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을 보는 것의 중요성:
실상을 보려면 허상의 세계,
즉 분별하는 생각, 감정, 느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01:29].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는 것은 언어적 한계를 넘어선 경험이며
관찰자의 의식이 중요합니다 [02:17].
중도:
중도는 있음과 없음
즉 색과 공을 자신이 결정하고 이해하는 자리이며
이는 양자물리학의 이중슬릿 실험과도 일맥상통합니다 [02:42].
의식 분리:
몸과 마음에서 의식을 분리해 내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허상에서 벗어나 실상을 인지하는 과정입니다 [04:03].
관념의 연속성:
우리는 관념의 연속성 때문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이는 중독과 같은 습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듭니다 [06:31].
성각자들의 경험:
칼 융, 버트란트 러셀, 토마스 머튼, 슈바이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사도 바울 등
여러 성각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표현했는지 소개합니다 [09:02].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과의 일체감, 생명의 본질,
그리고 모든 존재의 평등함을 강조했습니다.
결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실상을 봐야 하며
이는 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관념을 버리고 무심한 상태에서 생명의 리얼한 소식을 경험해야 합니다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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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뭐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거잖아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뭐예요?
깨어나는 거예요.
왜?
실상을 보는 게 깨어나는 거잖아.
아까 제가 그 얘기를 했잖아요.
어렸을 때 입양이 됐든
아니면 집을 부모를 잃어버렸던 간에
부모님을 다시 만나는 게 관계 회복 아니에요?
그럼 우선 얼굴을 봐야 될 거 아니야.
그 여기 어느 분인가
내가 언제 한번 글 쓰신 것 중에 그런 기억이 나.
어렸을 때 어머니하고 헤어졌는데
근데 나중에 공항에서 멀리서 봤는데도
말도 아직 아닌데도 당장 알아보겠더라고.
그렇게 자기가 알아봐야 돼요.
보이지 않는 걸 알아봐야 돼.
아니 여러분
길 가는 사람 중에 “저 사람이 내 엄마구나”, 보여.
엄마라고 꼬리표 달고 다녀?
아니잖아요. 근데 알잖아.
여러분 안에는 진짜 엄마를 알아볼 눈이 있어요.
진짜 부모님을 알아볼 지혜가 이미 있다고.
왜?
자기가 거기서 나왔는데
자기가 실상인데 왜 실상을 몰라볼까?
허상을 너무 의지하고 있으니까 아직 모르는 거지
허상을 다 내려놓으면 실상을 바로 알아봐요.
그래서 실상을 보려면
허상의 세계에서 먼저 벗어나야 되는 거예요.
허상의 세계에서 먼저 벗어난다는 게 무슨 말이냐면
자기가 분별하는 생각, 감정, 느낌이 만든
그런 온갖 분별들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있는 그대로’ 뭐 ‘무위로 있어라’라든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든가
이런 말들이 있는 이유가 그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말해봤자
그건 깨닫고 난 사람이 하는 말이지
여러분들은 그 말을 의지해서 깨달을 수는 없어요.
왜 그런지 알아요?
여러분들은 언어의 자기 주관적 한계성
언어의 주관적 구속성에 갇혀 있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있는 그대로’ 하면은
‘그냥 이렇게 있는 그대로지 뭐’
이러니까 벌써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있는 그대로가 아니거든.
부처님이 열반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중생은 있음의 병에 걸려 있다.”
중도라는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다 없다는 네가 결정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양자물리학에서
이중슬릿 실험을 통해서전자 하나를 쏘는 이게
-어떤 때는 입자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파동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뭐야?
관찰자의 의식 때문에 그렇다는 거 배웠잖아요.
그건 뭐냐 하면 파동이 되면 없다야
입자가 되면 있다야.
그걸 네가 결정한다는 거예요.
이거를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말한 거야.
무슨 말이냐면
내가 없다고 하면 색이 공이 되는 거야.
또 파동인 거를 감을 잡으면 없는 게 있는 거가 되는 거야.
그러면 중도라는 건 뭐예요?
“이 없다 있다라는 걸 내가 보고 결정하는 거구나”라는
이 자리를 아는 게 중도야.
아주 과학하고 앞뒤가 딱 맞아요, 불교는.
제가 마스터 과정에서 하는 게 뭐냐 하면
여러분한테 새롭고 놀라운 걸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서
의식을 분리해 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한마디로 몸과 마음이라는 게
허상을 갖고 자꾸 있다고 착각하는 그거를
분리해 내고 세탁하는 거야.
여러분 영화를 볼 때 봐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 있는 거야? 아니면 다 환영이야?
환영이지만
여러분은 그거 보면서 있다고 그러잖아.
있다고 그래야 재미있지
그걸 없다고 그러면 무슨 재미로 봐. 안 그래요?
연속극도 마찬가지고
다 있다고 그러잖아.
근데 텔레비 그거 실상은 뭐냐 하면
텔레비 화면에 전자파 부호가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이에요.
안 그래?
근데 그걸 있다고 왜 하지?
자기가 색이라고 했기 때문에
색이 뭐죠?
분별
색은 물질이 아닙니다.
색을 물질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에 못 깨닫는 거예요.
색은 분별이야.
공은 뭐예요?
분별하지 않는 거고.
이미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의식 자리는
그게 이미 중도야.
자기가 있다고 보면 있게 되고
없다고 보면 없게 되는, 관찰자 의식이라고요.
근데 여러분
지금 내가 여러분 앞에 있어요? 없어요?
있죠?
어떻게 했지? 내가 어떻게 했냐고.
여러분들이 자기 마음속에
나를 있다고 지금 믿고 있어요, 생각과 느낌으로.
그래서 있는 거예요.
근데 만약에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이
집에 가스 불을 켜놓고 왔어.
그 위에서 찌개가 끓든지, 빨래 삶고 있든지 지금 하는데
어 깜빡 잊었다.
이거 큰일 났네.
집에 불나면 어떡하지? 저거 타면 어떡하지? 비싼 옷인데...
지금 눈앞에 뭐가 막 끓고 있고
거기 집어넣은 내용물이 뭐다
막 이런 게 지금 눈앞에 이미지로 떠올랐을 때
내가 보여요?
그게 먼저 보이잖아.
이 세상의 실체가 그러하다라는 거예요.
아닌 것 같지?
여러분은 자기가 가진 마음의 관념 연속성
1초 전에 보고 지금 딴 생각하다가
또 1초 후에 보고
이러면서 관념 연속성이
없는 거를 있는 것처럼 자꾸 만드는
환상에 속아서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하루에
자기 몸을 몇 번 의식할 것 같아?
천번 의식할까?
천 번 안 돼요.
내가 볼 때 100번을 겨우 넘을까 말까 일 거야.
그럼, 나머지 시간은 뭘까?
텅 비어 있어
무분별한 상태에 나는 허공이라고, 이미 공이야.
그런데 그걸 몰라보고
있는 거를 자꾸 관념 연속성으로 붙들어서
내가 있다고 믿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못 보지.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거는 심하게 중독된 습관이에요.
그 중독된 습관에서 헤어나는 게 너무 어려운 거야, 중생은.
부처님이 이걸 보신 거고.
이걸 비유하자면
비행기가 하늘로 뜨기 위해서는
로케트가 이 중력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지랄을 해야죠.
여러분 잘 봐, 비행기 뜰 때 지랄 안 하던가?
그게 지랄이야, 별게 지랄이겠어요?
근데 왜 여러분들이
“공부했는데 진척이 없어요, 마스터 재수강해야 되겠어요”
이런 소리를 나한테 왜 하는지 알아요?
지랄을 안 했기 때문이야.
열심히 안 했기 때문이라고요.
자꾸 자기의 업습에 또다시 돌아오니까
비행기가 어떻게 되는 거냐?
뜨려고 그러다가 또 활주로이 앉고
뜨려고 그러다가 또 앉고
활주로가 도대체 길이가 얼만데 아직 그러고 있는 거야?
좀 있으면 저기 가서 꽝 하겠네.
하려면 집중해서 제대로 해야죠.
누구는 마스터 한 번에 깨났는데
누구는 자꾸 안 된다고 재수강하겠다고 그러고
삼수하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그거 보면 참 복창 터지는 거야.
자, 그래서 선각자들이 봅시다.
선각자들이 고백한 하나님의 관계
근세 유명한 그 심리학자인 칼 융은
“나는 내 속에 하나님의 일부분인 하나님의 조각인 면이 분명히 있다.
나는 그거를 확신한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칼 융은 대학에서 잘렸어요.
신성 모독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얼마나 그 왜곡된,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지 알겠죠?
나하고 신은 완전히 비교도 할 수 없는데
어디 내 안에 신이 있다라는 거냐? 미친 놈 아니냐?
그렇게 핍박받은 사람이 또 있어요.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도 심지어 그 사람이 쓴 책은
<나는 왜 크리스천이 아닌가?>라는 책이 있어요.
그거 한번 읽어보세요.
그 책은 예수를 부정한 게 아니고
예수를 믿는 방식이 잘못됐다, 라는 걸 쓴 책이에요.
그런데 미국의 그 수많은 철학과 신학대학에서
하나같이 버트런드 러셀을 정죄하고
자기들끼리 다시는 저 사람을 교수로 받지 말자고 그렇게 단언까지 했어요.
그 책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면 일반인 여러분이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상상을 초월한 얘기들이 있을 거예요.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그러니까 우리는 세뇌돼 있는 거예요, 세뇌.
여러분 잘 생각해 봐.
매일같이 이렇게 똑같은 얘기 듣고, 계속 노래 부르고
“내게 강 같은 평화” 하면은
그때는 세뇌되거든, 또 그 여러 군중 심리 속에서.
근데 문제는 이게 오래 안 간다는 게 문제야.
뭐 집에 왔더니
애가 다쳤어요, 신랑이 회사에서 잘렸어요.
온갖 일이 다 일어나잖아요.
그럼 그때 강같은 평화는 어디로 갔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실상을 봐야지.
너무 답답해서 하는 얘기예요.
또 토마스 머턴, 이분은 천주교 신부님이십니다.
이분은 루이빌이라는 곳에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카페에 앉아 있는데, 자기 앞에서 차 마시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속에서
갑자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본 거예요.
어떻게 임재했어?
생명으로.
그러면서 그 사람이 그때, 그 순간에
그냥 과거에 자기가 죽어버렸대요.
어떻게 죽었나?
내가 여태까지
사람의 외모와 옷차림과 그 사람의 교양스러운 언어로
사람을 분별하고, 누구를 대접하고, 누구를 무시했던
나도 모르게 그런 짓을 했던 내가
그 순간에 죽어버렸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해져 버렸다는 거야.
내 앞에서
평등지가 열린 거야.
왜?
생명을 봤기 때문에.
슈바이처 박사님이 아프리카 가서
내가 우리 사이트에도 오래전에 그거를 썼어요.
슈바이처 전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제목에 아마 ‘슈바이처가 만난 하나님인’가 내가 그렇게 썼을 거야.
나중에 한 번 시간 나면 읽어봐요. 찾아보면 나올 거야.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오지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
잠배강인가 무슨 강을 가는데
그때 자기가 무심하게 그냥 풍경을 보고 가다가
갑자기 자기 안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확 들어왔대요.
뭐냐 하면
그 큰 강에 하마들이 막 물속에서 이렇게 뛰놀고
또 그 옆에는 애들이 수영하며 깔깔거리고
또 저기 장엄한 숲 뒤에는 새들이 날고
이런 게 한눈에
이거 전부 다 생명 아니야.
갑자기 그리고 이 생명을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생명이
섭리로서 그냥 자기 가슴으로 그냥 확 들어오는데
할 말을 잃었다는 거예요.
그전에는 슈바이처는
‘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가서 희생하고 봉사하리라’ 하고 왔다가
그날 그 순간 슈바이처도 자기 전기에 그렇게 썼어요.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날 그 순간부터 나는 그분의 도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냥 이 작은 기술 하나 가지고, 의술 하나 가지고
이 놀라운 생명들의 편안함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말없이 봉사하는 손이 되겠다.
이게 일순간에 자기 안에 화살처럼 와서 꽂히더라는 거예요.
하나의 깨달음으로.
그렇게 해서 쓴 글이
생명의 경외 뭐 이런 수필이 있어요.
<생명에의 경외>
여러분 아마 중고등학교 때 배웠을 거야.
슈바이처 박사가 하신 말씀은?
사지 선다형으로도 나와 시험에
생명에의 경외.
누구나 깨어난 사람들은 다 똑같은 걸 봐요.
뭘 보나?
생명을 보는 거야.
그런가 하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이 사람은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인데
“내가 신을 자꾸 보는 눈이
곧 신이 나를 보는 눈이다.”
우리 둘은 일심동체라는 거예요, 신과 나는.
또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어요?
예수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다 보니
“이제 나는 없어졌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분의 정신만이 살아서 나를 움직이고 계신다.
나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여하튼 그러니까 핵심은 뭐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실상을 봐야 돼.
실상을 본다는 것은
-생명을 본다는 거예요.
-그거를 관념을 갖고 보는 게 아니라
-나를 완전히 무심하게 텅 비어놓은 상태에서
생명의 진짜 리얼한 이 소식이 그냥 나를
어떻게 해야 되나?
뺨을 후려쳐야 돼. 정신 차리라고.
여러분 그렇게 깨 나셔야 되는 거야.
이건 말로 전달할 수도 없고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안 돼.
근데 한 번에 그 영혼에 대한 갈김으로 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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