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이것이 참된 위빠사나 수행이다. 관찰만 하지 말고 맘껏 즐겨라!

Buddhastudy 2021. 12. 15. 19:27

 

 

 

생각을 관찰해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

이것을 일러 위빠사나라 합니다.

 

생각은 무조건 를 분명히 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수십 조 개의 생명(세포)으로 이루어진 몸뚱이와

여기서 발생하는 무수한 정보의 이합집산을 통틀어 로 규정합니다.

 

그리고는 피조물이니 중생이니 떠들면서

무상함과 苦海를 토로합니다.

바로 한 줄기 생각이 얽히고설켜 를 만들어내고는

평생동안 그 허상에 갇혀 괴롭게 지내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위빠사나는 생각을 관찰해

그것이 만든 의 허상에서 탈피하려 합니다.

대단히 설득력 있는 수행 방법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반쪽짜리입니다.

위빠사나에 빠진 반쪽을 채워 넣지 않으면

그 효능을 제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수행의 목적은 결국 實存(1원인)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생각이 만든 허상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존의 성향을 살펴 그것을 깨울 수 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실존은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천부경에 나오는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입니다.

시공간 속에 삼라만상이 펼쳐져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존의 해석입니다.

실존이 해석한 것이 정보의 형태로 정교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실상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오고 가고 멈추는 것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제논의 패러독스를 보면 세상에 움직일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의 선승인 승조 역시

만물은 움직임이 없다는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돌개바람이 산악을 뒤흔드나 항상 고요하며,

강하가 다투어 흐르나 흘러감이 없다.

말이 먼지를 흩날리며 들판을 질주하나 움직이는 것이 없고

일월이 하늘을 지나지만 돌지 않는다.

旋嵐偃嶽而常靜 江河競注而不流 野馬飄鼓而不動 日月歷天而不周

 

 

왜 움직이는 것을 뻔히 보면서

움직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얼핏 보면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실제로 움직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사실상 5차원 점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점은 위치는 있어도 면적이 없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상계에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은 점과 점이 연결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실존의 해석에 의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가령 TV 화면 속의 화소()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화면엔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실제는 움직임이 없지만

점과 점을 연결해 마치 움직임이 있는 것처럼 꾸며냅니다.

 

이처럼 삼라만상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실존이기에 오고 가고 멈추는 게 없습니다.

용수가 쓴 중론에는 여기에 대한 철학적 논증이 담겨 있습니다.

 

이미 간 것은 가고 있지 않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가고 있지 않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

지금 가고 있는 것 역시 가고 있지 않다.

- 已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中論]

 

오고 가고 멈추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은

실존이 그렇게 해석함으로써 정보의 다발이 만개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여래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이지요.

 

 

이런 불교적 견해를 떠나 현대물리학의 대부분은

우주를 가상공간으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어느 과학자는 가상공간이 아닐 확률을 10억 분의 1로 보기도 합니다.

이 얘기는 우리 우주가 정보로 만들어진 상상 속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실존이 정보를 일으켜 삼라만상을 그렸다는 것인데, 왜 그런 것일까요?

어떤 뚜렷한 의도에 의해 발생한 건 아니지만,

창조 현상과 동시에 실존의 감상이 일어나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존이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비추고 있는 상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입니다.

열반은 번뇌를 소멸한 상태가 아니라, 실존의 창조성에서 나옵니다.

 

, 이제 왜 관찰하며 즐기라고 하는지 이해가 갈 것입니다.

바로 열반의 상태에 가까워지면 그 속에 실존의 감상이 배어나기 때문입니다.

선지식들이 적멸만 있고 비춤이 없으면 불교가 아니다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관찰은 부정적인 생각들을 멀리하는 수동적인 방법이고

즐기는 건 실존의 열반에 접근해 저절로 우러나오게 하는 능동적인 방법입니다.

 

두 방법 다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위빠사나를 제대로 하려면 관찰과 더불어 즐길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원효대사가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즐기는 것이 최상일까?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기에 답은 없습니다.

다만 오감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찾아보면 됩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5차원 실존은 이 다섯 창구를 통해 자신이 꾸며낸 세상을 감상하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오감의 어느 하나라도 극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상적인 만족을 넘어 탄성이 우러나올 정도의 희열을 느낀다면

부지불식중 실존은 깨어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탐진치로 인해 그만큼의 즐거움을 얻지 못합니다.

 

혹자는 오감에 집중하거나 도취되는 건 일종의 이 아닌지 우려할 것입니다.

착에 해당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착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착이 있고,

두 번째는 대상을 감상하기 위한 착이 있습니다.

 

후자는 창조의 목적에 해당하기에 제대로만 감상하면 5차원 의식이 발현됩니다.

예술의 경지에 이런 현상이 즐비합니다. 그래서

화가는 불법이 없어서 깨닫지 못하고,

스님은 불법이 있어서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위빠사나를 온전히 수행하면

대상에서의 분리와 동시에 대상과의 합일이 발생합니다.

오고 가는 것이 사라지면서 대상 자체가 실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누군가 인생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산다면

그 역시 수행자입니다.

 

당신은 인생을 즐겁고 보람 있게 보내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