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시국이 어지럽다.
붓다는 사회적 격랑에 대해서 어떤 자세와 행동을 취했을까?
중도를 행했다.
조국을 침공한 코살라국의 군대를 막아서기는 했지만
마지막에는 인과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하면서 비껴났다.
임진왜란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중관론의 저자 용수, 화두선의 창시자 대혜종고 스님 등도
모두 나름의 정치적 발언을 했고, 참여했고, 불이익을 받았다.
즉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진리추구자로서의 두 바퀴를 모두 굴린 셈이다. 그
러나 무엇이 되었든 근본적인 태도는
중도에 입각한다는 것이다.
세속의 인과법과 탈속의 연기법이 다른 것이 아님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건생 조건멸의 연기법은 어디서나 진리다.
사람의 사회적 행동은 인연을 따르지만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연기법과 그 결론인 무상, 무아를 동시에 철견해야 한다.
나에게 보이는 세상이 곧 나 자신이다.//
오늘은 현실과 붓다의 가르침에 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상이 갑자기 역사가 될 때가 있죠.
우리는 지금 어수선하고 또 위태하고 그런 시국에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특히 마음공부, 이런 쪽에 공부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여전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생숭생숭할 겁니다.
그래서 무슨 잠 못 이루는 밤,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런 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럴 때 흔히 이분법적인 갈등이랄까?
참여할 거냐? 아니면 거리 두기를 할 거냐?
참여를 하면은
참여한다는 것은 옳고그름을, 시시비비를 따지는 거니까
탐진치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고
거리 두기라고 하는 것은
또 어떻게 보면 방관자적인 입장에 서는 것 같고
그래서 이렇게 하기도 저렇게 하기도
그런 것들이 마음공부한다라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조금의 아주 큰 불편함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적 의미에서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모든 현상은 연기법을 따른다 하는 게 있고
그 논리적 귀결로 모든 것은 무상하고
그다음에 내 생각과 맞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고
그리고 이렇다 할 실체, 영원하게 불변하는 그런 실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고요.
그다음에 또 그 뗏목의 비유에서처럼
법도 버려야 되는데, 법 아닌 것을 집착하면 되겠느냐?
이런 얘기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법 아닌 것이 탐진치를 일으키는 우리의 모든 대상이 되고
법이라고 하는 것이
아공법공 혹은 사성제, 팔정도라고 하는 그 법에도 너무 집착하지 마라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현실이 이렇게 탁 내 눈앞에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혼란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혼란은 역사적으로도 많이 있었는데요.
부처님 시절에도 부처님의 사위국을
코살라국이 침공을 해서 멸망하지 않습니까?
그 얘기를 듣고 부처님이 그 길목에서 세 번인가 막아서는 것이죠.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까지는 막아서고
세 번째 왔을 때에
“이건 안 되겠다, 이거는 돌이킬 수가 없겠다”라고 해서
부처님이 더 이상 막아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코살라국의 침공자가 부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이 나뭇가지는 잎이 시들어서 햇볕을 가리지 못하는데 왜 여기 앉아 있습니까?”
그러니까 “나의 조국, 나의 왕국도 지금 이와 같이
시든 잎과 같아서
내가 어떻게 싱싱한 잎 아래에 앉아 있겠느냐?”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찌됐건 붓다는 가로막았죠, 행동했죠.
하지만 비폭력적으로 행동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생각은 인연에 따라서 행동을 했지만
그 정해진 인과를 막기는 어렵다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근데부터 시대만 이런 게 아니고
현실에서 소위 말하는 스승들의 행동은 다 나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나 사명대사가
승병을 조직해서 전쟁에 직접 뛰어들었고
또 포로송환이라든지 이런 외교 문제에도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현실에 깊이 참여했죠.
그다음에 대승불교의 중간론을 펼친 용수 보살, 용수라는 분도
어떤 특정 정치 세력에게 자문 역할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정적에 의해서 암살을 당합니다.
암살을 당할 때에 그 암살자에게
“이쪽 문 말고 저쪽 문으로 가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왜냐하면 “이쪽 문으로 가면
우리 제자들이 있어서 당신들을 보면 당신들을 죽일 것이다.
그래서 내 제자들이 살업을 행하는 인과를 짓는 것을 내가 볼 수가 없다.
저쪽 문으로 가면 아무도 없으니까 저쪽 문으로 달아나라.”
뭐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것이죠.
그다음에 대혜종고 스님, 중국 화두선의 창시자인 대혜종고 스님도
당시에 송나라가 항상 외침에 시달렸는데
대혜종고 스님도 그런 어떤 정치적 발언을 합니다.
정치적 발언을 하니까
정적에 의해서 18년인가? 오랜 시간 동안 유배를 당하죠.
그래서 이렇게 보면
우리가 마음 공부한다고 해서
완전히 세상과 단절돼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모르겠다” 이렇게 하는 것도
또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공부의 근본적인 내용이
무상하고 무아인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또 그것에 대해서 이것이 옳다, 이것이 그렇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탐진치로 빠져든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탐진치로 빠져들면 반드시 음살도라고 하는 악행을 행하게 된다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진심이라고 하는 것은 분노거든요.
분노는 행동을 낳고
분노의 행동은 또 다른 행동을 낳아서
업의 수레바퀴는 끝없이 돌아간다.
이것이 붓다의 근본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현실 참여를 해야 될지
아니면은 거리를 완전히 두고 마음공부만 해야 될지”
이런 어떻게 보면은 좀 지혜가 부족한 상태에 처하게 되죠.
그래서 불교에서 하는 얘기는 중도 아닙니까?
중도라고 하는 것은
2분의 1이 아니라, 어떤 의미인가 하면
현실과 또는 현실을 넘어선
탈속을 추구하는, 진리를 추구하는 이 두 가지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중도라는 것이죠.
다만 그 두 개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아니기 위해서는
진리를 터득해야 되는데
그 진리가 연기법이고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 무명인 무상고 무아를 통해서
근본 무명을 타파해야
탐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지 않고
이 탐진치에서 일어나는 음살도라고 하는 악행이 생기지 않고
그래서 그 악행이 생기지 않아야
인과의 수레바퀴를 끊어낼 수 있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니까
이걸 어떻게 역사로 다가온 현실,
내가 부딪힌 현실에 적용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개인사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과
또 사회적 역사적 존재로서 사회 전체가 홍역을 앓는 이 사건이
사실은 크게 다른 일은 아니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도 그렇고, 개인적 실존 인으로서도 그렇고
모든 다가오는 사건들에 대해서 대응하지만
그러나 눈을 뜨고 있어야 된다.
그 눈이라고 하는 것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무상, 고, 무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요.
그다음에 연기법적으로 현상을 본다고 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서 일어나고, 조건에 따라서 사라져 가는 이 현상을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이해한다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휘말려 들어가면은
이런 주시하는 관찰자로서의 입장을 또 잃어버리게 되니까
그것 또한 문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현대 심리학에서는 두 가지 자아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는 경험하는 자아고 하나는 성찰하는 자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경험하는 자아’는 십이연기적으로 이야기하면
접촉, 상황을 만나니까
그 상황에 대해서 느낌이 있고
그 느낌은 곧바로
“나는 이거 좋은데. 나는 이거 싫은데” 라고 하는
호오의 느낌으로 감정으로 바뀌고
그 감정 때문에 어떤 것은 붙잡고, 어떤 것은 밀어내고 하는 선택이 일어나고
그런 식으로 감정과 정서와 생각을 선택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그것은 행동으로 옮겨진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행동으로 옮겨진다라고 하는 것은
결정적인 사회적인 격변기에는
치고 받고 하는, 좌충우돌하는 형태의 갈등과 투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쪽에도 도는 있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질리도록, 진절머리 나도록, 지긋지긋하게 싸우다 보면
이 산 위에서는 뾰족한 돌이었던 것이
바닷가에 오면 어느덧 파도에
그리고 서로 부딪혀서 원만한 몽돌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경험도 제대로 하면
원만해짐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두 번째는 좀 더 직접적이고 압축적으로
성찰하는 자아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성찰하는 자아는 이렇듯 접촉, 느낌, 호오 반응,
그다음에 취하고 버리는 마음, 행동, 싸움과 투쟁,
이런 것들이 내면의 격랑이 일어나잖아요.
우리는 지금 이런 일어나는 사회 현상들을 직접 참여하는 사람이 있지만
또 대부분의 또 사람들은
그냥 마음이 불편한 채로, 잠 못 이루는 채로
이 추위를 지켜보는 쪽이 더 많은데
그러나 그 사람의 내면도 정확하게 사회를 반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 내면의 격랑을 지켜보는 것
그것도 굉장한 행동이다, 이거죠.
그래서 이 세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인과법에 따라서
원인과 결과가 서로 부딪히면서
어떤 파노라마처럼 프로세스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다음에 탈속법, 마음의 세계에서는
인과법이 아니라 연기법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그래서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서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서 사라지니까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다, 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인과법과 연기법은 하나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자로서도 살고
관찰하는 자로서도 살아가야 한다
동시에 두 가지 바퀴를 굴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경험하는 자아는
뭐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는 거니까요.
반응하는 것이지만
성찰하는 자아는 좀 문제의식을 가지고, 좀 배우고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자아죠.
그래서 이것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자신이 어떤 경향성이 있는 인식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나는 이런 경향성이 있구나
그리고 이런 경향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어떤 식으로 사회화되었을까?
내가 이런 가치 이런 인식을 어떻게 내면화하게 되었을까?”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성이 가지고 있는 어떤 위험성
“이것이 정말로 나의 평화와 행복과 그런 것에 괴로움을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영원한 싸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지에 대해서
그 경향성이 가진
편향이 있는 인식의 위험성을 보는 순간에 나는 바뀔 수 있다.
이게 우리가 마음 부하는 굉장히 중요한 이유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거 알아차림,
알아차림을 통해서 우리는 비약적인 점프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어지러운 현실, 혹은 잠 못 이루는 이 현실이
우리에게는 엄청난 마음공부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세상이 이렇게 격랑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두 개의 눈을 다 가지고 있어야 된다.
두 개의 눈을 다 뜨고 있어야 된다.
두 개의 신경망을 다 가동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인과법이고
하나는 연기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둘이 아니다 라는 것이고요.
그다음에 참여하고 행동하는 것은
각자의 인연에 따라서
관망만 할 수도 있고, 참여할 수도 있는데
그건 인연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나의 인연을
따라서 이쪽이든 저쪽이든, 또는 양쪽이든
그 인연을 따라서 현실에 참여하고
그러나 동시에 성찰의 눈도 뜨고 있어야 된다.
성찰의 눈은 연기법이죠.
조건에 따라서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서 사라져가는 현상들에 대해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무상과 무아를 체득해야 된다, 해내야 된다.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이
좀 어지러운 시국이지만
그러나 나에게 보이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
나에게 해석되는 세상
내가 판단하는 세상
내가 이래야 된다라고 하는 그 세상은
결국은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데 불과하다라고 하는 것이
대전제가 돼야 되겠죠.
그래서 내 눈에 비친 세상이다.
그러면 문제는 세상보다는 나일 수도 있다
하는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걸 화두로 삼아서
”나에게 보이는 이 세상은 왜 이럴까?“라고 하는 것이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닌
그 지점을 잘 성찰하는 것이
이 어려운 시기를 마음공부 차원에서 보면
압축적인 발전의 시기로 활용할 수 있는 계기일 수도 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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