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래서 한마디로 정견이란
이것이 이것 자신을 보는 게
바른 정견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부처가 아니고는
정견도 제대로 못하는 거야.
그런데 중생이 그래도
정견 비스끄름하게 흉내를 내다보니까
가끔 어떻게 운이 좋아 갖고
정견이 잠깐 돼서
“아 이게 이게...” 이러다가 뭐 탁 터지는 거지
여러분이 정견을 제대로 할 수나 있나.
그래서 한마디로 정견은
생각이 뚝 떨어진 전오식의 자리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즉 전체가 전체 자신을 자각하는 거예요.
개체가 전체를 찾는 게 아니라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정견을 열심히 해서 깨달아야 되겠다”
이건 다 망상이에요.
내가 어디 있고, 열심히 하는 게 어디 있고, 뭐 그런 게 어딨어.
자기를 비우면 되는 거예요.
나를 비우면
이미 이 보는 이 눈 자체가 정견이야.
근데 자꾸 나한테
“어떻게 하죠? 어떻게 정견하죠?”
이렇게 물어보니까
여러분 내가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저 어떻게?”라고 하는 건
벌써 그 앞에 ‘누가 무엇을’이 생략돼 있는 거야.
그럼 벌써 주체 객체행위가
다 자기 안에 있다는 얘기야
그럼 벌써 분별 망상이지.
그러니까 나는 그런 거 물어보는 사람마다
이거로 한 대 이렇게 때려주고 싶은데
그렇게 폭력적일 수도 없고 그래서 참 답답한 거예요.
자 이제 내어맡김이 뭐고
공부하지 않는 공부가 뭐고
정견이 뭔지 다 아셨죠?
예 좋습니다.
그러니까 오온이 자기 생각 느낌에 의지해서
이 진리를 찾겠다고 공부하는 것은
한마디로 번뇌망상이지 공부가 아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고
그다음에 두 번째로는
불교는 분별하지 말라는 종교거든요.
분별하지 말라
분별한다는 게 뭐냐 하면
생각을 작동하는 걸 말해요.
생각을 작동해서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이 세 가지를 하는 거예요.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짓을 하고 있는 이유가 왜 그러냐면
아상이 저 밑에 있어서 그래요.
내가 더 잘 돼야 되거든
좋은 거 취해야 되고 싫은 거 버려야 되고
맞은 거 해야 되고 틀린 거 피해야 되고
이런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론적인 절대의 진리에서 떨어져서
상대의 진리 세계 속으로 떨어지는 거야, 자기가.
좋은 걸 취하려다 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래서 진짜 깨달았다면
나쁜 거가 와도 웰컴이고
좋은 거가 와도 웰컴이고.
그래서 옛날에 저 한마음 선언의 대행 선사는
나는 다음에 죽어서 그 제자인
무슨 법사가 물어봤어요.
“스님은 열반하시면 다음에 어떻게 도솔천 가서 설법하실 거예요?”
“어 다음에 나는 저 어디 시골 변소간 구더기나 될까 해”
그러니까 깜짝 놀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난 뭐가 되든 상관없어.”
그 정도 돼야 해탈이지.
뭐가 되든 상관없어.
“아 잘 돼야 되는데, 도솔천 가야 되는데, 극락 가야 되는데”
이러고 앉아 있으면은
변소간은 이 절대 진리 속에서 예외인가?
안 그래요?
다 이 안에 있잖아. 그죠
그러니까 일체가 이렇게 분별이 뚝 떨어져야
그래야 진짜 진리와 하나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크게 깨어날수록
이 자리에 크게 깨어날수록
세상의 걱정 근심이 여러분 앞에서 힘을 잃어요.
안 그러겠어요?
여러분 마음속에는 지금도
“그 일은 일어나면 안 돼”라는 일들이 있을 거예요.
안 그래요?
“그 일은 일어나면 안 돼”
예컨대 우리 집에 화재가 나
우리 가족 중에 누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해
또는 누가 암에 암에 걸려
또는 집이 폭삭 망해 파산해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 라는 걱정 근심 내지
어떤 경계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
이런 거를 좀 내어맡기라는 거예요.
완전히 잊어버려라.
무슨 미래를 대비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대비해서 할 일을 하세요.
그러나 그런 게 여러분을 쥐고 흔들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게 아상이니까.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든
어떤 역경계가 오든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요.
그게 삶이니까.
어떻게 삶에 좋은 일만 있겠어요?
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요.
물론 슬프면 눈물도 나겠죠.
또 파산하거나 뭐 불행한 일이 생기면 한숨도 나오겠죠.
그럴 뿐이야.
진리 공부는
복 받아서
뭐 이렇게 더 잘 되고 행복하고 죽어서 천당 가고
이런 상대 세계 속에서 노는
여긴 피하고 저기 가는 이런 게 아니고요.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어요.
지옥에도 계세요
안 그렇겠어요?
여러분이 하나님 부처님 자리가 되려면
피하는 게 없어야 돼.
어떻게 요리조리 피하면서...
무슨 둘리야?
제가 당부하고 싶은 거는 이거예요.
‘내가 지금 살아있다’라는 건 생각이에요.
여러분이 생각을 안 하면
안이비설신의에서 ‘의’가 뚝 떨어지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이미 자기가 몰라.
그리고 여러분이 이 다음에 몸을 잃고 죽으면
여러분도 자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깨어나지 않고는 모릅니다.
꿈속에서 자기가 꿈꾸는지 알아요?
모르잖아요. 그죠?
죽어도 자기가 죽은지 몰라요.
그리고 자기 상념으로 만든 몸이 또 있어.
없을 것 같죠?
그 몸도 붙들고 거기서 또 헤매고 있어요.
왜?
이 전체, 이 자리하고 분리돼 있거든
자기 안이비설신의 때문에.
그러니까 계속 그렇게 헤매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이 몸을 가지고 살아 있을 때
이 자리와 하나 되지 못하면
어디서 무슨 윤회를 할지 아무도 장담을 못해요.
그래서 이 법을 백천만겁 난조우
그렇게 만나기 어렵다고 하는 거예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법을 만났으면
반드시 죽기 전에 이 깨달아야지
이거보다 더 급하고 더 중요한 일이 없어요.
돈 버는 게 중요해?
이 영원한 진리를 깨달아서 진리와 하나 되는 게 중요해?
이건 비교할 수조차 없는 일 아니에요. 그죠?
근데 세상 사람들 봐.
이 공부하는 사람은 몇 명 안 돼요.
지금도 저 여기 저 신도가 몇만 명이고
새벽 교회 사진 내 친구가 찍어서 보내주는데
새벽 교회 나온 사람만 5천 명이래
5천 명이 그냥 막 이러고 울고불고 하는데
야 아주 장관이에요, 장관.
근데 그 사람들이 뭘 위해서 그러고 있을까요?
다 나를 위해서 그러고 있는 거야.
나 더 잘 되게 해달라고
나 더 행복하게 해달라고
천당 가게 해달라고.
그러니까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적어요.
그저 나 하나 잘 되게 해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 대목에선 정말 한숨이 나옵니다.
어쨌든 그래도 이렇게 소수나마
절대 진리 공부를 잊지 않고 하겠다는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도 힘을 얻고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진짜 이 길 없는 길을 이렇게
그냥 정처 없이 가고 있어요.
이제 여러분들이
그 정견하는 법도 배웠고
자기를 진짜 내어맡기고 하는 공부가 뭔지도 알았습니다.
앞으로 그 공부를 열심히 하시길 바라고
특히 제일 먼저 하실 공부가
이 몸이
내 생각과 느낌이 조합한 이미지 상념에 불과하다는 걸
철저하게 정견하면
이미지, 상념, 신기루는
저 사막을 여행할 때
그 길을 많이 댕겨본 상인은
저기 오아시스 신기루가 떠도
“저건 가짜다, 공하다”라는 걸 보고
자기 갈 길을 갑니다.
그런데 처음 가는 놈은 어때요?
“어 저기 오아시스가 있구나” 하고서 쫓아가다가 어떻게 되죠?
사막에서 그냥 방황하는 거예요.
다행히 저는 저게 뭐가 신기루인지는 알아볼 수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저를 믿으시면
하라는 대로 좀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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