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에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 능력이 있다고 해 봅시다.
독심술 능력을 가진 여러분은
4명의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걷고 있던 한 사람이
쓰레기를 줍기 시작하네요?
그때, 4명의 친구들 마음속에서
제각기 ‘다른 평가들’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1_우와, 환경을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이구나! 멋있다!
2_엥..? 과연 사람이 없는 길거리에서도 쓰레기를 주웠을까?
시선을 의식해서 저러는 거 아니야?
3_아, 저 사람 쓰레기 주운 손으로 핸드폰 만지네.. 좀 더러운데..
4_쓰레기를 못본 척 할 수도 있었는데
참 아름다운 영혼이구나, 나도 쓰레기 한번 주워볼까?
모두가 [똑같은] 사람을 보고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본 거예요.
‘4개의 평가 내용대로’
그 행인은 환경을 위해 행동하는 멋있는 사람이면서도
가식쟁에다가
모범이 되는 아름다운 영혼임과 동시에
더러운 사람인 걸까요?
아니요.
행인이
멋있고, 가식적이고, 아름답고, 더러운
4가지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쓰레기 줍는 행동을
‘특정한’ 버전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4가지 상태의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이 이야기 속의 행인처럼
외부 존재들의 평가와 판단을 들으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아무 생각없이 한 행동들도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내가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나쁘게’ 평가될 수도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평가하는 외부 존재들의 말’에 크게 좌지우지 됩니다.
좋은 평가를 들으면
기분이 샤랄라 좋아졌다가도
나쁜 평가를 듣는 순간
기분이 팍 나빠집니다.
즉 ‘내 기분’의 통제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완전히 ‘외부 존재의 행동’에 달려있는 거예요.
하지만 ‘외부 존재들의 평가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진실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나’를 보고
누군가는 나에게서 좋은 점을 보고
누군가는 나에게서 부족한 점을 봅니다.
‘넌 진짜 대단하고 멋있는 것 같애’
‘넌 진짜 부족한 점 투성이야’
진실은 뭘까요?
그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닙니다.
나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좋은 점에 집중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의식 상태’를 고백하고 있을 뿐이고
나를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부족한 점에 집중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내면 필터’를 광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평가하는 그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너의 수 많은 점들 중에서
‘굳이’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내면 필터를 가지고 있어
-나는 너라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존재를
‘굳이’ 이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의식 필터를 가지고 있어.
-나는 이러이러한 것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
즉,
나를 판단하는 외부 존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의식 상태]를 고백하고 광고하고 있는 겁니다.
앞에서 말한 ‘쓰레기를 주운 행인’을 예로 들어볼까요?
행인의 객관적 실제 상태는 요겁니다.
/‘그는 길거리에 있던 쓰레기를 주웠다’
끝./
하지만 여러분의 친구들 4명이
그 행인을 ‘자동반사적으로 평가한 내용’은
행인의 ‘객관적 실제 상태’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멋있다, 가식적이다, 더럽다, 아름답다.
즉, 행인에 대한 친구들의 평가는
자신들이 그 행인을
‘어떻게 해석하고자 했는지’를 진술하는
‘자기의식 상태 고백, 자기 내면 필터 광고’였던 겁니다.
행인을 평가하는 친구들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복합적/입체적 존재인 저 행인을
‘굳이’ 이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의식 필터를 가지고 있어.”
여기서 잠깐
이야기의 주인공을 ‘나’로 바꿔볼까요?
내가 -> 외부 존재를 평가하고 판단한 내용은
그 사람의 객관적 실제 상태가 아닙니다.
외부 존재를 평가하는 ‘나의 말’은
‘나 자신의’ 의식 상태를 고백하고
‘나 자신의’ 내면 필터를 광고하는 말입니다.
즉, 누군가를 평가하는 나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저 사람의 수 많은 점들 중에서
‘굳이’ 이런 점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식 상태를 가지고 있어.
-나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저 존재를
‘굳이’ 이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내면 필터를 가지고 있어.
‘일체유심조’라는 말의 뜻처럼
외부에서 보이는 것들은
‘나의 의식’이 반영된 결과물입니다.
내가 모든 것의 아름다움에
‘집중하고자 하는’ 내면 필터를 가지고 있다면
나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 세상에는
온통 아름답고, 찬란하고, 반짝거리는 것들만 넘쳐납니다.
반면에
내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의식 필터를
가지고 있다면
나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 세상에는
온통 고쳐야 할 것들, 부족한 것들, 부정적인 것들만 넘쳐나게 됩니다.
일상 속에서 ‘무심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누군가를 평가하고 판단했다면
그 즉시, ‘나의 판단 내용’을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거기에는
‘내 의식의 초점, 나의 내면 필터’가
적나라하게 녹아 있을 겁니다.
어? 내가 외부 존재를 보고
자.동.반.사.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해 버린 내용을 관찰해 보니까
-나는 지금
저 사람의 수-많은 점들 중에서
‘굳이’ 이런 점에 집중하고자 하는 내면 필터를 가지고 있구나.
-나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저 존재를
‘굳이’ 이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의식 상태를 가지고 있구나.
-나는 외부 존재를 평가하면서
'나의 내면 필터’를 마주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외부 존재를 평가하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나의 평가와 판단’을 관찰함으로써
‘내 의식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나의 내면 필터’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왜냐?
나의 내면 필터가 -> [내면과 똑닮은] 현실을 창조하니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나는 정말로
이 [내면 필터와 똑닮은] 현실이 창조되기를 바라는가?
‘이 내면 필터는 정말로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가?’
‘생’은 나의 의식에 의해서 창조된 '한 겹의 환영'일 뿐입니다.
‘평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가는 무한 다양한 에고들의 ‘내면 필터’에서 걸러져 나온
‘한 겹의 허상’일 뿐입니다.
재밌는 점은
대다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전'에서 와르르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래, 나를 향한 외부 존재들의 평가가 허상적이라는 거
알겠어.
나를 평가하는 외부 존재들의 말이
‘자기 의식 상태 고백’, ‘자기 내면 필터 광고’라는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래도 여전히 안 좋은 평가를 들으면
화딱지가 나고, 속이 막.. 부글부글 끓어 미치겠어.
도대체 ‘어떻게’ 이런저런 평가들 앞에서
고요한 중심을 유지할 수 있는 거야?
이런 분들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실전, 5단계 스킬!
이 5단계 스킬만 ‘그대로’ 따라 하시면
온갖 평가들 앞에서
깨어있음의 상태, 사랑을 바탕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체득’할 수 있으실 겁니다.
--첫 번째 스텝
1_평가 = [자기의식 상태 광고]임을 알아차리기
누군가가 나를 비방하고
나에게서 부족한 점만 보고자 할 때
‘자동반사적으로’ 분노, 증오심 등의 감정이 올라올 겁니다.
그거는 자연스러운 거에요.
그때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충분히 느껴주세요.
하지만, 분노를 충분히 느껴주라는 말은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똑같이 공격해 주고 싶은 마음
그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차분하게 지켜보세요.
‘아, 내가 지금 화가 났구나
이런 말을 들었으니까 당연히 화가 날 만도 하지
그럴 수 있어, 충분히 기분 나쁠만 해’
이렇게 내 감정을 알아주고 나서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 마음에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겁니다.
‘멈춰!’
분노를 바탕으로 한 ‘행동을’ 취하기 전에
‘나를 위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나에 대한 저 사람의 평가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저 사람은, 나라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존재를
‘굳이’ 그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그 자신의 내면 필터를 광고”하고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은 나에게서
아름다운 점, 좋은 점을 보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부족한 점에 집중하기로 ‘선택’하고
‘굳이’ 부정적인 특성을 ‘보고자 하는’ 의식 상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외부 존재가 나를 평가하는 말이
상대의 [자기의식 상태 고백]임을 알아차리세요
--두 번째 스텝
2_[어쩌다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겁니다
저 사람은 ‘어쩌다가’ 저런 내면 필터를 가지게 된 걸까?
저 사람의 내면이
정말로 평화롭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저런 말을 했을까?
진짜 불쌍한 사람은
악평을 들은 내가 아니라, 악평을 하는 저 사람이었구나.
무엇을 보든 간에 “자동 반사적으로”
부족한 점, 나쁜 점만 ’보고자 하는’ 내면 필터를 가슴에 품고
매 순간을 살아가야 하는 저 사람이
진짜로 안타까운 사람이었구나.
날 공격한 저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고 응원해 주자.
어쩌다가 그런 내면 필터를 가지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자기 자신과 외부의 것들 속에서
고유함과 완전함을 ‘보고자 하는’ 내면 필터를 가지게 되기를..
파이팅^^ 유캔~두잇!
그렇게 그의 ‘불쾌한 악평’을
‘내면이 아플 때나 나올 수 있는 행동’으로 바라보고
따뜻하게 웃어넘기세요.
--그 다음으로 세 번째
3_[잡초]를 생각하세요
대자연이 존재하는 한, 잡초는 끝없이 자라납니다.
마찬가지로
의식과 무한 다양한 에고들이 존재하는 한
무한 다양한 ‘내면 필터’에서 걸러져 나온
‘이런저런 평가들’ 역시
잡초처럼 계속해서 자라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들 앞에서
대자연의 잡초를 바라보는 초연한 자연인의 마인드를 유지하세요.
-어이쿠 잡초가 또 자랐네.
뭐 그럴 수 있지^~^
-어이쿠 누가 나를 또 멋대로 평가하네.
뭐 그럴 수 있지^~^
-저 사람은 나를 평가하면서 [자기의식 상태를 광고]하고 있구나
허허허^~^
그러고 나서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세요.
무한 다양한 에고들의 ‘내면 필터’가 존재하는 이상
나를 중심으로 다양한 평가들이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대자연한테 더 이상 잡초를 기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거랑 똑같아요.
즉 나는 평가가 쏟아지는 것을 통제하지 못하고
평가의 ‘내용도’ 통제하지 못합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평가 앞에서의 ‘나의 반응’밖에 없습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쏟아지는 이런저런 평가들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오직 이것만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입니다.
그 ‘어떤 평가도’ 받지 않겠다.
‘특정한 내용의’ 평가를 받지 않겠다.
이 바람들이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평가를
‘절대로 안 듣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결코 이길 수 없는 ‘삶과의 평생 싸움’을 시작하는 겁니다.
이거는 마치
내 마음에 안 드는 ‘구불거리는 잡초’가
절대로 자라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대자연이 길러내는 잡초를
평생토록 잘라내려고 하는 거랑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가 자체를 통제하려는 마음
평가의 ‘내용을’ 통제하려는 마음에 힘을 쭉 빼세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평가들 앞에서의 ‘나의 반응’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네 번째 스텝
4_[내가 나를] 이라는 키워드를 기억하세요.
외부 존재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내가 나를” 어떻게 느끼는가?
오직 이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외부 존재들의 ‘평가’는
그 자체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들의 평가에 ‘힘’이 생기는 때는
‘나의 허락과 승인’이 있을 때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외부 존재로부터
‘너는 성장 가능성이 없어, 너무 늦었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 봅시다.
이때 내가 그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아무런 힘도 없었던 외부 존재들의 평가에
‘힘’이 생기게 됩니다.
‘아, 외부 존재가 날 보고 성장 가능성이 없다네’
‘그래 내가 무슨 성장이야…너무 늦었지’
반면에
외부 존재들이 나를 보고
‘넌 성장 가능성 없어, 너무 늦었어’라고 평가해도
“아니 내 성장 가능성을 그대가 어떻게 알어? ^~^”
“내가 성장하겠다면 하는 거야 ^~^”
이렇게 내가 나에게서 ‘성장의 가능성’을 봐주기로 선택하면
외부 존재들의 평가는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섯 번째로
5_[선택할 자유]를 발휘하세요.
‘내가 나를’ 완전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나에게서 부족한 점들’만’ 바라보기로 ‘선택한’
외부 존재들이 ’나를 만들어갑니다’
왜냐, 그들은 나를 평가함으로써
나를 어떻게 규정할지에 대한 ‘선택할 자유’를 발휘했고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할지에 대한
선택할 자유를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보면 힘싸움 같은 겁니다.
선택할 자유라는 ‘힘’을 발휘하느냐? 아니냐?
그러니까
‘선택할 자유’라는 감사한 ‘힘’을 사용해서
내가 지켜보고 있는 이 에고를
어떻게 빚어나갈지를 ‘선택’하세요.
내가 나를 규정하지 않으면
‘외부 존재들이’ 나를 규정합니다.
1_[자기 의식 상태 고백] 간파->
2_어쩌다가?
3_잡초 ->
4_내가 나를 ->
5_선택할 자유
이렇게 [실전 5단계 스킬]을 그대로 실천하시면
온갖 평가들 앞에서 고요한 중심을 유지하면서
깨어있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일상을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겨울에 내리는 눈을 좋아하시나요?
누군가는 눈을 보고
하늘에서 내리는 ‘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다른 누군가는
눈을 보고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말합니다.
눈은 꽃이면서도 동시에 쓰레기인 걸까요?
아니요.
눈은 그저 눈일 뿐입니다.
눈이 꽃과 쓰레기로서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눈을 꽃으로 ‘보고자 하는 의식’
눈을 쓰레기로 ‘보고자 하는 의식’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에요.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나를 보고
‘꽃’을 보듯 아름답게 바라보고
누군가는 똑같은 나를 보면서
‘돌멩이’를 보듯 무심하게 바라봅니다.
나는 꽃이면서도 동시에 돌멩이인 걸까요?
아니요.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꽃과 돌멩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꽃으로 ‘보고자 하는 의식’
있는 그대로의 나를,
돌멩이로 ‘보고자 하는 의식’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를 꽃으로 평가하면서 칭찬하는 말을 듣고
지나치게 우쭐할 필요도 없고
나를 가치없게 여기면서
비난하는 말을 듣고 괜히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 모든 칭찬과 비난들은
그저 ‘자기의식 상태 고백’, ‘자기 내면 필터 광고’일 뿐입니다.
아, 나를 칭찬해 주는 이 사람은
아름답고 좋은 점을 ‘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의식 상태’를 고백하고 있을 뿐이구나.
누군가의 뛰어나고 대단한 면을 ‘보고자 하는’ 의식 상태
이런 빛나는 내면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
참 감사하다.
그리고
나를 비난하는 이 사람은
부족하고 나쁜 점만 ‘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내면 필터’를 광고하고 있을 뿐이구나.
사랑으로 가득 찬 내면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이 사람의 내면이
부디 사랑으로 가득하고 평화로워지기를..^^
이렇게
나에게서 좋은 점을 봐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나에게서 부족한 점만을 보는 사람들을
‘오히려 응원하고 축복’합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이 영상을 시청하고 계시는 모든 또 다른 나들이
잡초처럼 자라나는 온갖 평가들을
호인처럼 유쾌하게 웃어넘기면서
‘내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만 집중하는
찬란한 일상을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진쏠미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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