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공포와 쾌락은 연결되어 있다

Buddhastudy 2023. 9. 18. 19:29

 

 

공포도 쾌락도 기억에 의존하는 사고 과정의 산물이다.

생각이 정지하지 않는 한 공포를 없앨 수 없다.

생각의 정지는 억지로 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 과정을 생생히 바라볼 때

사고 과정은 멈추게 된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는 공포뿐만 아니라

쾌락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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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공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는 모두 공포를 느끼죠.

또 공포라고 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또 생존에 기여하는 바도 있기 때문에

공포라고 하는 것은 양날의 칼과 같이

좀 불편하긴 하지만 또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 공포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공포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로운 거죠.

공포가 지나치면은 심리적으로도 그렇고,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저는 특히 육체적인 반응이 강하게 오더라고요.

또 사회적으로 관계도 좀 어려워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흔히 말하는

뇌의 혈액이 대뇌 피질에서 변연계로 몰리면

IQ가 낮아진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이나 공포라고 하는 감정에 사로잡히면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도 있고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공포라고 하는 것은 그가 잘 다루어야 할 물건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근데 우리가 공포라고 하는 것과 지혜라고 하는 것을 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둘 다 민감하게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인데

이 공포라고 하는 것과 지혜라고 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공포라고 하는 것은 기억과 관련된 감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즉 내가 미래의 어떤 일에 대해서 공포스럽게 느낀다고 하는 것은

그걸 분석해 보면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죠.

과거에 어떤 나쁜 일이 있었구나

책을 봤거나 드라마를 봤거나

과거의 고통스러운 일이 미래에 또다시 그런 비슷한 것이 일어날 거라고 상상되는 것

그게 사실은 공포의 심리적인 모습이거든요.

그게 두려움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이 미래의 두려움이 되는 것이죠.

 

확실한 것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할 수는 없다라고 하는 것이죠.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는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자기가 갖고 있는 최대한의 두려움을 상상해서

모르는 속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니까

공포는 명백하게 심리적 차원의 문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공포는 단순한 기억뿐만 아니라

기억을 가공하거나 부풀리기도 하죠.

기억을 기반으로 해서 상상하거나, 부풀리거나, 판단하거나, 유추하는

사고의 전체 과정이 공포를 어떻게 보면 만들어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생각이 공포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공포 말고 수백만 년 동안 생명체가 살아왔던

어떤 생존의 지혜라고 하는 것도 있을 텐데

그것은 무엇일까?

 

그거는 뭐 명백하게 변연계의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신경계죠.

직접적인 위협에 대한 신경계의 자동 리액션, 정도가 되겠습니다.

뱀 보면 그냥 피하고

자동차가 달려오면은 저 자동차가 역주행을 하든 뭘 하든 난 우선 피하고 보지 않습니까?

그건 리액션이죠.

이거는 사고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다.

 

기억과기억이 주는 상상과 유추, 논리적인 결론

이런 걸 따르는 것이 아니고

반사 행동에 가까운 것이죠.

이건 편도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먼저 행동하고 뒤에 분석한다.

이렇게 되겠습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는

이 세계가 어떻게 생겼고,

유가 뭐냐라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이 독화살을 분석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면

독이 퍼져 죽을 것이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화살을 뽑고 독을 몰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죠.

 

그러니까 이 공포라고 하는 감정도

사고 과정으로 보느냐, 아니면 신경계의 리액션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다르게 공포와 지혜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포라고 하는 것은

심리적 과정이고 사고 과정의 결과물인데

그렇다면은 심리적 공포를 해결하려면

필연적으로 사고 과정을 정지시켜야 된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우리가 너무 두려워서 생각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을 때

우리는 또 기절하기도 하죠, 놀라서.

그런데 기절 말고, 사고를 자의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불필요한 공포 감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한다라고 하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혹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하지만 불확실한

그런 일의 가능성을 이 상상으로 투사하는 것이죠.

그 투사는 기억에 의존하고 있죠.

이미지는 더 강화되고 생생해집니다.

이게 생생할수록 진짜 실감나게 공포스러워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공포라고 하는 것은

아주 정교한 사고 과정의 산물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억지로 말고 자연스럽게 이 사고의 과정이 정지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라고

크리스나무르티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노력하지 않고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뭐든지 원하는 게 있으면 노력해라.

이게 그냥 abc처럼, 룰처럼 되어 있는데

노력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 의지와 의지가 부딪혀서

특정한 어떤 의지를 억압하고 저항을 일으키는 긴장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저항이나 또는 정지하려는 의지 또한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까 이 프레임으로는

공포가 멈추어지지 않는다, 사고가 정지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건 뭔가 하면

생각이 어떤 과정으로, 어떤 방식으로 공포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생각이 왜 공포를 만들어내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서로 의존하고 있는 대립 개념을 찾아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동전은 한 면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지 않습니까?

반드시 그 뒷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포가 일어나는 그 공포 감정의 뒷면을 보니까

쾌락이라고 하는 것이 있더라.

그래서 공포가 마이너스 감정이라고 하면

쾌락은 플러스 감정이고

이 동전의 한쪽이 공포라고 하면

다른 한쪽은 쾌락이더라 라고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과정이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은

생각하는 과정이 쾌락을 만들어내는 것과

어떻게 보면 구조적으로는 같다.

이 두 개가 만나서 제로가 되면

진정한 의미의 공포가, 심리적 공포가 사라진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 공포와 쾌락이

어떤 식으로 연결돼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되겠죠.

쾌락이다 라고 하는 것은

말초적인 쾌락, 피부의 쾌락

그다음에 뭐 먹는 거 보는 거 듣는 거, 다 쾌락이 있죠

 

근데 그게 시간을 투입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때 좋았다 아이가. 그때 좋았잖아.

그러니까 한 번 더 하자 또 되풀이하자.”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공포가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쾌락이라고 하는 것도 그 사고 과정으로 보면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

 

하나는 공포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고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반기는 것이죠.

그 차이가 있을 뿐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라고 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고요.

 

두 번째는 이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반복하기를 원하는 것이죠.

재현되기를 원하는 것이죠.

그게 중요한 속성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쾌락의 효용은 떨어진다 하는 것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직관적으로 그래서 공포와 쾌락은 서로 상관이 있다.

그럼 쉽게 말하면 기대하는 게 없으면 실망도 없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그죠?

나무가 크게 자라면 그림자가 길다.

뭐 이런 음양의 법칙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공포와 쾌락은

하여튼 뭔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공포와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롤러코스터를 타죠.

그러면서 중국에는 공포와 쾌락 모두 우리에게 슬픔이라고 하는 것을 안겨준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경험해 보면

그런 것 같다라는 얘기를 할 수 있겠네요.

 

그렇지만 그래서 또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포도 사고 과정이고, 쾌락도 사고 과정이니까

이 공포나 쾌락이라고 하는 것을 의지로 누른다? 그것도 쉽지 않고

그럼 생각을 끊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것도 쉽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잘못된 길로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 도덕주의적으로 빠지면

나는 쾌락도 공포도 가지지 않겠다라고 해서

쾌락과 욕망을 말살하려고 막 억누르거나 억압하거나 스스로를 야단치거나

이렇게 되면 잘못하면

억눌린 욕망은 우리 심리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무의식에 이렇게 들어가서 다른 식으로 분출되어서 변태가 될 수 있죠.

변태를 낳을 수도 있다.

그건 건강한 것이 아니죠.

 

그래서 어떻게 싸우지 않고 해결하느냐?

어떻게 억압하지 않고 정지시키느냐?

이것이 핵심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쾌락과 공포라고 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고

한쪽이 자유롭지 않으면 다른 한쪽도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방법이 뭐냐?

마음 공부의 핵심은

항상 [조견] 밝게 비추어 보는 거잖아요, 지켜보는 거잖아요.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고

실상을 그대로 생생하게 봄으로써 알아차리는 것

이게 핵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것도 관찰과 이해밖에 없는데.

 

관찰한다라고 하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평가까지 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관찰하는 자가

권위를 가지고, 기준을 가지고 이것저것을 평가적으로 보는 것이죠.

 

그렇지만 관찰자 없이 보는 것

즉 평가하지 않고 보는 것

그것이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것이고

왜곡하지 않는 가장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심리학에서는 관찰자 없이 보는 거

그저 지켜보는 것

그것을 non-judgemental awareness라고 합니다.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시시때때로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non-judgemental awareness

 

이것이라야 평가에 의한 왜곡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평가에 의해서 왜곡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대로

내 기준대로만 보게 되니까

있는 사실을 팩트 파인딩이 어렵겠죠.

팩트 파인딩이 어렵다는 얘기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얘기와 마찬가지가 되겠습니다.

 

판단하거나, 평가하거나, 비교하거나 하지 않고

또 억압하거나, 합리화 하지 않고

나의 마음속을 이렇게 보게 되면

뭐 온갖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내 마음속에 신념도 있고, 선입견도 있고, 굳어진 습관도 있고, 야심도 있고, 비전도 있고

또 남에게 내놓기 부끄러운 마음들도 있고

또 나라고 하는 자아 관념도 있고

또 조금 알량하지만 좀 몇 권의 책을 읽어서 쌓아놓은 지식도 있고

뭐 이렇게 많을 거 아닙니까?

 

하지만 명상을 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그런 막 창고를 뒤지다가 지쳐버리는 마음

그것은 어떻게 보면은 잔뜩 꿈을 꾸는 것과 똑같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잠자는 꿈이나

또 인생에서 꿈, 비전, 드림이라고 하는 거나

다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에 의해서

그것들은 꿈은 사라질 수 있다

꿈은 깨닫고 있는 것이다

꿈은 이루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공부가 된다,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깨어서 꿈을 꾸지 않는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 사람에게는 신념이나, 선입견이나, 야심이나, 비전이나, 자아 관념이나

이런 것들이 붙어 있기가 쉽지 않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왜곡을

인식의 왜곡과 감정의 왜곡과 행동의 왜곡을

일으키는 요소들이죠.

 

그래서 그때야 비로소

깨어서 꿈을 꾸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또는 그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져야

비로소 사고, 생각, 두뇌, 마음, 우리가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미묘한 그것이 정지, 고요해질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될 유일한 것은 직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 앞에 서는 것이다.

해석하거나, 억압하거나, 또는 교묘하게 합리화하지 않고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 행동, 감정이 전부 뭡니까?

공포와 쾌락이라고 하는 연결된 띠 속에 기초하고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공포가 되었든, 그것이 쾌락이 되었든 어느 쪽이든

우리를 과도하게 속박하고 있다

하는 것도 우리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죠.

또 스스로 자기 마음을, 이 마음이

그러니까 관찰하는 마음이 관찰되는 마음

즉 공포나 쾌락을 어떻게 어떻게 작업하려고 해도

이건 이미 분열된 마음이 뭔가를 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해결해 주지 못하며

그다음에 또 분열된 자아로는, 분열된 마음으로는

특정한 마음이 특정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이 명백하게 보여졌을 때

이 사고 과정은 저절로 멈추게 된다는 것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경험해가면서

우리는 공포와 더불어 쾌락으로부터

모두 다 벗어나면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공포와 쾌락에 대한 얘기를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