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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세계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어떻게 지어지고 파괴되었을까?

Buddhastudy 2024. 9. 19. 19:15

 

 

기원전 4세기 후반 아테네 지역에서는

데메트리오스라는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로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밑에서 공부하다가

철학을 벗어나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스승이 사망한 이후 기원전 317년부터 307년까지

10년간 아테네의 통치를 맡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이후

정치적으로 반대파에게 패배하여

반강제적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같은 그리스 지역 안에 테베라는 곳으로 망명을 떠났지만

머지않아 적들을 피해 이집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데메트리오스는 이곳에서

당시 이집트의 통치를 맡고 있던

일명 구원자라는 별명으로 역사의 이름을 남기게 될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만나게 됩니다.

 

이집트로 망명을 온 데메트리오스는

정치에서 한 발짝 떨어져

한때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졌던 목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표는 바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한 장소에 보관해서

열람, 연구, 그리고 교육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도서관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살아생전에 이런 원대한 이상을

제자들에게 제시한 적이 있었는데

제자들은 당시까지만 해도

구체적 계획은 없는 막연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이상에 매료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원전 288년경

데메트리오스는 이집트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로 하여금

알렉산드리아에 이런 도서관을 건설하게끔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우리가 흔히 알렉산더 대왕이라 부르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기원전 331년 설립되었던 도시였는데

설립 이후 지중해 지역을 통틀어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을 정도로 번성했습니다.

 

게다가 도시에서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는 설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중해 지역에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 안에서도

무세이온의 주위에 도서관을 짓도록 했는데

무세이온은 역사와 시, 그리고 예술을 권장하는 여신들의 전당이면서

동시에 이후 박물관이라는 단어

뮤지엄의 어원이 됩니다.

 

이렇게 도서관 건설을 허가받은 데메트리오스는

당시까지만 해도 구전으로 전승되는 경우가 많았던 여러 분야의 지식을

글로 정리해서 복원하고자 했습니다.

 

게다가 데메트리오스로부터

도서관 건설을 제안받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곧 이 도서관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는데

바로 당시로서는 유례 없던

무려 50만 개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도서관에 모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를 통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보관하고 있다는

자신의 정치적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고

이를 위해 주변에 있는 모든 통치자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를 통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글을 구매한 후

복사해서 돌려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지역에 있던 도서관들의 소장품들을

통째로 배를 통해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일단 책들을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온 후 갑자기 입장을 바꿨습니다.

원본을 자신이 보관하고

복사한 글을 원래의 소유주들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기원 후 2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5년 정도 머물렀던 갈레노스라는 의학자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사후

프톨레마이오스 2세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책을 모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래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그리스 작가들의 비극 작품의 원본을 모으고 싶어 했는데

이 원본들은 아테네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그는 복사를 위한 일종의 보증금 개념으로

15달란트의 돈을 아테네인들에게 지급하고

원본들을 아테네에서 빌려왔습니다.

 

그러나 복사를 마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역시 원본을 자신이 가지고

복사본을 아테네로 돌려주며

보증금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처할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아테네인들은

결국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연 결과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목표로 했던

50만 개의 파피루스를 대도서관에 모았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원본 작품들을 뺏어온 프톨레마우스 왕조의 왕들에게도

고민은 있었습니다.

인쇄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바람에

같은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가져온 장소에 따라서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존재했던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이를 제대로 검증하고, 원본을 정확하게 복사하고, 복원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각 분야에 정통한 대규모의 지식인들이 고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로 유명한 호메로스의 작품들의 경우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각 필사본에는

서로 다른 문장이나 내용이 발견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고용된 지식인들은

여러 지역의 판본을 하나하나 비교해 보고

원본에 가까운 것을 가려낸 후

이를 필사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따라서 프톨레마우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설은

결과적으로 단순히 각 지역의 책들을 모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식인들이 모여 원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필사가 아닌 지식, 체계, 어휘,

그리고 문법 등의 정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한편 도서관이라 불리기는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현대 시대에 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서관과는 그 모습이 조금 달랐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도서관을 떠올릴 때

이용자들이 최대한 조용하게 책만 읽는 모습을 생각하지만

이는 서양에서 중세 이후 생겨난 풍습입니다.

 

고대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큰 목소리를 내며

글을 읽는 모습이 일상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는

오늘날의 도서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열람실 자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소리 내서 글을 읽었고

걸으면서 혹은 여러 사람이 모여

큰 목소리로 토론하는 모습도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리

도서관 건물 자체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기록이 거의 남겨져 있지 않습니다.

 

몇 세기 후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였던 스트라본이라는 인물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 ,

자신이 본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여기에도 역시 도서관 인근에 무세이온에 대한 묘사만 있을 뿐

도서관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스트라본은 무세이온을 가리켜

무세이온은 왕의 궁전의 일부이다.

여기에는 회랑, 대화실, 그리고 큰 방이 있으며,

안에서 지식인들이 함께 식사를 한다라고 묘사했지만

도서관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의문을 가진 일부 역사학자들은

스트라본이 묘사하는 풍경이

사실은 도서관의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이후,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이어

세라페온이라고 하는 건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곳 역시 책을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에 가까웠지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비교해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는 달리 세라페이온에는

신분의 제한 없이 누구나 입장하고 책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허가를 받은 지식인들만이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큰 변화였습니다.

 

몇몇 지식인들만이 이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출신 신분이나 지역에 상관없이

원하는 이는 누구나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다른 이들과 공개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알렉산드리아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지중해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설 과정과는 달리

도서관이 파괴되는 과정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하나의 사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파괴되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우선 기원전 47년 이곳에서 일어났던 카이사르의 전쟁에 의해

처음으로 도서관의 일부가 피해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졌던 한 전투 과정에서

카이사르가 배에 불을 지르는 전략을 선택했는데

이 과정에서 실수로 도서관에 불이 옮겨붙었던 것입니다.

 

이때의 사고는 실수에 가까웠던 반면

이후 391,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던 테오필로스 1세가

이교도의 신전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한 것은

의도적인 파괴에 가까웠습니다.

이 명령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세라페이온 역시

결정적인 피해를 받았습니다.

 

이후 640년경, 이슬람교의 칼리파였던 우마흐 이븐 알카타브가 남긴 말이

전설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는 도서관에 남겨져 있던 도서들을 가리켜

책들의 내용이 알라의 말씀과 일치한다면

즉 쿠란의 내용과 일치한다면

내용이 일치하기 때문에 쿠란으로 충분하다.

반대로 책들의 내용이 쿠란의 것과 다르다면

책들을 남겨놓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어느 경우든 책을 파괴하라고 말하며

책을 도시 난방을 위한 땔감으로 썼다고 전해집니다.

 

이에 6개월 내에

도서관에 그나마 남겨져 있던 대부분의 도서들이 불탔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오직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만이 불타지 않고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이후 중세 시대에 이슬람과 기독교 양쪽 운명 모두의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남길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