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유전자 지도에서 [정보]
거울 뉴런에서 [관계]
이중 슬리 실험에서 [우주]라는 키워드를 얻었다.
이 셋을 종합해서 나를 판단해보면 어떨까?
나는 정보로 되어 있고 주변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온 우주가 나의 관찰에 반응한다.
이런 3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세 조건을 고루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조물주이다.
정보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그런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역으로 유와 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욱 기괴한 일이다.
유와 무는 3차원을 얽어매는 모진 사슬이다.
윤회의 사슬에 걸려 생로병사에 허덕이는 중생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유와 무인 것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데서 모든 차원의 제약은 시작한다.
정보는 유와 무의 늪에서 빠져나온 실존의 질료이다.
어느 무엇에 의해 생성된 피조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기에 [나는= 정보]의 등식은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참된 존재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나= 관계]의 등식은
나가 실존이면서 주변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외롭게 따로 떨어져 있는 실존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구별 짓는 신호만 잠시 끄면
나는 곧 인류라는 전체가 되어 창조의 커다란 주역이 된다.
마지막으로 [나= 우주]의 등식은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에 근원적인 해답을 준다.
가볍게 흘리는 나의 시선 하나에도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소립자들은 열렬히 반응하고 결정한다.
마치 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은 나의 시선을 묵묵히 기다린다.
내가 영영 관찰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히 결정을 보류하고 상태 중첩으로 남게 된다.
정리하면,
나는 실존의 질료인 정보로 되어 있고
주변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온 우주와 교감하며 영원히 존재한다.
이런 나는 몇 번을 생각해도 조물주밖에는 없다.
음...
‘나’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니...
고민이 되는 대목이다.
너무 논리를 비약한 것이 아닌가 반문이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라.
3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것은 조물주 외에는 없다.
다만 그 조물주가 3차원 극장에 갇혀 있다는 점엔 구별이 있다.
조물주가 3차원의 결정을 내림으로써
모든 것을 3차원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을 오래도록 습관적으로 하다 보니 깜빡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다.
3차원에 너무 몰두하다 생긴 해프닝이랄까.
정말로 나가 조물주일까?
그 말이 진실이면 어떻게 다시 조물주의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까?
세상에 그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솔직히 자기 자신을 찾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단적으로 말해
관찰에 해석을 넣지 않으면
우리는 3차원 극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해석을 넣느냐 빼느냐]의 차이
이것이 조물주의 본래 모습을 찾느냐
아니면 극장에 갇힌 조물주로 남느냐의 문제이다.
당신이 애써 부정하려 해도
당신이 조물주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조물주인 것을 모르고 극장에 갇혀
두 개의 밑변과 하나의 높이 타령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이 조물주가 되려는 노력은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그 결과 싯다르타처럼 조물주가 되었다는 선언도 있고
예수처럼 조물주 곁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외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조물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조물주 자체이다.
해석을 중생처럼 하니 중생이고
해석을 죄인처럼 하니 죄인인 것이다.
해석을 입자와 질량으로만 하니 3차원에 꽁꽁 갇힌 것이다.
조물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왜냐, 본전치기이기 때문이다.
이미 당신은 구원받은 창조주 하나님이니까.
지금 구경하고 있는 3차원 극장이 싫다면 일찍 그곳을 나와도 된다.
극장에서 나오는 법, 이것을 거창한 말로 수행이라 한다.
수행하면 그 종류만 해도 책 몇 권은 쉽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 알려주는 수행은 매우 간단하다.
관찰할 때 해석을 넣지 말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관하면 원래 모습으로 복귀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얘기는 2500년 전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 언급하지 않았던가
해석을 넣지 않고 관하는 법
바로 위빠사나 수행 말이다.
불교 수행을 왜 정법이라 하는가?
그건 빙 돌아가지 않고 부처의 모습을 바로 공략하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이 오랜 수행 끝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읊푼 것도
바로 이제서야 해석을 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할 수 있게 됐다는
오도송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해석을 어떻게 하면 넣지 않고 관할 수 있는가?
세간에는 생각을 적으로 삼아 해석을 끊는 참선을 택하기도 하고
진언에 집중하여 잡념을 잊기도 하고
무소유를 실천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기도 하고
세상을 위한 봉사를 통해 이타심을 기르기도 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구원의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그렇게 해서 성공한 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뭐가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이는 해석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의도가 들어가면 부지불식중 해석이 섞이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앞서 말한 [정보, 관계, 우주] 이 삼총사와 친해지는 편이 낫다.
이 셋과 벗하고, 이 셋을 이해하다 보면
저절로 해석이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
이들을 통해 고차원 지혜를 습득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해석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해석 없는 관찰자!
그것이 당신의 본래 모습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원래 상태, 바로 [공]이다.
여기에 해석이 붙으면서 차원과 우주가 생겨났고
감상이 붙으면서 생명이 시작됐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당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정보들이며
그 가운데 하나의 창구를 통해
당신이 지금 이렇게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이 애써 선택한 현재의 세계
즉 3차원 극장이 종영되지 않았다면 구태여 벗어나려 애쓸 필요는 없다.
당신이 개똥밭에 구르든 지옥불에 처박히든
결국엔 분별의 스크린이 접히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복귀할 테니까.
다만 이런저런 이유로 조속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해석 없는 관찰자]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실존에 대한 지혜
그것이 해석하는 습관을 버리게 하여
당신이 창조주 하나님임을 확인케 할 것이다.
싯다르타는 열심히 위빠사나를 가르쳤지만
늘 그것의 위에 반야를 놓았다.
[실존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해석 없이 관하는 위빠사나가 성립되는 연유이다.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이해하든 이해하지 않든
무시하든 무시하지 않든
그 어떤 반응에 상관없이
현대물리학은 당신의 절대성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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