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820회 사람마다 타고난 자비심의 크기가 다른가요?

Buddhastudy 2013. 9. 25. 22:20

출처 YouTube

 

그러니까 한마디로 망상을 피운다. 이렇게 진단을 할 수 있겠네.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 지금 얘기한 거 들어보면 하나도 쓸모 있는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쓸모가 있고, 큰 것은 큰 것대로 쓸모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토끼하고 코끼리하고 어느 게 더 경쟁력이 있느냐? 말할 수가 없어요. 토끼는 토끼대로 경쟁력이 있고, 코끼리는 코끼리대로 경쟁력이 있거든. 자꾸 사이즈, 크기. 큰 것이 아름답다. 큰 것이 좋다. 이렇게 가면 자꾸 작은 것이 이렇게 열등하게 되죠.

 

그래서 요즘 우리가 생각을 바꿔라 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런 것도 있고, 또 흰게 좋고 검은 건 싫다. 이런 것도 고정관념이죠. 그래서 검은 것이 아름답다.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세상 천하 만물은 다 평등해요. 다 그것은 다만 그것일 뿐이에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무엇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다를 뿐이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영어 말잘 하는 걸 기본으로 해서 외국어 배우는 속도를 기준으로 해서 평가를 할 거냐? 어떤 수학 원리를 가지고 평가할거냐? 물리법칙으로 평가를 할 거냐? 역사 암기력으로 평가를 할 거냐. 거기에 따라 다 사람이 우열이 달라져요.

 

그러니까 체육으로 평가할거냐? 음악으로 평가할거냐? 체육 안에도 달리기로 평가할거냐? 농구로 평가할거냐? 축구로 평가할거냐? 이거 다 평가 기준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요. 그러니까 누가 더 크다 작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자기도 부처님처럼 하면 되요. 그런데 자기는 부처님처럼 하고 싶지가 않은 거지 뭐. 자기 결혼해서 애 낳아놓고 지금 갈 수 있겠어요? 부처님, 애 낳아놓고 갔는데. 또 부처님은 호화로운 생활 하다가도 버리고 완전히 극한적인 고행을 했는데 자기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안 되는 거지,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 비슷하게 되는 거요.

 

?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니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러니까 예를 든다면 똑같이 가난하게 태어나서 자라도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런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이 적고,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이 더 커요. 그 이유는 농촌에서는 다 가난하니까 고만고만하게 사니까 학교 가도 늘 그 애들이고, 부잣집이라 그래봐야 뭐 가난한 집하고 논마지기 그냥 배차이 나는 이런 상태니까 열등의식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도시에서는 어떠냐? 도시빈민의 가난한 아이들이 학교가면 거 부잣집 애들 오면 그 차이가 너무 크다는 거요. 옷이라든지 뭐~ 자가용이라든지 온갖 게.

 

그러니까 열등의식이 첫째 어릴 때부터 느껴지게 되고. 또 도시에 농촌에 사는 사람은 엄마가 특별히 그렇게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는데 비해서 도시에 빈민들은 그 엄마가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이 굉장히 많죠. 그래서 아이들이 똑같이 가난하게 자라도 환경에 따라서 다른 거요. 그러니까 엄마가 가난해도 엄마가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 없이 오히려 검소하게 사는 형이면 아이들은 가난하게 자랐는데도 전혀 열등의식이 없어요. 가난에 대한. 그런데 엄마가 막~ 가난에 대해서 너무너무 열등의식을 갖고 있으면 아이들도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이 생기는 거고, 엄마가 학벌에 대한 열등의식이 무학이라도 학벌에 대한 특별한 열등의식이 없으면 애들은 열등의식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엄마가 이 열등의식이 심하면 인물이든 가난이든 뭐~ 학벌이든 심하면 애들도 따라 그래요. 엄마가 한국말하면 애들 한국말 하듯이. 그러니까 그게 부정적 의식,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의식이 강한 편이거든요. 자기가 단지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요. ~ 그런 생각이 잘못된 거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발전에 아무도움이 안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자기가 노력해서 자기가 갈 수 있는 길을 가야지 그 가장 높은 단계, 부처님하고 예수님하고 떡~ 비교해서 내가 부족하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는 어떤 해결책이 안 나오는 얘기를 하는 거요.

 

내가 예를 들어서 지금 마당에서 백미터 달리기를 체크하며 25초 정도 나오는데, 올림픽 선수 1등 했던 109.9, 10초 나오는 사람하고 비교해서 나도 저 사람처럼 되어 봐야지 하면 내가 될 수가 없어요. 불가능해요. 그럼 내가 열등하냐? 열등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욕심이 많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20초 정도 목표를 세우면 어때요? 3개월 뛰면 어~~ 도달할 수 있을 거요. 다리에 근육 좀 올리고, 뱃살 좀 빼고 그렇죠? 그러면 도달 할 수 있을 거요. 나는 20초 뛰고 그 사람은 10초 뛰었다 해서 그 사람이 위대하고 나는 열등한 거 아니에요. 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거니까.

 

목표의 기준치를 자기가 더 많이 낮춰야지 조금 낮춰서 되는 게 아니고. 으흠. 많이 낮춰버리면 돼. 사랑의 크기, 그런 건 목표로 할 수가 없어요. 그냥 생긴 대로 살면 되요. 그런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요. 나를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높은 내가 아니고 현재에 있는 그대로 나를 이만해도 괜찮아.” 이렇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돼. 으흠. 자기만족부터 시작해야 돼. 이 정도 나이, 이 정도 인물, 이 정도 경제상황, 이 정도 재능, 이것도 상당히 괜찮은 거요. 이런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나를 사랑하는 거요. 그러니까 내가 높이 환상에 젖어있으니까 현실에는 내가 못마땅한 거요. 이게 자기를 미워하는 거거든요.

 

그 환상을 없애버리고 지금 이대로의 나를 인정하면 그게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거요.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면 자연적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들죠. 그런데 자기를 너무 높혀 놨기 때문에 우선 자기부터 사랑 못해.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가 자기를 싫어하고, 자기가 자기를 열등하다고 생각하니까.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해주겠으며, 나도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남을 사랑할 줄 알겠어요. 그러니까 남을 뭐~ 사랑하니, 남의 포용력을 가지니 그런 욕심 내지 말고, 그 욕심이요. 사랑이 아니고, 그건 욕심이에요.

 

그냥 이대로, 토끼가 뭐~ 남을 위해서 살겠다고 각오해서 삽니까? 나무가 남의 그늘이 되어주려고 자기가 자랍니까? 아니에요. 나무는 나무대로 자라며 저절로 필요한 사람이 와서 그 그늘에 쉬면 도움이 되는 거고, 토끼는 토끼 나름대로 살지만 그걸 봐주는 사람이 즐거우면 어때요? 남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거지. 토끼가 남을 즐겁게 하려고 펄쩍펄쩍 뛰는 거 아니고, 나무가 남을 쉬게 해주려고 그늘을 드리우는 게 아니라는 거요.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면 그게 남에게 도움이 되는 거요. 내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되겠다. 억지로 하면 자기가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거요.

 

자기도 행복하지 못해. 자기가 행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행복하게 해주겠어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세요. 괜히 딴 생각하지 말고. 스님이 뭐 여러분들 위해서 사는 줄 아세요? 난 내 인생사는 거요. 내 인생을 사는데, 술집에 가서 술 먹고, 춤추는 거 보다는 이렇게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게 더 재미있는 거요.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안가면 저 사람들 못살 거 같아서 내려와서 이렇게 하는 줄 아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 나 없어도 다 잘 살아요. 내가 있으니 괜히 와서 묻는 거지. 내가 뭐 다음 주에 법회 안 한다 해도 이 사람들 뭐~ 약간 섭섭하다가 그걸로 끝이야. 다 잘 살아가요. 아시겠어요?

 

부모가 죽어도 자식들 처음에 며칠 울지, 다 잘 살아가요. 그러니까 그런 헛된 생각하면 안 돼요.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남을 위해서 살려고 노력한 거 아니에요.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한 거요.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살려고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살은 거요. 허황된 생각 갖고 남 따라 안다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좋아하게 된 거요. 내가 볼 때는 좀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애. 으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