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망상에서 벗어나버리면
그럴 때는 이 말이 맞아요.
남을 원망하고 비난하죠.
그 원인이 바뀌어 있다고 하니까
제 입장에서 볼 때는 합리화인데
자꾸 ‘너 때문에 내가 화가 났’고 그래
‘이런 일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 받는다’고 그러거든.
근데 쉽게 말해서
자기 마음에 어떤 화나 불만이나 스트레스가 없으면
그게 나올 리가 없죠.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근데 실제로 물론 그것과 접촉해서 있던
참 그러니까 그게
유식에서 6식, 7식, 8식을 얘기하는데
7식이라고 하는 게 분별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분별식
분별식이라고 하는 건 간단한 거예요, 어려운 게 아니야.
우리가 보니까 이렇게 분별을 해
분별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이렇게 분별하는 뭐가 있으니까 분별을 한다, 이 말이거든.
그러니까 이 분별하는 이거를 보고
이렇게 분별하는 어떤 이유나 원인이라고 하는 게
분별하는 그게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분별을 한다.
그러니까 그것도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됩니까?
논리적이라고 해야 되나?
당연히 유식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철학적이고, 이론적입니다.
선이라면 그렇게 안 가르쳐요.
분별 그대로가 해탈 열반이라고 가르쳐 버리지
7식, 분별식 이런 개념 안 만들어냅니다.
근데 그런 게 어떻게 나타나냐?
이걸 또 설명해 주는 방식이 그거예요.
그런 것과 눈으로 접촉을 하거나, 귀로 접촉하거나, 몸으로 접촉하거나, 생각으로 접촉했을 때
있던 그것이 이렇게 올라온다, 나온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거든.
12연기설도 그런 거예요.
사실 알고 보면 간단한 말이야.
그냥 우리가 이렇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런 모습을
그 이론적으로 설명해 놓은 거야.
근데 그 이론이 맞는 거냐?
맞는지 틀리는지는 우리가 몰라요.
내가 접촉을 해서 안에 있던 게 나왔다, 이론적인 거잖아.
굉장히 이론적인 겁니다.
근데 우리는 늘 그런 이론적인 거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걸 사실이라고 여겨버려요.
“이래서 그런 거구나”
그러면 서양에서 쓰는 말은 에고라는 표현을 쓰거든.
에고가 있으니까 우리가 그런다고 그러거든.
자기가 에고가 있는지 없는지 그걸 압니까?
에고라는 말도 극히 이론적인 말이에요.
그냥 그걸 에고라고 부르자.
그런 게 있다고 치자.
그 얘기를 불교식으로 하면은 장이라는 표현을 써요.
그거를 가지고 있는 어떤 장은 창고잖아요.
여래장이라고 하는 게 그 창고를 얘기하는 겁니다.
이런 얘기는 철학이나 사상에서 다 얘기하고 있어요.
유학에서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학에서 인의예지 그럴 때
인은 측은지심이라고 그래요.
인이라고 하는 게 우리가 있다고 왜 그걸 얘기할 수 있느냐?
인이라고 하는 게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 어디에 인이 있는지 없는지를 몰라요.
근데 보니까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울 줄 알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릴 줄 알더라는 거야.
이렇게 살더라는 거야.
이런 걸 보니까
“그런 마음이 있구나”
이렇게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인이라고 하는 게 우리는 있구나” 이렇게 사실로 받아들여 버려.
있다고 하면 그 있다고 하는 게 증명이 돼야 될 거 아니야.
몸속에 어디에 있다든가, 뇌 속에 어디에 있다든가.
근데 7식 8식을 얘기를 해놓으니까
그냥 그거 가지고 헤매요.
헤맬 필요가 아무것도 없다니까
여래장이라고 하는 건
자기가 일상의 삶에서 다 실현하고 있는 거라니까.
이 깨달은 마음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가 일상에서 다 실현하고 있어요, 자기 스스로가.
조금도 부족함 없이
실감을 못할 뿐이야.
왜 실감을 못 하냐?
이럴 수 있지.
첫 번째는
여래장이 뭔지를 몰라서
깨달음이 뭔지를 몰라서
도가 뭔지를 몰라서 실감을 못한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을 거고.
근데 사실은 그 생각 때문에 실감이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알고 모르고의 일이 아니라고.
알 필요도 없고 모른다고 할 필요도 없어.
알고 모르고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있다 없다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거냐 할 필요도 없어.
그래서 실감이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체험
자기 스스로 다 하고 있음을 그냥 체험하는 거야.
체험해 놓고 보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온통 그냥 이거 하나를 다 실현하고 있었던 거지.
한 번도 중생이어 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그걸 우리가 실감이라고 그러고, 체험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거는 분별이 한 번 뚝 부러지면
그냥 저절로 다가오는 실감입니다.
본래 부처였음이 그냥 저절로, 저절로
본래 온전음이 그냥 저절로 이렇게 다가와요.
아무것도 손댈 거 없고 고칠 것도 없었는데.
계속 내 삶에서
이런 느낌 저런 느낌
이 생각 저 생각
또는 밖에 이 환경 저 조건을 계속 손대서
자기에게 맞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 예를 썼음을 바로 실감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었어.
그런 애씀이나 노력이나 행위는 다 유위법이야, 유위법.
조작이었던 거야.
특히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그거 전부 조작이에요.
수행할 필요가 없어.
본래 이렇게 온전한데 뭘 바꿔.
자꾸 바꾸려고 하는 그 못된 버릇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 못된 버릇.
손대고 싶어 해.
그걸 세간에서는 오지랖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오지랖이 넓다.
자기 공부에서는 손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손댈 게 없어요.
바꿀 거 없어.
그냥 오로지
어쨌든 그 마음도 자기가 어찌해서 생긴 마음이 아니니까.
하여튼 깨달음이라고 해도 좋고
도라고 해도 좋고
만족이라고 해도 좋고
자유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해도 좋은데
그거에 한번 통하고자 하는, 그걸 해결하고자 하는, 그 답을 찾고자 하는
그 뜻과 그 원은
내가 어찌해서 생긴 게 아니잖아요.
그냥 그 뜻과 원을 가지고
그냥 이 가리키는 이 설법을 그냥 듣다 보면
이 법이라고 하는 이게
우리 망상 분별을 녹이는 거지
자기가 녹이는 게 아닙니다.
법이라고 하는
우리가 이걸 법이라고 이름을 부르자, 그러면은
이 법이
망상 분별을 녹이고, 우리 습관을 녹이는 거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어찌 하면
또 그 분별, 그 버릇이 생겨버려
이 버릇은 어찌 보면, 참 무서운 거예요, 그게.
그런 경우도 꽤 있었죠.
그래도 이 불법을 공부하고자 하는 분들이 꼭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많은 분들이 그래도
불교라고 하는 이런 거에 관심을 가지고
절 다니고 이러시다가
이런 선을 공부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여기에도 계세요.
저한테 그런 말을 하셔서
이 선원 나오시면서도
절 안 가면 불안해서 간다고
그것도 맞냐 틀리냐 저한테 묻는데
그렇게 물으면 저는 맞다 틀리다 안 합니다.
불안해 죽겠다는데 어떻게, 가셔야지.
그런 게 고민돼서 저한테 묻고 그러더니
지금은 졸고 계시네.ㅎㅎ
지금은 졸고 계셔.ㅎㅎ
이제 고민이 안 되나 봐
고민이 안 되니까 졸고 계시겠지.ㅎㅎ
그게 버릇 때문에 그래요.
해 오던 버릇 때문에.
자기가 하던 걸 안 하면 불안하거든.
근데 그건 꼭 절만이 아닙니다.
절 가고 안 가고
뭐 이것만이 아니야.
생각해 보세요.
수십 년을 초파일 되면
절에 가서 등 달았단 말이에요.
등 달면서 뭔 소원을 빌었을 거 아니
절 얘기하지 말자고,
제사
수십 년을 제사 지내면서
자식들 건강하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고 그랬을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제사를 안 지내야지’ 하고 한번 있어보세요.
안 불안한가?
불안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어머님 보고
‘제사 지내지 마라’고 절대 안 해요.
그냥 돌아가실 때까지 지낼 겁니다.
불안해 하시는데 뭐.
습관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근데 그런 모든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서 보면은
그때 보여요. 그게
그때 보여.
물론 뭐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좋은 거다.’
이런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해야 될 필요도 없어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깨달음의 삶이다’
그런 게 아닙니다.
사실은 인연 따라서 다 해요.
인연 따라서 다 하는데
그 하는 거기에 내가 없어, 내가.
거기에 무슨 의미를 두고 가치를 두지 않아요.
의미 가치라고 하는 건
내가 만들어낸 상인데 뭐.
이런 일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이 일은 의미, 가치가 좀 덜하고
그건 다 자기가 만들어낸 상입니다.
의미가 내가 있다고 하는 일이나
의미가 없다고 하는 일이나
이 진실을 드러내고 이 진실을 실현하는 이 무게는 똑같아요.
그래서 평등하다고 그러는 겁니다.
무상정등각.
똑같고 한결같고 평등한 게
다가와 버렸기 때문에
이게 다가와 버렸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일에 의미를 두고
어떤 일에 의미를 두지 않고
이게 잘 안되는 거야.
물론 이제 버릇은 남아 있으니까.
여기 통해도 처음에는 그런 일들이 있죠.
가치 의미가 가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어요.
처음에는 그 습관이 남아 있어.
흔적 자체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근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게 더 분명해지고 이게 밝아지거든요.
그럼 평등합니다, 그냥.
의미 안 따져요. 사는데
의미 따질 필요가 없어요.
의미가 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이거 말고는 의미가 없어요.
나머지는 전부 생각일 뿐이야.
의미가 있다 그러면
그게 의미가 있는 거지.
살아있음의 어떤 의미, 가치가 뭐냐?
그냥 지금 당장 이렇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말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이거밖에 없는 거예요.
나중에, 이런 건 다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분별이고.
하여튼 그런 모든 분별에서
한번 이렇게 훌쩍 벗어나 보셔야 돼.
훌쩍 벗어나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일이 있구나.”
한 번도 상상을 못 해본 일이거든.
머릿속에서 그린 거 하고는 다르니까.
“진짜 이런 일이 있구나.”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이 이게 진짜였구나, 진짜.
가짜가 아니었구나.
그럴 것이다가 아니었구나”
자기가 직접 경험을 해서 터득을 해버렸기 때문에
이건 뭐 어쩔 수가 없는 거잖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렇게 진짜였구나.”
“모든 중생이 열의 공덕과 지혜를 다 갖추고 있구나.
본래 부처였구나.”
“그냥 이 세상이
그냥 있는 그대로
손댈 것도 없고 가꿀 것도 없고 어떻게 할 필요도 없고,
이 세상이 그냥 있는 그대로 불국토였구나.”
“진짜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거를 실감하는 거거든.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한 번 통한다라고 하는 거는.
그러니까 자기가 직접 경험을 해 봐야 돼, 이거는.
무조건 그냥 여기 한번 이렇게 딱 통해 봐야 돼.
생각은 필요 없고
경험으로 딱 통해 봐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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