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상처입고 부대낀 마음 때문에
마음공부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아이러니에 빠진다.
욕망이 있는 한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
욕망과 욕망으로 인한 번뇌 때문에
그걸 해결하고 자유를 누리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는데,
자유 없이는 욕망의 종식이 불가능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의 모순 속에서 구르고 구르다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내가 있는 그대로 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과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동의어다.
그런 관찰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언어와는 상관없는 풀려남이 일어난다.
한 발자국도 어디 가지 않고 여행은 끝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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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음공부의 아이러니,
모순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러니라는 말은
‘역설적이다’ 또는 ‘상호 모순이 된다’ ‘조화롭지 못하다’ ‘요령부득이다’
이런 말이 되겠는데요.
마음공부도 좀 그런 모순이 좀 있을 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세상 살다가 힘들어서 또 스트레스가 많아서
마음공부를 좀 해보려고 들어왔는데
마음공부를 하게 되면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네가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왔지만
욕망의 눈으로 뭔가를 추구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그게 좀 이상한 거죠.
내가 뭔가 마음공부를 해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데
‘아니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
네 마음공부는 진전이 있을 수가 없어, 완성되지 않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내 삶이 먹고 살려고 투쟁하고 있고
또 남한테 지지 않으려고, 좀 더 좀 잘 돼 보려고
이 투쟁하고 있는 이 마음에 지쳐서
마음공부를 하러 왔는데
이제는 잘못하면
내 마음의 욕망과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드니까
그게 좀 이상해지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은
또 다른 어떤 하나의 심리적인 압박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심리적인 압박은
현실에서의 먹고 살기 위한 스트레스보다
좀 더 추상적이어서 잘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싸움에서 이기기는 더더욱 어렵죠.
그러면 안 그래도 투쟁을 통해서
내 심리적인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마음 공부를 통해서 좀 힐링을 하려고 하는데
이게 잘못하면
자기 자신의 욕망과 끝없는 싸움을 해야 되는
이런 쪽으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적인 가르침이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요.
불교는 일단 소박하게는 소욕지족
적게 바라고 만족함을 알고
뭐 이러면 좀 편하다
이런 얘기가 하나 있고
근데 그러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밝게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정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교가 이것을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자업자득이기 때문에
본인이 지혜로워져서 본인이 행복해지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자기 손해이니까
굳이 강제적으로 ‘이래야 돼’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뭡니까?
불교는 개인의 정죄, 단죄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되어 있죠.
불교는 그러니까 권유, 간곡한, 혹은 친절한 권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도 마찬가지죠.
욕망의 종식이 없는 한 자유는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것이 탐진치, 독심 때문이다.
근데 또 재밌는 것은
동시에 자유가 있는 사람만이, 벗어난 사람만이, 깨달은 사람만이
탐진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게 먼저인지 모르겠는 거죠.
머리와 꼬리가 서로 물고 있다
이렇게 되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타개해 나가야 될지 모르겠다
이런 어리둥절함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가 됐든 어디가 되었든
많은 공부에 입문해서
수십 년 동안 이런 이율배반적인
노력의 끝에 자유가 있는데
자유 없이는 어떠한 노력도 의미없다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모순의 무한 루프에 갇혀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서 너덜너덜해지는 거죠.
그래서 어느 순간에
‘이게 뭐야, 이거 정말 환장하겠네’ 이렇게 되는 거고
번뇌가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언어나 논리 체계가
이것에 대한 진실을 담으려고 하는 이 모든 노력이
의미가 없거나 불가능하거나 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버리는 것이죠.
그때의 깨달음은 무력함을 깨닫는 겁니다.
‘이게 언어나 논리로는 불가능하구나’
그러니까 ‘지식으로는 불가능하구나’
‘문자로는 불가능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실존적인 긴장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노력들이 좀 쉬워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사실은
선불교에서는 공부가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자기는 퇴보되는 것 같아도
사실은 전진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고
안개 속이고, 길을 잃고 헤매고, 번뇌는 더 막 치솟아 올라오고
이런 상태가 나쁘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논리가 깨어진, 나의 어떤 지적 논리가 깨어진
나의 생각으로 세상을 담으려고 하는 그것이 망가진
그 위에 그것을 대신해서 어떤 감각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물론 차고 더운 것을 아는 그런 어떤 오감의 감각이 아니라
어떤 감이 생기는데
균형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그때에 비로소
수영하는 사람이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그런 절묘한 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균형감각이 생기는 것
그것이 자유로 가는 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은
언어적 입장 정리를 하고
그렇게 잘 정리된 입장을 가지고
세상의 파도와 맞서고, 세상을 단죄하고, 또 세상을 평가하고
그런 과정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과 맞서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
더 예리한 칼을
논리적이건 실천적이건 그 예리한 칼을 갈아서
‘내가 세상을 이기겠다’
그런 게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무엇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는 지혜’에 의해서
‘세상과 싸울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지식을
잘 배우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고
수영이나 자전거 타기처럼
절묘한 균형 감각을 통해서
내려가고 올라가고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는 것에 두려움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 자유다.
이 자유를 배우고 나면, 몸에 익어지면
몸이 알아서 할 뿐만 아니라
즐겁다, 오래 간다, 그리고 자유로워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몸이, 삶이, 이 우주가 알아서 하니까
그 자아가 쉬지도 못하고 너무너무 고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삶에 맡겨도 믿을 만하다.
그래서 믿을 만하니까 좀 잘 쉴 수 있다.
이게 마음공부의 결론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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