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2)

[즉문즉설] 제193회 친정엄마와 마음이 편치않은 40대 주부

Buddhastudy 2012. 12. 8. 05:02
출처 YouTube

 

우리가 자식이 부모를 원망한다 할 때 자식이 왜 부모를 원망할까. 사실은 이 세상에서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사람은 부모밖에 없단 말이오. 그런데 고마워하지는 못할지언정 미워해서는 안 돼요. 왜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느냐? 이것은 내가 바라는 게 커서 그래요. 이웃집 부모하고 비교해서 제는 엄마가 이리해 주던데, 제는 아빠가 이리해 주던데, 또는 같은 식구 중에 왜 오빠한테는 이리 해주고 나한테는 이리 안 해주느냐? 동생한테는 이렇게 하고 나한테는 왜 이렇게 하느냐? 비교해서 생기는 거요.

 

다시 말하면 부모가 자식은 손해 끼치는 사람은 없어요. 다 뭔가를 도와줘요. 그런데 내가 100을 원하는데 부모가 50밖에 안 해주면 원망이 생긴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면 첫째는 그것이 도리에 맞지가 않고. , 은혜를 입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되니까 배은망덕한 사람이죠. 이게 이치에 맞지 않다. 두 번째는 부모를 원망하게 되면 어떠냐? 원망한다는 건 부모가 나쁜 사람이란 얘기거든? 그러면 그 나쁜 사람의 자식이란 말이야. 내가. 그러니까 나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없어져요.

 

이것은 생각으로는 안 그러지만, 무의식세계로 마음에서 이미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없어진다. 열등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자신을 헤치는 행위다 이런 얘기요.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도 부모에게 옛날의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옛날에는 상처는 내가 어려서 뭘 몰라서 그랬다. 내 나이 들어 보니 , 내가 몰라서 그랬구나.’ 이래서 그 부모의 은혜를 알면 상처가 치유된단 말이오.

 

그런데 나이가 든 지금도 부모를 원망한다 하는 것은 지금도 부모에게 바라는 게 있다는 말이오. 그 바라는 게 첫째 재산 같은 거를 바라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금 질문하는 사람처럼 말을 좀 살갑게 해 줘라. 어떻게 좀 해줘라. 어릴 때 맞은 것만 해도 억울한데 지금 내가 이렇게 다 컸는데 지금도 야단치고 그러나. 아까도 말하는 속에 옛날에 성질대로 살더니 늙어서도 아직도 성질대로 산다. 이런 거란 말이오. 그런데 스님이 늘 얘기하잖아요.

 

이 사물에는 성질이 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 있죠. 그러니까 댐을 위에 막고 우리가 밑에 살면 저절로 집에 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 수가 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까. 그런데 내가 위에 살고 물이 아래에 있을 때는 저절로 올 수가 없다. 그때는 끌어 올리는 수고를 해야 된다. 이게 물에 따른 원리란 말이오. 왜 저 집에는 물이 가만히 나오는데 우리는 끌어 올려야 되느냐? 이거는 물의 성질을 모르는 거다.

 

그럼 어른의 성질이 뭐냐? 어른이 되면 몸이든 마음이든 자꾸 굳어져요. 몸도 굳어지고 생각도 굳어져요. 그래서 잘 바뀌질 않아. 그런데 지금 이제 늙었으면 성질 그만 부리고 좀 살갑게 대해주면 어떻겠냐? 라는 건 뭐요? 누가 변하라는 거요? 부모보고 변해라. 이 얘기요. 내가 변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부모보고 변해라. 아직도 안 변하나?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이오. 그런데 이건 불가능한 거요.

 

불가능한 거를 내가 요구하면 결국 내 요구 되로 안 되니까 내가 괴로워지고. 이것이 다시 또 부모를 원망하게 된다. 이것은 부모가 안 변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엉뚱한 걸 바라는 데서 생긴 문제요. 그러니까 부모가 고함을 지대로 성질을 내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내가 볼 때, ‘아이고 옛날에도 성질 내더니 늙어서도 저 성질 안 죽고 아직도 내네. 아이고 지겹다.’ 이래 볼 수도 있고.

 

옛날 같으면 성질 내고 뺨따귀 때리는 게 왔는데 아이고 우리 부모 늙어서 성질 내는 목소리도 적어졌다. 힘이 빠지시네. 성질만 내지 이제 뺨도 못 때리시네. 쯧쯧쯧. 아이고 안됐다.’ 옛날에 왜 이런 얘기 있잖아요. 부모가 자식을 종아리를 때리는데 젊을 때 때리는 매의 힘하고, 늙어서 때리는 매의 힘이 약하니까 때리는 걸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아이고 우리 부모님이 늙어 가시는구나 하고 안쓰러워했다. 이런 얘기 들어 보셨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이거야.

 

그러니까 그 두 쪽에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도 좋은데 전자로 받아들이면 내가 괴롭고. 후자로 받아들이면 부모님 성질 내는 건 똑같은데 내 마음이 편안하다 이거야. 부모를 위해서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해라. 나를 위해서. 그러니까 어릴 때 젊을 때 키워줘서 고맙다. 성질을 부리더라도 키워줬어? 안 키워줬어? 좀 때리더라도 키워줬어? 안 키워줬어? . 이웃사람은 뺨따귀도 안 때렸지마는 키워주지도 안 했어. 그럼 몇 대 맞고 10년 키워 주는 게 나아. 부모한테 몇 대 맞고 집에 사는 게 나. 안 맞고 고아원에 가서 사는 게 나아?

 

그리고 나도 애 키워보니까 애들 말 안 들으면 성질이 나요 안나요? 요즘 때리지 마라 해서 안 때리지. 성질대로 하면 북 패듯이 뚜드려 패주고 싶잖아. 거 조만하게 말 안 듣고 아 성질 나잖아 그죠?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거는 그냥 일반적인 문화요. 아주 특수한 사람 빼고 자랄 때 부모한테 안 뚜드려 맞은 사람 있어? 다 뚜드려 맞았어. 그런데 부모한테 맞은 걸 갖고 원한으로 삼으면 안 돼. 부모한테 맞은 거 하고 스승한테 맞은 거를 원한으로 삼는 거는 어리석은 사람이오.

 

그러니까 그런데 어릴 때는 그게 문제 삼을 수가 있어요. ? 어린 거는 철이 없으니까. 그런데 내가 이제 나이 들어서 살아보니까. 아이고 우리 부모도 내 나이 때 그랬겠다. 아이고 엄마가 어떻게 애를 때리나 그랬는데. 나도 그 나이 돼 보니 엄마라는 게 별게 아니잖아. 그죠? 그렇게 해서 요즘 보다 살기 어려운 시절에 애들 데리고 살려니 힘드니까.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어리석어서 몰랐지마는 지금 철들고 보니 부모 마음을 이해하게 되니까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내라.

 

감사하는 마음을 내면 내 마음에 부모에 대한 자긍심이 생긴다. 이 부모에 대해서 감사해 하고 내가 자긍심이 생기면 지금 부모가 성질을 내도 그 목소리가 옛날보다 못한 것을 그 힘이 옛날보다 못한 것을 오히려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다. 이렇게 부모하고의 관계를 내가 받아들이면 누구한테 좋다? . 그러면 나한테 좋은 데로 하지, 꼭 나한테 손해날 짓을 뭣 때문에 해요.

 

어차피 부모하고 관계를 맺어야 되는데 이렇게 관계를 맺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돌아가신 뒤에도 누구한테 좋다? 나한테 좋은데. 부모하고 원망하고 싸우다가 돌아가시면 돌아가신 뒤에는 또 후회가 돼요. 안 돼요? 후회가 돼요. 밉거든 돌아가신 뒤에도 가지도 말아야 돼. 생각도 하지 말고. 어릴 때 나 때린 인간은 세세생생이 보기도 싫다. 딱 잘라버려야 돼. 그런데 그런 배짱도 없잖아. 살아서는 미워하고 죽으면 가서 또 울고. 그런단 말이야. 이거를 거꾸로 산다. 반야심경에서 점잖게 말하면 뭐다? 전도몽상이다. 그 말이란 말이오.

 

왜 살아있을 때 좋게 지내고 돌아가신 뒤에도 좋고 이렇게 안 하고. 살아있을 때는 싸우고 돌아가신 뒤에는 후회해 또 울고. 왜 이런 두 가지 이런 일을 하느냐 이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낳아주셔서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릴 때 내가 철이 없어가지고 은혜를 몰랐는데 이제 나도 나이 들어보니까 어때요? 부모의 심정을 알겠습니다.’ 이렇게 첫째 기도를 하고. 지금도 악을 쓰고 악을 쓰고 하는 거는 노인은 그 성격이 변하는 게 아니다. 그 성격이 내가 변하기를 바라면 부모가 죽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옛날부터 저게 천성이 변하는 거 보니까 죽을 때가 다 돼가네. 이렇게 얘기하잖아. 그죠? 그러니까 천성이 변하고 빨리 죽는 게 나아요. 그냥 그 성질 가지고 좀 더 사는 게 나아요? ‘아이고 어머니 그 성질 가지시고 조금 더 건강하게 사세요.’ 이런 마음을 내세요. 이렇게 마음을 내면 지금 당장 좋아져. 이걸 뭐 애를 쓰고 노력해야 좋아지는 게 아니고. 생각을 탁 바꾸면 금방 좋아져요.

 

그러나 무의식세계에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 하시는 고함지대는 소리를 탁 들으면 순간적으로는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그럴 때 내가 탁 보면서 어 내가 또 옛날 습관대로 돌아가려고 하는구나.’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된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 몇 번 여러분께 말씀드렸지마는 우리가 이치를 몰라서 이렇게 괴로운 거는 그 이치를 알면 된다. 스님의 법문은 이치를 알도록 깨우쳐주는 거고요. 쥐약인 줄 모르고 먹으려고 하는데 제가 ~ 그거 쥐약 들었다.” 이치를 깨우쳐 준다. 이 말이오.

 

아까 첫 번째 노 보살님이 아들이 문제다. 이렇게 문제를 삼는데 제가 가만히 노 보살님을 보니까 너무 간섭이 심해요. 자기는 부모로서 당연한 거 아니냐. 밥 안 먹는 거 먹으라 그래야 되지 않느냐? 말 안 하면 해야 되지 않느냐? 같이 밥 먹으러 가자 그러면 좋아해야 되지 않느냐? 이게 뭐가 문제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세상 사람이 다 똑같지가 않다. 이런 얘기요. 밥 먹으러 가자. 불고기 먹으러 가자 하면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요.

 

이 맛있는 짜장면을 왜 안 먹노? 이런 얘기하고 똑같단 말이오. 짜장면 자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오. 어떤 사람은 그래요. 아이고 강아지 예쁘다. 어떻게 강아지를 안 예쁠 수가 있나? 개를 안 예뻐하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이런 사람도 있어요. 자기가 좋으면 세상이 다 좋아하는 줄 아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 사실은 돌아보면 부부생활에도 장애가 되고 자식들에게도 장애가 된다. 딸은 좋아하는데 니는 아들인 너는 왜 그러냐. 이건 아들딸이 다른 사람인데 똑같이 생각한다.

 

그래 이런 거는 아는 것 같지만 모르는 거요. 그래서 깨우쳐서 입을 다물어야 된다. 오늘부터 입을 딱~ 다물고. 첫째 내가 내 생각을 너무 고집해서 우리 남편이 참 힘들었겠다. 나는 지금 남편이 문제고 나는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내가 다시 나를 돌아보니까 나하고 같이 있는 상대편이 참 힘들었겠구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렇게 이해하는 마음을 내고 참회기도를 해야 되고. 또 자식의 하는 행동을 보면 저게 자식 하는 행동이 내 맘에 통 안 든단 말이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느냐? 하는데, 그것이 내 남편이 내가 하는 행동을 그렇게 봤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나는 너무너무 내 식대로 잘했지마는 남편이 볼 때는 답답해하는 거고. 자식도 자기는 자기 세계에서 잘하고 있는데 엄마가 볼 때는 문제로 삼는 거다. 이렇게 되면 이거는 죽을 때까지 엄마가 책임져야 돼. 남편을 끝까지 100년 회로를 못한 책임으로 자식이 이름만 자식이지 사실은 남편처럼 되가지고 평생 살아야 된다.

 

그러니 이거 남편하고는 관계를 복원하고 자식하곤 정을 끊어야 되고, 내가 버린 남편은 참회를 해서 마음으로라도 다시 정을 이어야 된다. 이 말이오. 이어야 될 정은 끊고 끊어야 될 정은 잇고. 그러니까 이렇게 이치를 알았다. ‘~ 이게 내가 거꾸로 마음을 냈구나. 그래서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고통이 왔구나.’ 이걸 첫째 아는 게 법문이에요. 법문을 자꾸 들으면 아~ 이치가 그렇구나. 내가 이치를 몰랐구나.

 

어릴 때 내가 철없어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가만 하나하나 따져보니까 사실 부모한테는 원망할 거는 없구나. 내가 길 가는 사람도 원망 안 하는데 나를 키워주고 했는데 내가 원망할 게 뭐가 있겠나. 정신을 차리면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오. 그런데도 꼴을 딱 보면 미워진단 말이오. ? 딴 부모는 안 그런데 니는 왜 당신은 왜 그래? 오빠한테는 안 하면서 나한테는 왜 그래? 이런 식이 된다는 거요. 이게 이제 비교해서 자꾸 이런 문제가 생긴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제는 철이 들었으니까 이런 생각을 버려야 된다. 그런데 옛날에 그렇게 살아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이걸 까르마라 그래요. 업식이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꼴을 탁 보면 이미 그런 생각이 들어버리고 마음이 그렇게 일어나 버리고 말이 그렇게 튀어나와 버린다. 그래서 정신을 다시 차리고 ~ 내가 또 업식에 끌려가구나.’ 이렇게 자각을 하고 ~ 다음부턴 안 그래야지.’ 이렇게 다짐을 하는 거란 말이오. 그래서 참회라고 하는 것은 이 잘못됨을 업식에 끌려감을 첫째 알아차려야 되요.

 

두 번째는 뉘우쳐야 되고, 세 번째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야 된다. 그러나 다짐을 했지마는 또 경계에 부닥치면 어대요? 또 그런 일이 일어난다. 이 말이오. 앞에 여기 아까 어떤 보살님이 100일 기도 하겠다 해놓고 20일 하다 그만두고, 또 하겠다. 그러고 20일 하다 그만두고, 또 하겠다. 그러고 20일 하다 그만뒀다. 이런 얘기 하잖아요. 그죠? 그러면 지금 20일 하다 그만 둔 게 아까 얘기 듣고 헤아려보니 4번인가 5번 정도인데, 또 도전을 해서. 목표를 정해야지. 저번에는 20일 하고 그만뒀으니 이번에는 어때요?

 

늦어도 30일이라도 하고 그만둬야 되겠다. 이번에는 50일이라도 하고 그만둬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한꺼번에 100일 하면 좋지만 못하면 그렇게라도 어때요? 100일을 열 번 도전해서 해치우고 말겠다. 이런 게 있어야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넘어지면 또 일어나서 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서 하고, 이렇게 해 나가야 된다. 이런 얘기요. 이걸 우리가 수행이라고 그런다. 그러니까 이렇게 법문을 듣는 게 중요하고 그건 법을 이해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두 번째는 실천을 해야 돼. 실제로 자꾸 행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습관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가야 된다. 이제 이걸 실제로 약속을 해서 30일이면 30일 우리 한번 해보자. 아침에 5시에 일어나서 기도를 한번 해보자. 그다음에 이 세상에서 하루 천원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들 생각하면서 내가 그들을 위해서 화장도 안 하고 그들을 위해서 집도 줄이고 그들을 위해서 옷도 안 사고 이러면 좋지마는 그 정도는 안 되더라도.

 

하루 천 원 정도는 그들을 위해서 내가 매일 보시를 하고 차비가 부족하면 오늘 걸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 천 원 이상은 보시를 하자. 그리고 길을 가다가 하루 생활 속에 내가 의도적으로 한 가지는 좋은 일을 하자. 전에 같으면 길 물으면 쉭~ 지나갈 거를 서서 한 2~3분 자세히 알려준다든지. 전에 구걸하는 사람 있을 때 그냥 지나갔다면 다음엔 천 원이라도 준다든지.

 

뭐 전에는 법당에 와서 그냥 깔아놓은 방석에 와서 앉기만 했다면 오늘은 내가 좀 일찍 가가지고 한번 열 개라도 방석을 깐다든지. 이렇게 좀 의도적으로 내가 하루에 한가는 어때요? 좋은 일을 하자. 전에는 좌석에 앉았는데 노인이 오는데 적당하게 외면했다면 오늘은 내가 자리에 일어서 주자. 무거운 물건 들고 와서 있으면 다만 얼마라도 좀, 계단에 올라가는 데 노인이 끙끙대고 가면 좀 들어서 올려주자. 이렇게 자기가 봉사,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된다. 그래서 이렇게 수행하고 봉사하는 거를 연습으로 한 번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