이것이 전부 다 인식되기 때문에

우리 공부는 끝없이 앉아서 할 일 없으시면

공간을 인식해 보고

시간을 인식해 보고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지금

 

그 넓은 것 중에서 하필이면 여기잖아요.

육체가 있는 이 자리

이게 지금 살아 있는 의식을 또

자기를 인식해 보면

공간을 인식하고, 시간을 인식하고, 인간을 인식하는

이것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는 더욱 더 넓어지고

그리고 뭐라 그럴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애정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는 그런 힘이

가면 갈수록 생기는 거죠.

지혜로우면서도 자비로운 거죠.

 

그래서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하나의 질문

그 하나의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거.

 

 

, 첫 시간 마치면서요.

제가 오늘 두 가지 질문을 던졌거든요.

 

첫 번째는 인간은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

이거의 답변이 해탈이에요, 해탈.

해탈을 일반 인문학에서는 [마음치유]라고 해.

 

인간은 어떻게 하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벗어날 수 있는가?

해탈을 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결국 나는 무엇인가?”

이거는 깨달아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깨달음][마음치유]

다른 말로 하면 [깨달음][해탈]

이게 지금 우리의 영원한 두 가지 질문이에요.

 

그래서 이 두 가지 질문을 계속 가지고 살아가기.

그래서 때가 되면

질문이 사라질 때가 온다 이거예요.

때가 되면, 인간이 성숙해지면, 질문이 사라질 때가 온다.

 

더 이상 적어도 나한테는

고통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것이

이제 문제가 안 되는 때가 온다.

그러면 정말로 남을 도와줄 수가 있죠.

자기한테서 정말 확신이 오면

남을 도와주는 힘이 그때부터는 정말 강력하게 생기죠.

 

그리고 두 번째는 나는 무엇인가에서

지금 깨어 있는 이것

지금 깨어 있는 이것이

동시에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인데

이것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것.

 

지금 나는 무엇인가?

깨어 있는 의식인데

이 의식은 동시에 공간이면서, 시간이면서, 인간이라는 거죠.

이것이 나한테서 더 이상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의문을 일으키지 않는 것

 

그게 지금 우리 공부가 깊어지는 그런 모습이에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