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자는 후자부터 먼저 얘기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그래요. 예를 든다면 누구 하나 멋있게 죽어가 국민들의 추앙을 받으면 멋있게 죽고 싶어요. 안 죽고 싶어요. 또 누가 굉장히 멋있게 결혼하는 그런 뉴스 보면 어때요? 결혼 한번 멋있게 해 보고 싶고. 또 훌륭한 스님, 성철스님 얘기 들으면 또 스님 한번 되어 볼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뭐 해외 오지에 가서 봉사하는 그런 거 보면 어때요? 야. 저것도 괜찮겠다 싶으고. 그 사람 이거 보면 이거 하고 싶고, 저거 보면 저거 하고 싶고. 그런 게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나이가 20대 초반이요? 중반이요? 20대 중반 정도 되는 데서는, 그 정도의 이거 보면 이거 하고 싶고, 저거 보면 저거 하고 싶고. 그런 건 당연하다. 그리고 또 이걸 하고 있는데 이걸 정말 내가 좋아하는 건지. 그건 몰라. 정말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 정말이라는 말은 쉽지가 않아. 인간의 감정은 어떻게 하기 때문에? 늘 변하기 때문에 정말 이라는 용어는 붙일 수가 없어. 너 정말 날 좋아해? 이렇게 말할 때 이 순간 좋아하느냐? 그러면 예 할 수 있어.
그런데 영원토록 좋아하느냐?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은 영원토록 좋아할 거 같아. 내일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상대편 말 한마디에 금방 생각이 바뀔 수도 있어. 이게 마음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란 늘 찰라 찰라 바뀌는 게 마음이기 때문에, 이 내 감정이 진실하냐? 이런 말 자체가 성립 안 해. 지금의 감정이 그렇다. 지금 내가 이걸 좋아하고 있다. 내일도 좋아할 건진 아무도 몰라.
으음. 좋아하는 일이라도 그것이 손해가 오는 일이 있어. 좋아는 하는데 손해가 오는 일이 있다고. 저 처녀 다리 한번 만져보고 싶다. 이건 좋아하는데 만지면 나한테 손해가 온다는 거야. 그럼 안 해야지. 그러니까 좋아하지만, 그것이 손해가 올 때는 안 해야 되고, 싫어하지만 그게 이익이 될 때는 해야 된다는 거요. 지금 우리가 명상을 한다. 수행을 한다. 이런 건 사실 썩~ 하고 싶은 일이 아니야. 그렇지마는 그건 자신의 까르마의 감정에 휘둘리는 자기를 제어하기 위해서 이건 해야 된단 말이오.
엄마가 심부름 보내는 거 하기 싫지만, 갔다 오는 게 나중에 보면 좋아. 지금 내가 장난감 가지고 노는 것은 좋지만, 엄마가 심부름 가라 할 때 그건 싫지만, 이럴 때 지금은 이게 좋고 저게 싫지만, 시간이 한 참 지나서 어머니 돌아가신 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때요? 이걸 하고 심부름을 안 했을 때는 후회가 되고, 오히려 이걸 그만두고 심부름 갔다 왔을 때는 보람이 되는 거요. 그래서 지금 좋은 게 미래에도 좋다고 할 수가 없어.
그래서 가능하면 자기감정을 자기가 알 뿐이지. 감정을 따라간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억제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야. 그건 잘 몰라. 어느 게 좋은지는. 다만 자기가 행할 때 감정을 알아야 돼. 이건 내가 좋아해서 해 보는 거구나. 좋아해서 하는 것은 반드시 과보가 따라. 만지고 싶어서 만지면 반드시 과보가 있다. 이 말이야. 먹고 싶어서 먹으면 과보가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과보를 알아야 된다. 그 과보가 싫으면 하고 싶더라도 멈출 줄 알아야 돼.
그래서 지금 일 같은 것은 지금 젊은 나이에 자기 해 보고 싶은 일 해 보면 돼. 그런데 지금 고등학생 2학년이 공부를 해야 되는데 계속 딴 거를 하고 싶다. 그러면 대학을 포기하고 하면 돼. 그런데 대학도 가고 싶고 만화도 그리고 싶다. 이러면 안 되지. 아예 만화 과를 가면 몰라도. 그러니까 그건 하고 싶은 것도 그 상항에 맞느냐 하는 게 중요한 거야. 그런 데서 지금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내가 모르는데,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지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자기 진로와 관계되는 동일한 선상에 있을 땐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그런데 내가 가야 될 길은 이쪽인데 곁다리로 자꾸 다른데 한 눈을 판다. 이러면 하고 싶어도 절제해야 돼. 그 다음에 남이 뭐라고 하든, 상대가 어떻게 하든, 후배에게 반말 안 하고 경어를 쓰는 건 좋아. 세상이 뭐라 그러든, 구애받지마. 필요 없어. 좋은데 후배들이 선배님이 자꾸 존댓말 하니까 거리감이 느껴지고 싫어요. 그냥 존대 쓰지 마세요. 이럴 때는 그의 의견을 존중해서 그냥 경어를 안 쓰는 게 좋아.
그 사람들이 원하니까. 경어를 쓰는 이유가 뭐야.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서 경어를 쓰는 거 아니오. 본인이 반말이 좋다는데 경어를 쓰는 건 상대의 의사를 존중 안 하는 거 아니야. 나를 고집하는 거지. 그러니까 처음에는 경어를 쓰고 상대가 부담스러워 하면 상대가 원하는 데로 써주면 된다. 그다음에 다른 사람이 나한테 반말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기 때문에 간섭할 필요가 없어. 반말 쓰면 반말 쓰는 데로, 경어 쓰면 경어 쓰는 데로 그냥 받아들이면 돼.
왜냐하면, 내가 경어를 쓰는 것은 내 있었던 가치관이나 버릇이듯이 그 사람들은 자기보다 한 살만 어리거나 친구이거나, 나이만 같아도 반말하는 것이 습관인 사람이 있어. 반말하는 습관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거는 그 사람 하는 데로 받아들이고, 내가 하는 건 내 하는 데로 하되. 상대가 반말을 써 달라 하면 그냥 반말을 쓰면 돼. 내가 경어하니 너도 경어해라. 이렇게 하면 안 돼. 이건 내 고집이야.
그렇게 되면 인간관계가 자유롭지 못해, 우리 한국사람, 특히 경상도 사람들은 반말하는 게 조금 도에 지나치지. 여기서는 이게 편한데 서울 가면 약간 좀 예의에 어긋나. 경상도 사람들은 예를 들면 스님이라도 이래 만나면 아~ 법륜스님하고 굉장히 존경하다. 이렇게 하다가 아무 게 동생이네, 지 친구 동생이면, 그냥 그 자리에서 반말이 탁 나와. 이게 경상도 사람의 특징이야. 아~ 누구 동생이구나. 아~ 그래. 이러면서 반말이 그 자리에서 탁 나와.
아 그럼 이래이래 되다 학교 뭐 이러다가 학교 어디 나왔노 이러다가 딱~ 자기 후배가 되면 아~ 후배네. 이러면서 그 자리에서 반말이 나와. 이게 사람들의 일반적인 문화고 버릇이란 말이오. 내가 경어를 썼는데 상대가 딱 반말하면 나도 그냥 탁 놔 버릴 수밖에 없고. 내가 경어를 딱 쓰니 상대가 같이 경어를 쓰면 내가 계속 경어를 쓰는 게 낫고.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해야 돼. 말이라는 건.
경어라는 건 또 우리나라에만 있지. 영어에는 경어 같은 게 별로 없잖아. 물론 조금은 있지만, 그러니까 이건 습관이야 문화고. 꼭 이것이 어떻다고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요. 내가 경어를 쓰는 건 쓰고. 상대가 반말하라면 하고. 남이 반말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그냥 받아들이고, 나보다 어린애가 나에게 반말하더라도 어때? 말버릇이 저렇구나 하고 받아들여요. 젊은 사람인데도 뭔가 조금 뭘 지키는 게 있는 사람이네. 좋게 말하면 좀 체통이 있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아이고 고지식하고. 권위주의적이고, 그렇다. 이래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