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째 법칙은 ‘삶의 목적을 인식하라’이다.
이것은 우리 삶이 가진 근원적인 목적과
거기에 깃든 순수한 잠재성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전적으로 각자의 몫이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진정한 목적을
헤아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기에 급급하지만
실은 태어날 때부터
저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다.
비록 진정한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일상생활에서 자잘한 목적을 실현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궁금증을 가질 수도 있다.
왜 우리가 태어난 궁극적인 목적을 꼭 알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삶이 가진 근원적인 목적을 알게 되면
저절로 자기가 가진 ‘순수한 잠재성’을 통찰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의 일상적인 목적이 무엇이든
쉽게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인생의 목적을 아주 단순한 언어로 정리해보라.
예를 들면, 내 삶의 목표는
만나는 모든 이들을 치유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며
세상에 평화를 빚어내는 것이다.
명심할 것은 우리 각자가 가진 삶의 목적 속에는
이미 목적을 실현한 ‘순수한 가능성의 장’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최고의 씨앗을 뿌리는 셈이다.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인도의 고대 경전인 <베다>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온다.
“나는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한 잠재성이다.
나의 소망은 땅에 뿌려진 씨앗과도 같아서
적당한 계절이 되면
저절로 아름다운 꽃으로, 탐스러운 나무로, 매혹적인 정원으로, 장엄한 숲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열일곱 번째 법칙은 ‘의문을 제기하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신념을 무작정 따르지 말고
의문을 제기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사회의 지배적인 신념이나 이데올로기
권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으며
그것에 회의를 품는 태도다.
사람들이 흔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또는 무작정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스스로 회의를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 환경’이라는 최면 상태에서 깨어날 수 있다.
우리는 나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사회구성원으로서
집단적인 상식과 신념을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난다.
우리가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직장에 취직하여
사회 일원이 되어가는 일련의 경험들이
모두 이러한 과정의 연속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어떤 것은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으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신념도 있다.
이러한 집단 신념
즉 통념들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 내면에 두터운 ‘사고의 벽’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통념의 감옥’에 갇혀
분노하거나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자기만의 주체성을 잃어간다.
당신이 진정으로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통념에 대해 회의를 품고
스스로 철저히 검증하고 검정하는
생각의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남들이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원칙이나 상식에 대해서도
자기만의 생각으로 의문을 품고 새롭게 바라볼 때
당신은 진정한 통찰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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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번째 법칙은 ‘자비롭게 주고, 자비롭게 받아라’이다.
받는 것도 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누군가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도
남에게 아낌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 못지않게 꼭 필요한 미덕이다.
이것은 주는 행위 못지않게 자비로운 일이다.
만약 남에게서 뭔가를 받는 일을 불편하게 여긴다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뭔가를 흔쾌히 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이 실제로 많은 기부를 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역할을 바꿔가며 교류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주 에너지는 주고받을 때 잘 흐른다.
양쪽 측면이 모두 존재해야 완전하기 때문이다.
주는 쪽으로만 흘러가든지 받는 쪽으로만 흘러가든지
어느 한쪽만 존재한다면 균형이 맞지 않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주고받는 행위가
반드시 물질적인 대상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남이 보내는 칭찬이나 찬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열린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라야
남에게 흔쾌히 찬사를 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존경하지 못하고, 예의바르게 대하지도 못하며, 칭찬할 줄도 모른다면
당신은 은행 계좌에 돈이 얼마나 있든지 상관없이
‘가난을 창조하는 마음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
스물한 번째 법칙은 ‘개별성 너머의 전체성을 이해하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개별성 너머의 ‘전체성’을 이해하라고 가르친다.
세상 만물은 겉보기에는 모두 분리되어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 같아도
그 너머에는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성’이라는 차원이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가 ‘초월적인 인식’을 가지고 세상을 관찰하면
분리나 분열을 만들어내는 ‘환영의 가면’ 너머에 존재하는
전체성의 차원을 알아차리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분리되어 보이지만
그 외양 너머에는 ‘전체성’이라는 통일된 장이 존재한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보는 사람과 보이는 대상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와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
또는 한가롭게 바닷가를 거닐다가 조용히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
또는 좋아하는 음악에 몰입하거나 춤추는 데 빠져서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때
또는 시를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고요히 명상에 잠길 때… 등등
이때 우리는 시간이라는 장벽을 초월하여
‘영원의 놀이터’로 들어간다.
이런 순간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표현한다.
“와, 이토록 멋진 경치를 보니 숨이 멎을 것만 같아!”
“세상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어!”
이때 우리는 육신의 한계를 초월해 대상과 하나가 된다.
이처럼 아주 심오한 차원의 인식에 이르면
당신과 나와, 저 산과, 이 냇물, 그리고 냇물을 헤엄치는 물고기 떼가
더 이상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다.
서로 다른 외양을 하고 있는 동일한 존재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가 사는 온 세상이 그렇게 서로 어우러져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전체성의 진리’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때의 사랑은 감정에 치우친 사랑이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로부터 솟아나는 사랑
모든 창조물을 한데 끌어안는
전체성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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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법칙은 ‘신성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라’이다.
이것은 신성한 가치에 대한 것이다.
신성한 가치에는
진리, 성실, 정직, 사랑, 믿음, 헌신, 그리고 아름다움 등의 가치가 포함된다.
인도의 위대한 시인 타고르는
이러한 이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느낄 때, 나는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안다.”
신성한 가치가 사라지면
세상은 혼란과 혼돈이 지배하게 된다.
신성한 가치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건강이 질병으로 무너지고, 가난이 풍요로움을 지배하며
빛나던 문명도 쇠퇴하고 만다.
우리 사회가 신성한 가치들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일 때
혼돈을 밀치고 질서가 나타나며
우리 내면에 간직된 ‘순수한 잠재성의 장’이 꽃을 피운다.
그리고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고맙습니다.
디팩 초프라의 풍요로운 삶을 창조하는
<마음의 법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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