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을 통해 도달하려는 궁극적 경지가 사념청정이라고 생각된다.
사념이란 사고과정의 정지이며 그 과정의 호오취사의 소멸이다.
인지, 느낌, 판단, 취사, 결심의 사고 과정 전체에 대한 알아차림과
그 결과로 우리는 비판단적주시라는 평정심에 도달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이것이 싫으면 저것도 버려라 하는 것이다.
대칭성을 깨다는 것이 평정심을 향한 지름길이다.//
오늘은 사념 청정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념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염을 버리고 청정해진다
이런 뜻이겠죠.
그래서 사념청정은
마음공부의 어떤 최종적인 이미지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거는 불교에서는 사성정에 도달해서 이루어지는 경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오늘은 사념청정에 대해서 제 생각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사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버릴 사, 생각 염 자잖아요.
이 내용을 한번 보고
결론적으로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 알아차림인데
이 알아차림과 사념청정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과정
사고 과정에 대한 어떤 직면
이것이 알아차림이고
이것이 사념청정으로 갈 수 있다 라는
방법론까지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붓다가 출가해서 수행을 하셨는데
출가 전에는 브라만의 제사의식도 왕족이니까 잘 알 거고
그다음에 각종 학문과
그다음에 그때 당시 육파 철학 같은
철학에도 통달을 했죠.
교육을 잘 받았죠. 엘리트였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닌 것 같아서 출가를 해서
직접 진리를 몸으로 찾기 시작했죠.
그래서 출가 후에는
처음에 선정수행 비상비비상천까지 가는 선정수행을 했고
그다음에 6년 동안은 고행을 했죠.
왜냐하면 선정수행은 생각이 문제라고 생각해서 생각을 죽이는 거고
고행은 몸뚱이가 모든 욕망과 번뇌의 근원이다라고 해서
몸뚱이를 어떻게 보면 죽이는 거였거든요.
그러니까 몸하고 마음 두 개를 어떻게 어떻게 보면 누르고 죽이는
이런 과정이 대표적인 수행이었는데
그 수행을 통해서 최고 수준에 도달했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 같다.
이렇게 돼서
사실은 붓다가 결국은 좌절한 거죠. 실패한 거죠.
그 좌절은 대단히 처절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와서 전심전력으로 수행을 했지만
‘이것이 아닌 것 같다’라고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때 경전에 의하면
농경제, 그러니까 샤카족이 농사지을 때
국왕이 직접 나와서 농사를 격려하는 그런 제례의식 때
자기가 혼자 숲속으로 들어가서 느꼈던 그 평안함의 기억이
그때 떠올랐던 것이죠.
‘진리라고 하는 것이 과연 이렇게 처절하게 가야 되는 것일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때 느낌을 보면
‘아무 생각이 없었다’, ‘평화로웠다’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그런 것도 없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그러면 이것을 현대적인 용어로 볼 때는
‘멍때리기’라고 볼 수도 있거든요.
아무 생각 없는 상태.
그래서 외국에서는 그걸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아무 생각이 없을 때조차도. 잠잘 때조차도
뇌가 쓰던 평소 에너지의 80%는 쓴다.
즉 뇌는 돌아가고 있다
이런 얘기인데
어찌됐건 그때의 기억이
‘저게 진짜 같다’ ‘저기에 길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이 붓다가 그런 과정을 통해서
명상에 들었고
그 사선정에서 사념청정의 단계에 올랐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사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야기하자면 버릴 사, 생각 염이잖아요.
버린다라고 하는 것이 뭐냐?
버린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버린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상도 버리고, 또 건너가는 저 세상도 버리고
완전히 버린다라고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불교가 위대한 포기의 종교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것이 싫으면 저것 또한 취하지 않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싫어하는 마음
이 마음의 구조가 작용이 문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같이 버린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왜냐하면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 있으면 반드시 저것이 있다라고 하는
대칭성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쌍소멸을 시켜야 되죠.
그래서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저것도.
그러니까 열등감을 없애고 싶으면
우월감에 대한 욕망도 없어져야 한다, 그게 원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捨자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것만 골라서 버린다’ 이런 건 아닙니다.
이것도 저것도 그 대칭 구조를 소멸시켜버리는
그런 의미의 버림이다
그러니까 철저한 버림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다음에 念자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thinking process죠.
그러니까 捨念
생각하는 이것을 버린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念이라고 하는 것은
이라고 하는 것은
보면은 뭐가 인식 인지하고, 그다음에 판단하고 결정하고 이런 건데
그 사이에 인지와 해석
그 사이에 뭐가 들어가 있겠습니까?
느낌이 들어가죠.
‘야 이거 좋은데’ ‘나 이거 싫은데’
느낌적 느낌이 있는 거잖아요. 미리
그래서 그걸 호오심이라고 그럽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이미
그래서 인지와 해석 사이에는 호오심이 있고
그렇게 해서 ‘이거는 이런 것 같다’라고 해석하고 판단을 할 때
판단하고 나서 결정해야 되지 않습니까?
의지를 세워야 되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 또 뭐가 있는가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는
[취사심]이라고 하는 것이 작동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이 마음, 혹은 감정, 혹은 느낌이
우리 인지 과정 process 속에서 작동을 하는 겁니다, 숨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건 작동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순수하게 논리 회로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첫 번째는 기억에 의존하고 있죠.
기억을 불러내서 그 기억을 프로세싱 하는 거잖아요.
‘이건 이런 것이고, 저런 저런 것이구나’
판단해야 되니까.
근데 이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뇌과학적으로 보면
순수하게 기억 그 자체로 지정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꼬리표가 붙어 있다.
그래서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벤트는
사실은 기억 잘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억에 남아서
끌어내서 쓸 수 있는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쪽이든 저런 쪽이든 강렬하게 감정과 결합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억도 완전히 객관적인 것은 아니죠.
두 번째는 이 프로세싱도, 그러니까 그 논리 작용도
우리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경량성이 있는 의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식이 순수하고 맑은 순수 의식이 아니고
경향성이 있는 또는 편향된, 왜곡된, 오염된 그런 의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에
편향이 생겼다, 왜곡이 생겼다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인정할 수가 있죠.
이것이 ‘생각한다’라고 하는 것의 과정을 뜯어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있다 인지하고
근데 느낌적 느낌이 있고
그다음에 판단하고
그다음에 버리거나 취하는 마음이 있고
그다음에 의지를 가지고 결심을 하고
그러나 그 해석하고 판단하는
순수하게 어떻게 보면 지적인 과정인 것처럼 보이는 그 과정조차도
감정적으로 채색되어 있는 기억에 의존하고 있고
또한 이 thinking, 사고 자체가 왜곡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
이 과정 전체가 염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보면
그러면 이런 사념청정에 도달하기 위해서
알아차림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 이 것인데
그건 명확하죠.
이 사고 과정 전체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차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뭘 보고 있는지’ 봐야 인지되니까
내가 그것에 대해서 어떤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편향성을 가지고
어떤 가치 가치의 가중치를 가지고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의 해석과 판단의 과정에 끼어드는
기억들이라고 하는 것들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나는 어떤 것을 취하려고 하고 어떤 것을 밀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결심과 의지를 세우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이
내가 지켜봐야 될, 깨달아야 될, 알아차려야 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알아차리는 과정 자체가 명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thinking process, 생각하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판단하는 과정이거든요.
이것이 작동하지 않는다, 사념이다라고 하는 것은
현대적인 영어로 번역하면
Non judgmental awareness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판단은 하지 않는데
의식은 생생하게 깨어 있는
마인드 플리스라고도 할 수 있고요.
그래서 이걸 비판단적 주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식은 잘 깨어 있는데
아직 특정 대상에 대해서
이렇쿵저렇쿵 생각하고 판단하고 하는
상호작용은 일어나지 않은 상태 라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명상을 하다 보면 이렇게 될 수 있죠.
그래서 Non judgmental
그러니까 이게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지 않는 상태를
이게 원래 寂寂적적인데
그렇지만 잘 깨어 있는 상태
이것을 惺惺성성이라고 하겠죠.
그래서 이번에는 잘못됐네요. 성성이 아니고 적적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소음도, 어떠한 판단적 과정도 없는 상태에서
의식이 맑게 끼어 있는 것
이것이 성성적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면 상이라든지, 생각이라든지, 느낌이라든지
생각과 감정이 없는 거죠.
이 상태에서는, 사념청정의 상태에서는
그래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想受滅상수멸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은 불교는 모든 본능의 근원은
생각이라고 말하니까.
그래서 그 번뇌의 근본, 근원이 되는 내 생각에 대해서
내가 좀 더 유연해지고
내가 이런 염의 과정, thinking process를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나의 특징, 나의 편향, 나의 크고 작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유연해질 수 있고.
두 번째는 여기에서 심지어는 자유로워질 수도 있고
세 번째는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주인이 되어서 마음껏 내가 활용할 수도 있고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생각의 주인이 될 수가 있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는 흔히 지혜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신앙이나 또는 도덕적 어떤 아주 극심한 금욕이나
이런 게 아니고
지혜, 자기 생각을 깨우쳐서
자기 생각으로부터 해방되고
주인이 되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념청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현실에서 어떻게 활용해서 자유화될 수 있는가?
즉 우리의 사고 과정을 면밀하게 알아차림으로써
우리는 점점점점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하는 말씀을 드려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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