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비밀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합니다.
“현실은 거대한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현실이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니?
그럼 어차피 모든 게 이미 다 정해져 있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겠네.
자유의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상인 거네”
이렇게 극단적인 허무주의로 빠져버립니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거예요.
인생은 시뮬레이션 게임과 같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인생이 시뮬레이션 게임이기 때문에
오히려 시나리오를 유기적으로 바꿔갈 수 있는 겁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여러분이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게 됐다고 해봅시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게임 플레이어입니다.
컴퓨터 속 캐릭터가 마주할 운명 시나리오를 관람하는 관찰자이면서도
동시에 그 캐릭터를 조종합니다.
나에게는 게임 속에서 어떤 반응을 선택할지에 대한 자유가 있습니다.
게임 속 마법사 할머니가 주는 사과를 먹기로 선택할지,
정중하게 거절하고 탐험을 이어나갈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의 선택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나에게는 시나리오를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선택해 버린 운명 시나리오가 플레이 되는 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마법사 할머니가 주는 사과를 먹기로 선택하면
사과를 먹음으로써 펼쳐지는 정해진 운명태를 경험해야만 하고
낯선 엘프를 도와주기로 선택하면
엘프를 도와줌으로써 펼쳐지는 정해진 운명태를 경험해야만 합니다.
사과를 먹었을 때의 운명
엘프를 도와줬을 때의 운명
그리고 사과를 먹지 않았을 때의 운명
엘프를 도와주지 않았을 때의 운명까지
게임 속 모든 운명태들은
내가 딸깍하고 선택하면
언제든지 플레이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로
이미 완성된 형태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플레이어인 나의 입장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게 결정된 게 없어요.
내가 딸깍하고 선택을 내리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게임 시스템상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
게임 속 캐릭터의 운명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겁니다.
현실이 창조되는 원리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작동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거시적 차원에서 모든 것은 이미 다 정해져 있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모두 지금 이 순간
이미 완성된 형태로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것은 확률과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
미시적 차원에서는 아무것도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관측되기 전까지
불확정 상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미 다 정해져 있다 vs.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진실은 뭘까요?
미시적 차원에서는 양자역학이 적용되고 있지만
거시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상대성이론이 적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두 이론은
서로 완전히 모순되지만
유기적으로 공존하면서 하나의 우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명과 자유의지 역시 마찬가지예요.
극단적 운명론자들은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고
자유의지는 완전한 허상이라고 하는 반면
극단적 자유의지론자들은
그 어떤 운명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자유의지에만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운명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의지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운명과 자유의지가 유기적으로 공존하면서
하나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에서 마주할 운명 시나리오는
이미 다 정해져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정해진 운명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다만 단 한 개로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무한한 개수의 운명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에게는 무한한 선택 자유권이 있습니다.
이미 완벽하게 창조되어 있는 무한개의 운명들 중
어떤 운명태를 경험할지에 대한 선택할 자유가 있는 겁니다.
즉 거시적 차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운명태의 세부적 내용들이 이미 다 정해져 있고
무한한 개수의 모든 운명태들이
이미 다 완벽하게 창조되어 있지만
선택을 내리기 직전까지는
내 앞에 어떤 운명태가 플레이 될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무한한 개수의 운명태 중 하나를 선택하고
또다시 무한한 개수의 운명태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이렇게 운명과 자유의지의 경의로운 합동 연주에 의해서
삶은 실 실시간으로 창조되고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은 이미 다 정해져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라는 심오한 말이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이처럼 원하는 운명태를 선택해서
삶을 창조해 나가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끌어당김, 트랜서핑, 시크릿, 네빌링 등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끌어당김 세계관에서는 말합니다.
원하는 최종 결과만 생각하고
그 결과가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우주의 프로세스에 맡겨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란
전지전능한 자유의지가 아니라
선택 자유권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최종 결과를 선택할 자유만이 있을 뿐
최종 결과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그 과정은 선택할 수 없다.
즉 어떤 운명태를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나의 자유에 달려 있지만
그 운명태가 어떤 과정으로 전개될지는
내 권한 밖에 있는 거예요.
최종 도착지만 찍어놓으면
찾아가는 과정을 알아서 찾아주는 내비게이션처럼
최종 결과만 선택해 놓으면 이루어지는 과정은
운명태의 자체적인 알고리즘이 알아서 찾아줍니다.
운명태가 전개되는 과정은
그 운명태의 자체적인 신비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종 결과가 이미 이루어진 운명태를
선택할 자유를 발휘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반쪽자리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반쪽은 운명이 채워집니다.
운명태를 선택하는 것만 할 수 있는 반쪽자리 자유의지와
선택이 되어야만 비로소 플레이 될 수 있는 반쪽자리 운명태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삶은 실시간으로 창조되고 있습니다.
정말 경이롭지 않은가요?
여기서 잠깐!
유의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운명태는 자신을 관철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운명의 흐름에 걸맞은 선택을 유도합니다.
즉 운명태는
자유의지를 종속시키고, 빨아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한 운명태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무의식적인 선택을 인지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그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배워왔죠.
그런데 과연 운명은 바꿀 수 없을까요?
운명은 바꿀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각 운명태의 내용은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 운명태의 내용을 내 입맛대로 개조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의 운명태는 그 자체로
고유하고 완전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이미 확정된 운명태의 내용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미술관에 걸려 있는 완성된 작품을 훼손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렇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하는 사람은
완전한 창조물을 훼손하는 대가로
고통을 돌려받게 됩니다.
하지만 운명에 저항하지 않고
그저 단순히 다른 운명을 선택한다면
우주라는 미술관에 걸려 있는 운명태라는 작품의 내용을
뜯어고치려고 할 게 아니라
그저 내 마음에 드는 다른 그림, 다른 운명태를 선택한다면
그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제 운명을 바꿀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현 운명태의 스토리가 마음에 안 든다면
이미 정해진 현 운명태의 내용을 바꾸려고 할 게 아니라
그냥 다른 내용으로 정해진
다른 운명태를 선택하면 되는 겁니다.
이미 완성된 호박 그림을 수박으로 바꾸겠다고 줄을 긋느냐?
아니면 단순히 수박 그림을 선택하느냐?
주어진 것에 저항하느냐?
단순히 다른 것을 선택하느냐?
여기에서 인생 게임의 난이도가 크게 갈립니다.
플레이어로서 삶을 창조해 나가려면
운명대로 흘러가도록 선택을 유도하는
운명태의 영향력에 맞서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다만 고요히 중심을 잡고
깨어 있는 의식 상태로 선택할 자유를 발휘해야 합니다.
다른 운명태를 선택할 자유를.
그럼 선택할 자유를 통해서 다른 운명태로 갈아타는 방법은 뭘까요?
이미 그 운명태의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그 운명태가 나의 예정된 운명이라는 전제하에
올라올 법한 감정을 느끼는 겁니다.
다른 가능태로 접속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상상력과 느낌이기 때문이에요.
왜 상상력과 느낌이 다른 운명태로 갈아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가?
모든 상은 창조되기 전에 상상력이라는 단계를 거칩니다.
한 번도 상상되지 않은 것
한 번도 생각되지 않은 것은
절대로 창조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신을 닮은 꼴인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도
물질화되기 이전에
생각의 형태로 먼저 창조되어야만 합니다.
한 번도 생각되지 않은 것을 창조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붙들 수 있는 모든 것은
텅 비어 있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상은 본질적으로 텅 비어 있는 허상입니다.
본질적으로 텅 비어 있는 공허한 우주를
눈에 보이는 생생한 실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의식과 상상력입니다.
즉 이 우주는 거대한 의식의 상상력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가장 본질적인 차원에서 유일한 창조력은 [상상력]이고,
상상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실재는 [느낌]입니다.
상상 속에서 바라본 상은 [의식 차원]에서 실재하게 되고,
상상 속의 상황을 느끼면 그 상은 [감각 차원]에서 실재하게 됩니다.
상상과 느낌을 통해서 의식과 감각 차원에서 실재하게 된 것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현실의 단단한 상으로 물질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우주상의 모든 것들이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창조됐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운명태에서 다른 운명태로 넘어가려면
상상력을 발휘해서
다른 운명태 속의 상을 보고 느껴야 하는 겁니다.
한 번도 생각되지 않은 것은 창조될 수 없고
창조된 모든 것들은 최초의 생각 형태에서 탄생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
핵심만 빠르게 요약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인생 게임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플레이어다.
컴퓨터 게임을 플레이하는 걸 생각해 보자.
우리는 캐릭터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동시에 캐릭터의 행동을 조종한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이라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에고 관찰자임과 동시에
참여자인 우리는
인생게임의 시나리오를 유연하게 바꿔갈 수 있다.
모든 것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상대성이론과
모든 것은 확률로만 존재할 뿐이라는 양자역학이
유기적으로 공존하며 하나의 우주를 설명하고 있듯이
운명과 자유의지 역시
유기적으로 공존하면서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다.
운명은 1개로 정해져 있지 않고 무한한 개수로 정해져 있다.
게임 시스템상의 시나리오처럼 무한한 개수의 운명태는
지금 이 순간,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운명태들은
내가 선택하면 언제든지 플레이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로
이미 다 완벽하게 창조되어 있지만
선택을 내리기 직전까지는
각각의 운명태들은
그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
내 앞에 어떤 운명태가 펼쳐질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을 내리기 직전까지
나의 미래는 언제나 불확정 상태로 존재한다.
무한한 운명태들 중 하나를 선택하고
또다시 무한한 운명태들 중 하나를 선택한다.
운명태를 선택하기만 할 수 있는 자유의지와
선택이 되어야만 비로소 플레이되기 시작하는 운명태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삶은 실시간으로 창조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전지전능한 자유의지가 아니라
선택할 자유에 가깝다.
어떤 운명태를 선택할지는 자유지만
그 운명태가 어떠한 과정으로 전개될지는 나의 권한 밖이므로
선택할 자유를 이용해서
최종 결과가 이미 이루어진 운명태를 선택하고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은
운명태의 자체적인 알고리즘에 맡겨야 한다.
주의할 점!
각각의 운명태는
자유의지를 종속시키는 힘을 가지기 때문에
운명의 흐름을 따라가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다.
자유의지를 빨아들이는 한 운명태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불러왔다.
또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도 배워왔다.
하지만 진실은
운명은 바꿀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바꿀 수 있다.
각각의 운명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한 운명태의 세부 내용을 멋대로 바꿀 수는 없지만
그저 단순히 다른 내용으로 정해진 다른 운명태를 선택할 수는 있다.
하나의 운명태를 붙들고
정해진 내용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은 저항이고
무한한 개수의 운명태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눈을 돌려서
다른 내용으로 정해진 다른 운명태를 선택하는 것은 창조다.
우리는 저항하기가 아니라
창조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그 창조 기법을 자세히 알려주는 것이
바로 끌어당김, 네빌링, 트랜서핀, 시크릿 등등의 목적이다.
플레이어로서 원하는 삶을 창조해 나가려면
운명대로 흘러가도록 선택을 유도하는 운명태의 영향력 속에서
고요히 중심을 잡고 깨어 있어야 한다.
운명과 자유의지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삶이 실시간으로 창조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운명태를 선택할 자유를 발휘하자.
선택할 자유를 통해서
다른 운명태로 접속하는 방법은
상상과 느낌이다.
이미 그 일이 진행되고 있는 시공간 속에 있다는 전제하에서
느낄 법한 감정을 느끼기
그리고 그 느낌을 계속 유지하기.
왜 상상력과 느낌이 키 포인트인가?
모든 창조의 근원은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라는 창조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확물인 느낌을 지속한다면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상은
현실이라는 단단한 상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텅 비어 있는 원자로 구성된 우주 만물들을
생생하게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우주의 창조 원리이기 때문에.
“현실은 시뮬레이션 게임이다”라는 말 속에는
운명과 자유의지가 유기적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지만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운명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양극단의 늪에 빠져버린다.
현실이라는 경이로운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운명과 자유의지가 유기적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운명태를 선택할 자유를 마음껏 활용하자.
그렇게 무한한 운명태 사이를 부드럽게 옮겨다니며
현실이라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겁게 만끽하자.
운명과 자유 위주의 공존성을 알고 있는 영혼들 중에서도
내맡기는 삶과 적극 창조하는 삶
파가 갈립니다.
모든 운명태가 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이기 때문에
어느 운명태가 다른 운명태보다 더 낫다라고 분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영혼은
내맡김을 중시하게 되고
의식은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세세생생 계속 이어질 것이기에
죽음이라는 것은 없고
단지 무한히 이어지는 체험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무한하게 이어질 체험 속에서
자신이 느끼기에 조금 더 즐거운 운명태를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영혼은
의식적으로 창조하는 삶을 중시하게 됩니다.
결국 운명태라는 작품의 완벽함을 존중하느냐
작품 감상자의 즐거움을 더 존중하느냐
관점의 차이일 뿐,
내맡김이 옳다 아니다. 적극 창조가 옳다
왈가왈부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본질을 다 알고 나서
자연히 내맡기게 되는 영혼이 있고,
본질을 알고 나서
자연히 적극 창조하는 삶을 살게 되는 영혼이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는 적극 창조하다가 내맡기다가
다시 적극 창조하는 삶으로 뛰어들 수도 있고,
내맡기다가 적극 창조하다가 다시 내맡기게 될 수도 있어요.
삶은 변화무쌍하고
가능성은 경이로울 만큼 무한하기 때문에
어디에도 정답은 없습니다.
삶이라는 체험을 즐기는 방식에까지
정답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맡김에 이끌릴 때는 내맡기고
적극 창조에 이끌릴 때는 적극 창조에 몸을 맡깁시다.
다만 내맡기는 삶을 살든
적극적으로 창조하는 삶을 살든
어느 경우든 간에
깨어 있는 의식을 통해서 선택할 자유를 현명하게 활용합시다.
모든 또 다른 나들이
현실이라는 경이로운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
각자만의 방식대로 삶을 즐기기를.
언어 체험 방식이 더 옳고 그르다는 일말의 분별심마저도 내려놓고
그저 가슴이 이끌리는 체험 방식을 따라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모두 행복합시다, 그리고 즐깁시다, 가볍게
이상 진쏠미였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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