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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經 | '둘' 을 이야기하지만, '둘이 아니다' 를 이야기한다 | 월인선원

Buddhastudy 2024. 7. 10. 19:17

 

 

웬만한 사람들은 도덕경에 대해서 관심이 있잖아요.

장자에 관심이 있고

특히 동양, 우리나라에 사는 분들은

웬만한 분들은 관심이 있을 겁니다.

물론 저도 그랬고.

 

그래서 제가 들은 건 뭐냐 하면

이 도덕경이라고 하는 책이 어떻게 나왔냐?

 

노자라고 하는 이 분이

죽을 때가 돼서 자기 스스로 죽으러 히말라야에 가고 있었다고 그래요.

 

지리를 잘 모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지만

중국의 서쪽은 히말라야하고 붙어 있습니다.

중국하고 히말라야가

아주 멀다 그러면 멀죠.

, 우리나라하고 붙어 있는 중국에서 히말라야까지는

완전히 동서로 먼 거리죠.

어마어마하게 멉니다.

 

근데 이 서북쪽은 히말라야하고 붙어 있어요.

그쪽에 살았는지는 제가 모르겠지만

스스로 죽으러 히말라야에 가고 있었는데

국경을 지키는 병사한테 잡혔다고 그래요, 이 노자가.

 

물론 이런 말은 전부 제가 볼 때는 거의 만들어진 말입니다.

근데 그 병사가 마침 노자의 이런 가르침을

흠모하고 따르는 분이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지금으로 치면 스승이죠.

거기에서 그렇게 만날 줄을 몰랐던 스승을 만나게 된 거예요.

도대체 어디를 가십니까?” 그러니까

히말라야를 간다

그러니까 국경에서 안 내보내준 거예요.

안 내보내 주고

꼭 가시겠다 그러면 이 가르침을 이렇게 써서

하여튼 가르침을 써달라고 그랬대요.

가르침을 써달라 그래야 내가 풀어준다.

그렇게 해서 쓴 게 도덕경이다

제가 어디에선가 들었어요.

출처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럴듯하긴 해요.

왜 그럴듯하냐?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아니 이거는 말할 수가 없고

어떻게 글자로 표현할 수가 없는데

이거를 글자로 표현 해야 될 상황이 된 거예요.

노자입장에서는.

 

사실은 그게 설법입니다. 그게 가르침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49년 동안 하신 게 또 그거예요.

말할 수 없는 거를 말로 표현한 겁니다.

 

우리가 그걸 가르침이라고 그래요.

삼귀의 할 때도 두 번째 법이라는 말로 나오죠.

불법승 할 때.

 

불은 당연히 깨달음을 얘기하는 거고

두 번째 법이라고 하는 게 가르침이에요.

그게 설법이면 설법이고, 설법을 적어놓은 글이다 그러면 글

그걸 가르침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어쨌든 그 가르침을

적지 않으면 나 안 내보내주겠다, 이러니까

이 도덕경을 적었다고 그러는데

 

심정이 그렇죠.

심정이 말할 수 없는 걸 말로 해야 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말로 해야 되는 상황이.

 

그 입장에서 이 도덕경을 보면은

조금 도움이 되는 면이 있을 겁니다.

약간 도움이 될 겁니다, 아마.

그러니까 아무리 우리가 이 도라는 말을 해도

이 도라는 말이 우리 본래 마음일 수는 없거든요.

우리 본래 마음이라고 하는 거는

도라는 이름을 붙여야 될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자기가 목이 말라요.

목이 말라서

우리가 이름을 붙이기는 그걸 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물을 마셨단 말이에요.

물을 직접 마시는 게 중요한 거지

 

그게 물이다. 물이 아니다.

물이냐 물이 아니다.

옳으냐 그르냐를 아는 거

그리고 이 이름이 물이다라고 하는 거는 아무 상관이 없거든.

 

그걸 마셔서 그냥 목마름이 해결이 되는 게

뭐라고 그래야 합니까?

이 목마름을 해결하는 유일한 답인 거죠.

 

마찬가지거든요.

우리 본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름을 필요치 않아요.

얘를 마음이라고 하든, 소라고 하든, 말이라고 하든

하늘이라고 하든, 땅이라고 하든

부처라고 하든, 중생이라고 하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런 이름하고 그냥 이거일 뿐이거든.

그러면 그때부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를 말로 표현을 해야 된다.

이 말로 표현한다는 건

전부 둘로 나눠서 한다는 거예요.

나눌 수 없는 걸 둘로 나누는 겁니다.

이걸 철학에서는 근본과 현상이라고 그래요.

근본과 말단.

 

철학에서는 그렇게 얘기하고

이 중국의 사상에서는 상과 성이라고 그랬습니다.

성은 우리 근본을 얘기하고

상은 이 모습의 세계를 얘기했고

 

체와 용이라고도 했죠.

이 체는 본체라는 얘기예요. 본체, 본 바탕.

용은 쓰는 거니까

우리가 쓰는 거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우리가 이렇게 손대고 어쩌고 하는 건 다 모습 지어진 거잖아요.

현상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기본적인 방식이거든요. 예나 지금이나.

설법도 마찬가지예요.

 

부처와 중생을 왜 얘기하냐?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어서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깨달음과 어리석음을 왜 얘기하냐?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따로 있어서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따로 있다고 분별하는 것은 중생심이죠.

그러니까 생겨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유도 뭔지 모르는 채

그렇게 분별만 하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 세계는 현상세계라고 하고.

 

자기 스스로가 이 근본과 현상을 나누어서

따로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중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근본과 현상을 얘기하는 거고

부처와 중생을 얘기하는 거고

깨달음과 어리석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건 기본적인 방식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똑같이

근본은 이런 거고, 현상은 이런 거다

이렇게 얘기하고 끝나버리면

그건 가르침이 될 수가 없죠.

 

역시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조차도

근본은 이런 거다, 현상은 이런 거다 하고

근본과 현상을 둘로 나눠서 얘기하는 거니까

분별이 되겠죠.

 

그러면 둘을 왜 얘기하냐?

이 둘을 얘기하지만

둘은 둘이 아니다를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둘을 얘기하면

둘이 아니다라는 걸 얘기하게 돼 있습니다, 설법은.

제대로 이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러면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

자기 눈에 비치는 세상은 둘이 없으니까.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아요.

부처와 중생이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아.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에이, 중생아세간에서도 그런 욕이 있죠.

 

깨달은 사람이 부처 중생을 얘기할 때는

이 부처와 다른 중생이 있어서 중생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이 세상이, 사람들이, 우리 삶이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아

옳고 그름으로 나뉘어져 있질 않아.

그냥 온통 통째로일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거를 좀 가르치려고

이 둘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가르침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둘로 돼 있어요.

반야심경만 봐도 색과 공으로 돼 있잖아요.

색과 공을 얘기하지만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고 얘기하잖아.

색불이공 공즉이색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러고 나서 왜 그러냐? 왜 다르지 않냐?

그 설명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거다.

 

다 그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금강경은 이 제상과

제상이라고 하는 거는 모습 지어진 세계죠.

그다음에 비상을 얘기합니다.

제상과 비상을 얘기해요.

상 있는 것이 상 없음을 보면 즉견여래다, 이렇게 얘기하죠.

거기에서 상 있는 거라고 하는 건 현상세계를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쉽게 얘기하는 분별되는 세계.

 

상 없는 세계는

상 없는 세계가 따로 있지는 않을 거잖아요.

상이 없는데 그게 무슨 세계겠습니까?

상이 없는데 무슨 세계냐고 그게.

 

상이 없다 그러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분별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데

그런 세계가 있다 한들 그걸 어디다 쓰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사는 세계가 3차원 세계라고 얘기를 하는데

4차원 세계가 있다.

어따 쓸 겁니까?

보이지도 않고 경험도 안 되는데.

 

깨달음은 그런 게 아니에요.

이 정신세계다, 그러니까

무슨 뭐 신기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고 이런 게 아니야.

그런 건 있으나 없으나 아무 소용도 없어요.

 

그런 게 아니고

지금 당장 이렇게 눈앞에 분명한 거거든요.

이 모습 지어진 세계 속에서 이렇게 확인이 되고

생생한, 살아있는

그걸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지.

 

이 모습지어진 세계하고 상관이 없는 다른 세계다, 그러면

굳이 우리가 왜 공부를 해야 됩니까?

우리가 죽고 나서 가는 어떤 천국이고 천당이다, 그러면

뭐 하러 공부해요, 그거를

 

지금 당장 이 모습 지어진 세계 속에서

이런저런

옳고 그르고, 좋고 싫고라는

이런 생각이나 기분이나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세계 속에서 실현이 돼야 될 거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그렇게 얘기하는데

이 도덕경도 기본적으로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도와 명으로 얘기해요. 도덕경.

도와 명으로 딱 얘기합니다.

 

명은 이름이잖아요, 이름.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모습 지어진 세계입니다.

모습 지어진 세계는 이름으로 돼 있어요.

전부 이름을 붙였죠.

 

물론 우리가 이 모습을 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는 있지만

얘가 컵은 아니죠.

우리가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얘 스스로가 컵일 수는 없어요.

우리가 컵이라고 보자고 약속을 한 겁니다.

우리는 앞으로 얘를 컵이라고 부를 거니까

이런 모습을 보기만 하면

너도 컵으로 알고

나이 든 사람이든 어린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이걸 컵으로 다 알아라,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이름을 짓는다는 거는

쉽게 말해서 세간에서는 법이에요.

앞으로 도둑질하면 징역 몇 년을 처할 테니까

뭐 이런 거하고 똑같은 겁니다.

 

이 스스로는 자기를 컵이라고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죠.

이름이라고 하는 이거를.

 

그러니까 이 깨달아서 이 법의 눈으로 보면은 뭐냐 하면은

이름이라고 하는 거는 물질세계가 아닙니다.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에요, 이름은.

망상의 세계입니다.

우리 생각이에요. 생각.

전부 우리 생각이에요.

우리가 그렇게 부르자고 약속한 겁니다.

생각이에요. 생각.

분별의 세계예요. 이름은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름과 이 이름이 가리키는 어떤 대상, 사물을 하나로 알고

그렇게 훈련이 돼 왔기 때문에

당연히 이 대상이 컵이라고 그러는 거죠.

 

예를 들어서

우리 모두가 이름이 있잖아요. 자기 이름,

부모가 지어줬던, 할아버지가 지어줬던 이름이 있잖아.

이름이 자기일 수는 없잖아.

 

이름이 자기일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름을 바꿀 수도 있는 겁니다.

이름이 자기는 아니야.

그래서 저를 뭐라고 부르든, 그 이름이 뭐든, 내 스스로는 바뀌는 게 없어요.

이름은 바뀔지 모르지만.

 

근데 그 이름이라고 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건 어떨 때만 의미가 있냐?

우리가 약속이 돼서 그렇게 부를 때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망상의 세계지, 생각의 세계지.

어쨌든 도덕경 구조는 그렇게 돼 있어요.

1장을 딱 보면은.

 

도가도 비상도다.

도를 얘기할 거고 이름을 얘기할 거예요.

근데 도를 얘기하지만

도를 도라고 얘기를 하는 순간

이미 그거는 도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