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1933년 1월
총리 자리에 오르고 권력을 잡음으로써
마침내 자신이 꿈꿔오던 바를 달성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자리에 오른 히틀러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1920년대 말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로 치솟은
독일의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대공황의 여파로
1927년 100만 명 정도에 머물렀던 실업자의 숫자가
1932년이 되면 무려 600만 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업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히틀러가 생각해 낸 방법은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독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인
자동차 전용도로, 즉 아우토반은
히틀러가 공사를 시작한 대표적인 분야였습니다.
히틀러는 이런 대규모 인프라 공사의 인력을 동원함으로써
일자리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우토반 말고도
히틀러가 매우 많은 신경을 쏟았던 공사 분야가 또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 북쪽, 북해 지역에 대한 간척 사업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마자
곧바로 함부르크 북서쪽에 위치한 디트마르센이라는 곳에
1300헥타르에 달하는 간척 공사를 명령했고
이 지역의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 간척지’로 바꾸었습니다.
나치 어용 신문들은 히틀러가 공사 현장을 방문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공사 지역에 히틀러 본인의 이름을 집어넣고
나치 언론이 공사 현장을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보도한 것은
간척 공사가 히틀러와 나치에게 있어
순수한 경제적 사업을 넘어서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지 네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34년 5월부터
북해 지역에 1만 명 정도의 인력을 동원해 공사를 시작했는데
공사 현장에서 돈을 받고 일을 하게 된 이들의 대부분은
대공항의 직격탄을 맞고 실업 상태에 빠진 이들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간척 사업이 중점적으로 진행된 함부르크 지역은
지난 선거에서 나치에 대한 지지율이 특히 높았던 곳이었습니다.
즉 히틀러는 여러 후보군들 중에서
자신에 대한 지지율이 높았던 지역에 대한 공사를
가장 먼저 시행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함부르크 인근 북해 지역의 간척 사업은
히틀러가 자신의 주 지지층에게 준
일종의 시대적 보상이었던 셈입니다.
이는 나치를 지지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공사에 동원되는 이들이 선발되었고
특히 공사 현장에서 책임이 있는 높은 자리는
나치의 당원이거나 단순 지지자를 넘어서는
당과의 인맥이 있는 인물들이 맡았다는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앞서 언급되었던 아돌프 히틀러 간척지는
일련의 대규모 공사의 시작에 불과했는데
나치의 관료였던 힌리히 로제라는 인물은
“간척 사업을 위한 총계획에 따르면
우리는 북해 지역에 1억 5천만 제국마르크를 투자해
총 43개가 넘는 새로운 간척지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간척지들에는
히틀러 말고도 헤르만 괴링을 비롯해
나치의 유명 지도자들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한편, 일단 공사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간척 사업을 통해 새로 생기게 된 토지는
나치에게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나치의 어용 언론들은
“아돌프 히틀러 간척지는 평화로우며
또한 평화를 사랑하는 나치의 땅 정복의 자랑스러운 시작이다”라고 홍보했는데
이를 시작으로 나치 시기의 언론들은
간척지를 독일이 새로 건설할 민족 공동체의 모범적 형태라고 표현했습니다.
새로 생긴 토지를 바라보는 이런 시각은
이곳으로 이주할 정착민들을 선발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로 자신이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이만이
자격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많은 경우에
나치 지지자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한 소규모 간척지에는 92개의 가구가 새로 입주했는데
이 중 91개의 가구가 나치당원의 가구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치 당원이나 지지자를 중심으로 입주민을 뽑은 것에는
또 다른 의도도 있었습니다.
나치 언론들은 간척지를 새로운 민족 공동체라고 표현했지만
히틀러와 나치는 이 지역들을
사실상 새로운 나치 공동체로 만드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치는 마을의 언덕 위에 교회를 떠올리게끔 하는
노이란트할레라는 이름의 건물을 만들고
이곳에서 나치의 각종 주요 행사는 물론, 학교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히틀러의 동상이 세워진 것은 물론
나치의 자료를 보관하는 나치 도서관도 이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 건물에는 “피와 땅이 독일 국가의 근본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나치가 간척지를 바라보는 시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기존의 관습 없이 새로 생겨난 토지에서
나치가 일종의 반교회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역사학자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새로 공사를 통해 얻은 간척지를
민족과 나치의 공동체라고 선전한 것은
독일 국내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나치는 간척지 공사를 자신들의 업적이라고 생각해
국제적으로도 널리 홍보했는데
그 결과 아돌프 히틀러 간척지에만
매일 수십 대의 버스에 탄 외국인 관객들이 방문했습니다.
인근 나라인 덴마크, 프랑스, 폴란드 등을 넘어서
일본에서까지 관심을 가진 이들이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나치는 몇 년 후 이미 내부적으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외부적으로는 간척지를 자신들의 평화로운 정복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홍보했는데
이는 간척지가 나치의 외교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단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간척지에 대한 기존의 지원이 대부분 끊겼다는 것도
역설적으로 간척지에 대한 공사가
히틀러의 진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이 때문에 독일의 역사학계에서는
나치 시기의 간척 사업을
국제적으로 “주의를 혼란시키기 위한 술수”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한편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북해의 간척지들에서는 나치의 흔적들이 대부분 제거되었습니다.
히틀러나 괴링과 같이 낯을 연상시키는 지역의 이름들은
모두 기존의 전통적인 지명으로 다시 바뀌었고
히틀러의 동상은 파괴되었습니다.
노이란트할레라는 이름의 나치 건물도
전쟁 직후에는 마을회관으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에는 교회가 운영하며
청소년의 활동을 지원하는 건물로 그 목적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치의 흔적을 지운 것은
나치의 범죄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단순히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언론에 의해 더 이상 조명되지 않는 간척지에 대한 관심은
전국적으로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사정은 무려 2011년
적자에 시달리던 지역의 교회가
더 이상 노이란트할레의 보수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서야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비용이 부담스러웠던 교회는
건물을 헐어버리겠다고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잊혀졌던 이 지역이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건물을 철거하는 대신
나치의 만행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기념물을 설치하자는 제안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아 실행되었습니다.
사실 나치와 관련된 다른 여러 분야들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는데
바로 전쟁 직후 곧바로 나치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잊혔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간척 공사라는 일견 특수해 보이는 분야도
나치의 집권과 패망
그리고 이에 대한 과거사 청산이라는
큰 역사적 흐름과 그 맥락을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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