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소박한 용어도 관념화되고 추상화 된다.
중도의 개념도 그와 같다.
가장 실천적인 용어로 쓰였던 것인데 나중에 형이상학화 되었다.
양극단의 배제와 연기법적 통찰이
사물의 실상에 부합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어었다.
고행과 쾌락, 산만과 가라앉음(삼매),
언어적 진리 추구와 목석같이 되는 묵언 등
모두가 중도에 위배되고
진리를 구현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붓다는 도시를 떠나 숲으로 갔지만
가까운 곳에 있었다
보시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주는대로 먹어야 했기 때문에
육식의 문제가 없었고
단체 생활의 규칙도 사후적 경험적이었다.
중도는 바로 이해해서 실천하여
유익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오늘은 붓다가 제시한 중도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보통 중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2분의 1을 생각하는데
불교에서는
그거 아니고, 그렇게 기하학적인 개념이 아니고
짬짜면 이런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양극단을 지양한, 양극단을 버린
어떤 진리
뭐 이런 거를 얘기하는데
그럼 그게 뭐냐?라고 이야기하면
또 한없이 좀 길어지고 어려워집니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리무중이죠.
그리고 이 중도라고 하는 개념이
초기불교나 대승에서 바라본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 관통하는 것이 중도의 의미이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여러 조작들이
부처님의 친설은 역사적으로 아닐지 몰라도
똑같은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오히려 더 세련되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뭐 그럴 수 있죠.
그럴 수 있는데 오늘은
그럼 실제로 우리가 마음공부할 때 있어서
붓다가 제시한 중도의 의미를
그렇게까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으로 이해해야 되느냐?
이 문제는 좀 있다고 봅니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붓다가 일정 부분
사고나 언어의 과잉에 대해서 경계했고
그리고 항상 붓다가 우리가 말을 쓸 때에는
이것이 자유로, 깨달음으로, 속박으로부터의 벗어남으로 이끄는가?
하는 가치 기준을 가지고
우리가 언어 사용을 해야 한다고 강조를 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대승불교나 선불교, 또는 아비달마 불교, 모든 불교가 사실은
너무 말이 많아서
그 말을 좀 줄이자라는 식으로
혁신의 물길들이 이어져 왔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즉 단어가 자꾸 관념화되고 형이상학화되면서
현실로부터 몽롱하게 유리되어 왔다
이런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나 초기에 붓다가 제시한 중도의 의미는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정확하게 우리가 이해하고 실천해서
도움이 되는 그런 의미들입니다.
그럼 중도의 의미를
예를 들면
공자가 유교에서 중용을 이야기하고
또 그리스철학,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을 의미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붓다도 중도라고 하는 것을 제시했으니까
여기 가운데 중자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지 시각적으로 보면
가운데를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절반, 절반.
그러니까 이쪽도 반, 저쪽도 반.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아니야, 그건 뭐 무게 중심이거나 전혀 다른 개념이야
거기 들어가면 이쪽과 저쪽 자체의 의미가 없어져
이분법적인 구분이 사라지는 사건의 지평선 같은 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양극단을 피하라, 라고 하는 것을 붓다가 얘기한 이유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것이 우리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 주지 못한다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죠.
중도는 그래서 관념이 아니다, 형이상학이 아니다,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혹은 뭐 그럴 수도 있는데
현실에 기초가 튼튼히 되어 있어야 된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불이 중도라든지, 공사상이라든지
이 붓다가 2500년의 고타마 붓다가 아니고
깨달은 사람 모두가 붓다라든지
붓다는 전생도 후생도 또 내생에 다른 부처가 온다든지
그다음에 모두가 불성을 갖고 있다든지
여래장라든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화한다든지
이런 모든 것들은
그게 뭐 중도랑 그렇게까지 긴밀히 연결되지는 않고
고민한 거죠.
고민해봤자 말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일 뿐이다.
이렇게 일단 조금 폄훼를 하고
중도가 관념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붓다의 초기 불교에서는 어떤 식으로 수렴했는가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붓다는 계정혜(戒定慧)를
물론 이것도 뒤에 아비달마에서 이야기했지만
어찌 됐건 붓다가 이야기한 걸 정리해 보니까
계정혜라는 거 아닙니까?
1) 계라고 하는 계 뭡니까?
불살생 불사음 이런 계지만
붓다의 생각은 계를 가지고 수렴하려고 했던 것은 중도죠.
어떤 중도냐 하면
극단적인 쾌락주의
세상은 죽으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쾌락, 그 생명의 요구에 따라야 된다 하는 게 하나고
또 하나는 극단적인 고행주의
우리는 업이 많아서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이 업을 다 태울 때까지는, 업을 청산할 때까지는
고행을 스스로 실천할수록 빨리 빚을 청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고행과 극단적인 쾌락이
우리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 주지 못하더라.
다만 너무 어지럽지 않게 해라, 생활을.
이게 계의 가장 큰 의미죠.
2) 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에서 소위 삼매에 빠지는, 뿅 가는, 의식을 놓는
그때는 나와 세상에 대한 구분이 있을 수가 없죠.
삼매에 들면
그래서 이 특별한 수행으로 삼매를 추종하는, 추앙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강렬했고
또 한쪽으로는 날도 덥고 그러니까
정신도 산만하고, 생활도 산만하고
욕망과 분노에 끄달리는 어리석음
이런 것들이 보통 사람들의 생활이었는데
붓다는 이 둘 다 아닌 것 같다 라는 것이죠.
보통의 산만하고 어지러운 삶도 당연히 아니지만
들 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삼매에 든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정신줄을 놓는 거거든요.
의식이 그때는 있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깨워줘야 깨어나는데.
어찌 됐건 이런 삼매수행도 그때는 황홀하고 좋을지 몰라도
또 깨어나면 현실이 그대로기 때문에
이것이 보조적인 수단은 될 수 있어도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이렇게 두 가지 양극단을 버린 것이거든요.
NO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당신이 생각하는 명상이 뭐야?” 이렇게 물어보면
이 사람은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어렸을 때 농경제, 농사 짓기 위해서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왕이 농사 짓는 뭐 해주고 막걸리도 한잔 마시고
같이 으샤으샤하는
거기서 자기가 살짝 빠져나왔고
좀 뭐 번거로운 것을 빠져나와서, 숲에서 누리는 그 평화/
되게 평화로웠다.
근데 그게 의식이 있는 상태잖아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평화로움
들뜨지도 않았고, 가라앉지도 않았고
그냥 의식은 그대로 있는데 평화로웠던
그거를 불교의 사선정에서 말하는 사념청정에 더 가깝다
가까운 느낌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어떤 붓다가 이야기한 정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줄을 놓는 게 아닙니다.
하여튼 그게 정이고
3) 혜라고 하는 것은
불교가 지혜의 가르침이잖아요.
신앙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넘어설 것을 가르치는, 권유하는 종교인데
이게 그때 당시에 시대상 보면
또 육파철학이라 그래서
언어적 진리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그리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즉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언어 문자와 개념이 발달할 때에는
거기에 길이 있는 줄 알고
그렇게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건 역사의 단계에서 필요한 단계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그것 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한쪽에는 고행에 가까운 묵언
그다음에 감정이 메마른 목석처럼 되는 이런 반응하지 않음
이 두 가지도 양극단이다
그래서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는 생리적 욕구도 잘 쓰면 되고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차분한 마음도 잘 쓰면 되고
또 우리가 갖고 있는 지성도 잘 쓰면 되는 것이지
여기서 포인트는
주인이냐? 노예냐? 이거죠.
그래서 거기에 둘로 빠지는 것은
어느 쪽으로든 거기에 길이 있다고 매몰되는 것은 노예의 길이어서
그것이 우리를 좋은 곳으로
번뇌가 없는 해탈로
속박이 없는 자유로
이끌어주지 못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 정확하게 중도의 개념이죠.
뒤에서 뭐 이렇게 되게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제가 봐서는
적어도 우리 마음공부에 그렇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또 나중 이야기고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도록 하고.
그래서 붓다 얘기를 현대식으로 풀어보면
“누가 몸에 좋다 카더라 그런다고 해서 그거 막 먹지 마라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붓다가 얘기한 거는
그러면 뭐 “적당히 살라는 얘기냐?”
그건 아니죠.
붓다가 얘기한 것은
라디카라는 거하고 익스트림한 건 다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라디카라는 것은
근본주의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죠.
방향이 딱 정해져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익스트림은
지금 여기서 그걸 다 해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영어로 이야기하면
Slow and steady win the game
여기에 더 가깝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출가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라디칼한 거죠.
또 가족 입장에서는 익스트리한거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출가를 하고, 구도를 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자유로워지겠다라고 하는
이 내적인 열망 같은 것은 라디칼한 거죠.
그것이 포기되지는 않죠.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고행과 쾌락, 삼매와 산만, 언어적 진리와 묵언
이 여섯 가지는 다 극단적인 거고
이 극단적인 것은 실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
자 이거 나중에 이야기한, 나중에 깨달은 연기적 실상
연기적 실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이쪽은 다 낭떠러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단상양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단, 이라고 하는 죽음은 끝이다라는 거고
상, 영원히 계속된다, 형태가 유해일 수도 있고요.
이 둘 다 뭐랄까?
지양,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이것이 관념적으로는 양극단
즉 영원하냐? 아니면 죽으면 끝이냐?
하는 것에 대한 그 생각이었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붓다의 중도를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접목시키느냐?” 라고 했을 때
현실적으로 양극단을 붓다가 어떤 식으로 지양했는가? 하면
붓다 어디 살았습니까?
도시 성곽에서 살지는 않았죠, 숲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리를 이끌고 다닐 때 너무 먼 숲에 살지는 않습니다.
도시에 가까운 숲에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걸식을 해야 되는, 빌어먹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인가가 있는, 민가가 있는 가까운 숲.
도시는 아니다.
하지만 먼 숲은 아니다.
이게 중도입니다.
이게 중도의 확실한 이미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세상과 단절되지는 않는다.
이게 중도의 의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빌어먹는 밥은
밥을 보시하는 사람들의 뼈와 살과 땀과 눈물과 피가 녹아 있는
노동의 결과잖아요.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런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라고 본 것이죠.
또 육식 문제가 나오지만
내가 죽여서 잡아먹고 구워 먹고 이런 식은 안 하지만
내가 빌어먹는데
그쪽에서 주면 주는 대로 먹는 것이죠.
그 안에 고기가 섞여 있을 수도 있고
좋은 거 나쁜 거, 맛없는 거, 자기 취향하고 안 맞는 거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얻어 먹는 입장에서
이거저거 이렇게 가릴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
대원칙인 것이죠.
“주는 대로 먹어라, 욕심 부리지 말고”
이런 것이죠.
그다음에 붓다의 중도는
계율을 정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 계율이라고 하면 계와 율이 다르잖아요.
당연히 계라고 하는 것은
출가한 이유가 뭐냐
살생하지 않고 등등등등 해서
그게 도와 관련된 게 계고.
율이라고 하는 것은 단체 생활의 규칙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냥 생활 규칙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율을 정할 때에
대단히 경험적이고 사후적으로 정했다는 겁니다.
출가자가 너무 많아서
한 집안이, 한 나라가 망하겠다라고 하면
“어 그래? 그러면 안 되지
그러면은 모든 아들이 다 출가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아들이 하나인 집안은 출가 못해.
그리고 삼형제가 있다면 둘만 받고, 하나는 있어야 돼”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한 거죠.
그리고 또 너무 어린 애들이 출가해서 문제를 일으키니까
그러면 13살인가 15살인가 그 밑으로는 그 출가를 받아주지 말자
왜냐하면 이 승단이 어찌 됐건
이 유리걸식(流離乞食)하고 노숙하는 데잖아요.
그러니까 애들이 규율에 대한 감각도 없고, 또 건강도 문제가 있고 이렇게 하니까
그렇게 하지 말자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즉 이 말은 뭐냐 하면
대단히 실천적이고, 실용적이고, 경험적이고, 사후적이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이것이 중도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붓다가 중도를 얘기했을 때는
대단히 현실적이고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얘기를 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중도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실천적이고 유익한 것이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Slow and steady win the game, 이거죠.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타이밍의 예술이기도 하죠.
즉 무너지는 담벼락 밑에 있는 것이 현명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가 뒤집어지지 않았는데도
물 속으로 성급하게 뛰어드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이런 의미의 좀 느낌을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중도를 이야기하면서 극단주의를 배척했잖아요.
그 극단주의는 심리적으로 조급한 것이잖아요.
그리고 지적으로는 사실은 게으른 거거든요.
골치 아프니까, 잘 모르겠으니까, 아예 이렇게 잘라버리는
이 두 가지 심리적 지적인 장애를 해치고 나아가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지 실패하기가 쉽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중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심리적인 조급함
두 번째 지적 게으름
이것이 어떻게 보면 중도의 장애물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를 이해하고
중도를 절대로 관념화 하지 말고
중도에 대한 분명한 이미지는
그야말로 단어나 언어나 관념, 양극단, 이쪽은 아니구나라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된다.
붓다가 왜 도시 성곽의 가까운 숲에서 살았는가?
왜 주면 주는 대로 먹었는가?
왜 계율을 정할 때, 율을 특히 생활 규칙을 정할 때
경험적이고 사후적으로 정했는가?
하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중도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오늘은 초기 불교에서 생각하는 중도의 의미에 대해서
제 방식으로 여러분들과 한번 말씀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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