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09)

즉문즉설_법륜스님(제63회) 장애시설과 기독교

Buddhastudy 2011. 1. 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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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없을 때는 인생살이가 괴로운데, 신앙이 있으므로 해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죠. 수행 안 할 때는 인생살이가 괴로웠는데. 그 괴로움에서 벗어 나기 위해서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사람이 이렇게 저한테 질문을 해요./ 스님요./?/ 저는 요즘 수행이 안돼서 괴로워서 죽겠어요./ 이래. 그래서 제가 /? 그게 무슨 소리요?/ 제가 요즘 요. 참선을 하는데 화두가 안 들려요.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안 들려서 그냥 죽겠어요. 괴로워서./ 참회를 하려는데 참회가 안 되요./ 뭐 이런 사람도 있고.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면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해서 인생살이가 힘들다 말이오.

 

그런데. 네가 누구냐 하는 질문을 떡 받았어. 내가 누군가? 모르겠어. 내가 누구지? 법륜이요. 그건 너 이름이잖아. 네가 누구니? 이렇게 곰곰이 들어가 보니까. 그런 나라는 게 이게 뭐지? 그럼 나도 모르는 게 내가 뭐 하고 있는 짓이야? 지금. 나도 모르는 게 내 아내, 내 가족, 내 나라, 따지고 있지 않냐? 이렇게 딱 되면. 지금까지 있던 고민이 딱 없어져 버린다 이 말이오. 뭐에 몰두해서? 내가 누군가. 이 과제에 다른 괴로움이 싹 없어져 버린다 이 말이오. 이걸 내려 놓으면 어때요? 이게 탁 놓여지면 다른 망상이 들어오겠죠.

 

그러니까 화두가 나의 번뇌를 없애준다. 이 말이요. 그게 화두란 말이오. 그런데 화두가 안 들려서 괴롭습니다. 이말 할 때는 이미 이 화두는 형식화 된 거다. 수행이 안돼서 괴롭습니다 할 때. 그 수행은 이미 마음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앉으려고 하는데 잘 안 앉아 진다든지, 다리가 아프다든지, 절하려는데 절이 잘 안 된다든지, 이런걸 갖고 수행으로 삼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다 이 말이오. 제가 말하는 거 이해하셨어요?

 

그러니까 자식 때문에 괴롭습니다 할 때 수행을 하면 그 자식이 그런데도 괴롭지 않는 경지로 가는 게 수행이다 이 말이오. 그 수행방법에는 아까처럼 염불도 있고, 선도 있고, 간경도 있고, 주력도 있고, 관법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이 말이오. 이런 나의 믿음. 이것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좋다. 출세보다도 좋고. 돈 보다도 더 소중하고. 그럴 때 나는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나의 이 수행, 또는 나의 이 법, 이걸 내가 지킨다. 이게 신앙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오빠가 장애가 있는데. 어떤 장애가 있어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면 남이라도 내가 돌봐야 됩니까? 안 돌봐야 됩니까? 돌봐야지. 신앙이 없는 사람, 수행을 안 하는 사람은 그거 뭣 때문에 내가 돌보냐? 이렇게 되는데. 신앙이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내 형제가 아니고, 내 자식이 아니고, 내 부모가 아니고, 내 이웃이 아니라도 어때요? 돌보는 게 그게 수행이에요. 그게 신앙이고. 여러분들은 대부분 신앙인이 아니에요. ? 내가 난 자식도 지체부자유아 거나하면 돌보기 힘들어하죠. 그래서 남한테 맡겨요. 안그러면 버리거나. 그러니까 이게 지극한 이기심이죠. 자식한테도 자기한테 도움이 안되고 귀찮다 이거야.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자식을 낳았나?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자식을 낳았나 할 때는 이 자식은 재앙이죠. 그러니까 재앙을 내가 받았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괴로울 수 밖에 없는거요. 그런데 결혼도 안 한 스님들이나 신부님, 수녀님들이 자기자식도 아니고 남이 버린 그런 지체부자유아나 장애아들을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 모아놓고 돌보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들은 그 것을 돌보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걸 재앙이라고 생각해요? 복이라고 생각해요? 복이라고 생각해요.

 

기독교 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아무런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듯이 나 또한 이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푼다. 내가 이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 때 하나님도 나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서 나도 천국에 갈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자기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거야. 우린 그런 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걸 재앙이라고 본다 이 거요. 우리 불교적으로 말하면 관세음보살님은 이 세상의 중생들의 모든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서 돌보는 일을 하지 않습니까? 그죠? 그래서 우리가 관세음보살기도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관세음보살님처럼 그런 마음을 내게 되면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 진다 이거야. 불교를 안 믿는 사람은 제 자식도 외면하지마는.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보살마음을 내기 때문에 남이 버린 자식도 자기가 돌보는 마음을 내는 게 이게 신앙이다 이거요. 첫째 신앙이면 남도 아니고 내 형제인데 내가 돌봐야지. 얘기할 필요가 없죠. 벌써 이걸 팽개치잖아. 어디 보내겠다 이거 자체가 신앙이 아니란 말이오. 신앙이 아니면서 교회를 가서 돌보든 누가 돌보든 돌보면 됐지. 신앙이 없는 주제에 또 교회 가는 건 싫다. 그게 무슨 신앙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전혀 안 되는 얘기요. 그러니까 그것이 불교에서 보살피는 곳이든, 교회에서 보살피는 곳이든, 보살필 수 있는 곳이면 고맙게 생각하고 맡기고. 그때 내가 참회를 해야 되요. 죄송합니다. 나는 내 형제도 못 돌보는데, 당신들은 남이라도 돌보니, 당신들은 위대합니다. 이런 마음을 내야 되. 고맙게 생각하고. 그래서 나도 형제로서 내가 직접 돌보지는 못하지만은 내가 벌은 돈 중의 일부라도 보시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그런데 가서 보니 야~ 기독교 신자들은 저렇게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데. 나는 불교신자라고 하면서 어때요? 그런 일도 하나 못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안되겠다. 저 사람은 남의 자식도 돌보는데. 나는 내 자식이나 내 형제도 돌보지 않으니 내가 무슨 불자냐? 내가 정말 불자라면 내 형제는 내가 돌봐야지. 내 자식이라도 내가 돌봐야지. 딱 갔다가 돌아와서 해야지. 그게 뭐 기독교 시설이다, 아니다. 뭐 이런걸 따져서 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래서 내가 내 신앙을 회복해야 된다. 그렇게 사물을 봐야 된다.

 

그런데 겨우 한다는 얘기가 교회는 저런 시설도 많은데 우리 불교는 시설도 하나 없고 뭐 이래? 에이 모르겠다. 나도 교회 다녀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수행이라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할거냐를 생각해야지. 자꾸 책임을 자꾸 스님들은 뭐하느냐? 절에서는 뭐하느냐? 불교는 뭐하느냐? 그럼 딴 사람이 너는 뭐하느냐 물으면 뭐라 그럴래? 그렇게 공부라는 것은 늘 자기를 돌이켜야 된다.

 

그래서 그런 시설이 부족하다 싶으면 자기가 앞장서서 하든지. 주위사람과 의논해서 하든지. 내 자식을 돌보는데 어차피 돌볼 바에야, 내 자식 돌볼게 뭐 있나? 딴 사람 돌볼 바에야 서너 명 모아서 같이 돌보겠다. 이렇게 마음을 내는 게 뭐에요? 불자가 가야 할 길이다. 그렇게 해서 몇 명, 몇 명, 늘어나면 돌보는 시설이 되는 거란 말이오. 그래서 저는 수행적 관점에서 얘기하는 거요. 어떻게 불자가 마음을 다스려야 되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