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수행은
현재의 ‘나’가 중생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번뇌망상이 그치질 않고
그렇다고 지혜가 출중한 것도 아니니
중생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생으로 살아가는 삶
우여곡절이 많지만
결국엔 병들어 죽고 마는 허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해苦海를 일찌감치 절감하는 사람들은
영생과 열반에 초점을 맞춥니다.
대부분은 종교적 믿음을 통해 쉽게 얻으려 하지만
철학적 식견을 갖춘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성취하려 합니다.
후자의 사람들을 가리켜 수행자라 부릅니다.
어떤 수행이 되었든
분별의 대칭을 깨고 자유로워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그런데 중생을 전제로 한 출발은
그 자체로 매우 대칭적입니다.
이미 중생과 붓다로 가르고 시작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현재 모습을
진솔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는 좋습니다.
하지만 수행에 임해서는
중생과 붓다의 이분법적 생각을 버리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에 더해 붓다라는 말도 가려서 쓰는 게 좋습니다.
깨달은 자라고 하면
깨닫지 못한 자가 함께 따라오니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붓다라는 말보다는
實存(제1원인)을 즐겨 씁니다.
수행이란
實存인 당신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정리됩니다.
그런데 정말 ‘나’가 實存이 맞을까요?
대개 종교는 과학의 발전과 상충합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종교의 토대가 허물어져 나갑니다.
하지만 불교는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더욱 빛이 납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현대물리학이 수십 년 더 진보하면
불교와 과학의 경계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과학이 얼마나 불교에 도움을 주냐 하면
숱하게 비판을 받아오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마저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 줍니다.
불경에 보면
싯다르타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일곱 걸음을 걷고서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온 우주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도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후대의 사람들이 꾸며낸 얘기지만
여기엔 우주의 모든 물리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놀라운 공식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말하면
관찰자 절대 보존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왜 가장 완벽한 오도송(悟道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주 삼라만상은
관찰자 단 한 명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양자역학을 선두로 한 현대물리학의 총체적 결론입니다.
가령 당신이 버스에 탔습니다.
그러면 온 우주는 당신의 시간을 기준으로 삼고
버스 밖의 모든 것들의 시간을 빠르게 가도록 왜곡시킵니다.
당신이 등산을 해서 산봉우리에 올랐습니다.
역시 당신을 위해 온 우주는 시간을 늦게 가도록 왜곡시킵니다.
당신이 움직이는 시시각각 당신만을 위해 우주는 시간을 조정합니다.
이해하기 어렵나요?
그렇다면 당신이 블랙홀에 근접해서 차 한 잔을 마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5초에 걸쳐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블랙홀 밖의 세상을 봅니다.
단 5초가 지났을 뿐인데 밖의 세상은 10만 년이나 훌쩍 지나 버립니다.
당신이 차를 정확한 시간에 마시도록 외부의 시간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블랙홀 밖에 A라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A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은 10만 년 동안 차 한 잔을 마시고 있는 셈이 됩니다.
블랙홀 밖의 A를 위해 당신의 시간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즉 관찰자를 위해 피관찰자의 시간을 상호 왜곡시키는 것
이것이 특수상대성이론입니다.
비단 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 또한 당신만을 위한 장場을 언제나 준비합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태양 주변을 지나는 빛은 휘어집니다.
태양의 높은 질량에 의해 공간이 구부러진 데 따른 현상입니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그 빛에 타고 있다면
빛은 절대 휘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위치한 공간은 일모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이고
대신 태양 주변의 공간을 심하게 일그러트립니다.
웜홀(worm hole)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로켓을 타고 웜홀로 들어간다면
평소와 다름없는 공간을 통과하게 됩니다.
하지만 로켓 밖의 풍광은 다릅니다.
당신을 위해 우주 전체의 시공간을
괴상망측할 정도로 접어 왜곡시키니 말입니다.
물론 외부의 관찰자 A가 보면
웜홀을 통과하는 당신의 시공간이 뒤틀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자도약(quantum leap)과 같은 순간이동을 하면 어떨까요?
당신이 지구에서 순식간에 안도로메다로 이동해도
당신의 시공간은 왜곡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구에서 안도로메다에 이르는 시공간이
찰나의 점멸을 하며
당신의 순간이동을 떠받칠 것입니다.
소립자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관찰하지 않으면 상태중첩의 상태로 대기합니다.
그 유명한 생사가 공존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그런 사례입니다.
당신이 관찰해야만
생과 사 가운데 어느 하나로 선택됩니다.
왜냐고요?
바로 당신이 관찰하기에 보기 좋으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천지창조를 한 이유에 대해
‘하나님이 보기 좋으라’는 이유를 대는데
바로 당신 한 사람이 보기 좋으라고
우주의 물리 현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저 별 볼 일 없는 중생일 뿐인데
왜 온 우주가 당신의 일거일동에 반응할까요?
바로 당신 자체가 우주이며 實存이기 때문입니다.
삼라만상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숨결 하나에도 우주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조물주인 당신은 시공간을 관찰 도구로 삼고
‘상태 결정’을 통해 대상의 일부를 실감 나게 감상하게 됩니다.
이것이 관찰자 단 한 명을 위해
우주가 존재한다는
관찰자 절대 보존의 법칙입니다.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관찰자의 수만큼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가령 인류가 70억 명이면
그에 딱 맞춰진 70억 개의 우주가 있지 않겠냐는 의문입니다.
더 확대하면 생명체의 수만큼
우주가 조각조각 나뉠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는 단 한 개만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당신 홀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심하게 모순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뭐냐고 따질 수 있겠지요.
물론 상대계에서 보면 관찰자의 수만큼 우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중우주가 이래서 나오는 건데, 그건 분별이 만든 허상입니다.
실존에서 보면 단 하나의 우주만 존재합니다.
바로 당신의 우주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눈에 다른 사람의 우주가 보이면
당신은 분별로써 외계를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튼 수행에 임하는 당신의 위치를
억지로 실존으로 놓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과학적 사실이 그렇고, 수학적 논리가 또한 그런 것입니다.
실존인 당신은
초점을 너무 오므림으로써
실감 나는 세상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불편함이 고해를 꾸며냅니다.
이제 그 초점을 조금만 더 넓히면 됩니다.
수행이란
원래 관찰의 구조를 바꾸는 데서 시작하니까요.
당신은 아직도
자신을 중생이라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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