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 원인을 소멸해 나가는 그 과정, 다시 말하면 무명이 사라지면 행도 사라집니다. 행이 사라지면 다시 식도 사라지게 되고, 식이 없어지면 소멸하면, 물질과 정신도 소멸하고 이와 같이 해나가다 보면 결국은 생로병사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어떤 조건이 사라짐으로써 또는 원인이 사라짐으로써 결과도 사라지는 이 구조를 설명한 것이 바로 逆觀역관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12연기의 順觀순관은 사성제로 이야기하면 집성제와 고성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성제라는 것은 고가 일어나는 원인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고라는 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생로병사를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고요.
그래서 일어나는 구조를 설명하는 것은 고가 일어나는 원인인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를 의미하는 고성제와 집성제를 의미하는 거구요. 또 멸하는 구조, 무명이 멸하고 다 멸하고 나면 생로병사가 일어나지 않는, 다시 말하면 열반을 이야기하는 것이 멸성제고, 또 그를 위해서는 팔정도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팔정도와 멸성제, 그러니까 도성제와 멸성제 이 두 가지는 12연기에서 逆觀역관을 이야기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사성제와 12연기는 같은 내용을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12연기를 이해하는 것이나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이나, 거의 같은 내용을, 핵심은 같은 것을 뜻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12연기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12연기 속에 불교의 기본적인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것이 다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12연기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연기의 각각 12가지 요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이 부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앞에서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조건 따라서 어떤 조건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래서 조건 따라 일어난다는 것은 어떤 조건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이게 연기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이런 과정들이 아무 관련성도 없이 무분별하게, 그냥 자기 멋대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일어납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이라는 것이 있으므로 행이 있다. 행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무명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와 같이 어떤 결과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적합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을 여러분들이 명확히 이해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12연기의 각각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무명 때문에 행이 있다.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일어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무명이 뭔가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명은 한마디로 말하면 지혜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명이라는 뜻은 빨리어로 위짜라고 하는데요, 위짜라고 하는 것은 지혜, 명지. 이런 뜻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래서 이 지혜가 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리석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불교에서 말하는 그런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진리는 사성제와 연기법입니다. 그래서 이 사성제와 연기에 맞게 우리가 이해를 한다면 큰 문제가 없는데, 이 사성제와 연기를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만약에 어떤 삶을 산다면 그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은 사성제와 또는 연기법에 대한 무지, 또는 사정제와 연기법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렇게 정의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은 또 연기를 제대로 조건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느냐 하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이 세상의 본질이 괴로움인 것을 괴로움이 아니라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속에 사는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삶의 큰 행복을 준다고 보통 인지를 하게 됩니다. 감각적 쾌락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의 본질은 이 대상을 집착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거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쥐려고 하는 것이 감각적 욕망입니다.
그래서 내가 쥐고 있는 이 대상이, 그렇지만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 그것은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어떤 조건의 변화에 의해서 또 사라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있게 되면 그 사라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라진 것에 대해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이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사라졌을 때는 굉장히 큰 고통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감각적 욕망은 일어났을 때는 즐거움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사라졌을 때 엄청난 큰 고통을 유발 할 수 있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이것을 행복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건 따라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행복을 주는 것인 것처럼 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근원적인 어리석음입니다. 이 자체가 본질적으로 행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잘못 아는, 이것이 바로 근원적인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이 영원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원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권력이라는 것도 길어야 10년. 몇십 년을 독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은 그것은 언젠가는 권력을 놓게 되고, 또 자기가 거기서 물러나게 되면 그 후에 권력을 잡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악업을 저지르겠습니까? 그러면 그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고통이 또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어떤 걸 얻게 되면 그것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만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것도 영원하지 않은 것, 변하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도 근원적인 어리석음에 해당합니다. 또 불교에서 바라볼 때는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물질과 정신의 결합이다. 또는 오온의 화합이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이 오온의 각각이라고 하는 것들이 다 변하는 것입니다. 물질도 변하는 것들이고, 마음도 물질보다 훨씬 빠르게 변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라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집착을 하면서 이 나라는 것이 실체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라고 하는 자아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런 어리석음.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세 가지 어리석음에 해당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고, 괴로움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이 전형적인 어리석음입니다.
결론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사성제 또는 연기에 대한 무지. 또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생각하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런 것을 어리석음이다. 또는 진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어리석음이라 한다. 그 내용은 무상한 것을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괴로움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전형적인 어리석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업을 일으키게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간단히 좀 살펴보면요,
이 무명이라는 것이 아까 말씀드렸듯이 예를 들면 내가 가진 재산이나 권력이 영원하고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자만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잘났고, 남들보다 내가 훨씬 월등하다. 우월하다. 라고 하는 생각으로 가게 되고, 이렇게 하다 보면 우리 마음에 자만의 마음이 자꾸 일어나게 되고요. 이는 하나의 불선업에 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 무명의 잘못 상황을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이런 자만에 빠지게 되면 이것도 무명 때문에 이런 불선업이 일어나는 거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죠. 또 하나의 예로, 우리가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만약에 내가 나에게 자아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자기에 대해서 굉장히 집착을 하게 될 겁니다.
아~ 이것은 나다. 내가 잘나야 돼. 내가 더 잘돼야 돼. 라는 이런 에고 의식, 이기주의적인 생각은 점점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남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또는 남에게 큰 불이익을 주든 말든, 나 하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나만 잘되고 남에게 패해와 고통을 주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도 아주 큰 불선업이 되겠죠. 또 하나. 우리가 괴로움인 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또 큰 악업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장 대표적인 게 도박이나 마약, 이런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 순간의 쾌락 때문에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그 행위를 계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박을 하고 마약을 먹고 이렇게 하다 보면 그 순간은 잠시 즐겁고 쾌락이 올지 몰라도 그로 인해서 나타나는 수많은 괴로움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하고, 또 자기가 가진 재산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는 불선업들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업들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그래서 이런 불선업이 일어날 때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어리석음입니다. 이 어리석음을 통해서 원하는 대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집착합니다. 이것이 일종의 탐욕입니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대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싫어하고 버리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냄과 탐욕, 이런 불선한 마음의 뿌리가 되는 것들은 다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이 무명 때문에 불선업이 일어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 무명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 무명 때문에 윤회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 무명을 벗어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삶의 이익이 된다라는 생각으로 이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보시를 하고 계율을 잘 지키고, 또 선정을 닦고, 삼매를 닦고, 지혜를 닦고, 이러한 행위들은 무명을 버리기 위해서,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무명 때문에 불선업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 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명을 버리기 위해서 선한 법을 자꾸 일으키게 되면 이는 무명 때문에 선법이 일어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무명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선업이 일어나기도 하고 불선업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를 합쳐서 우리가 무명 때문에 행이 일어난다. 이렇게 한마디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행에 대해서 또는 업, 불선업, 선업에 대해서는 앞에서 선업에는 욕계선업과 색계선업. 무색계 선업이 있다는 것을 설명 드렸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이 무명이라는 것 때문에 어떤 행위라고 하는 선행이 일어나기도 하고 불선행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는 이 구조에 대해서 오늘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거로 마치고요, 다음 시간에는 행 때문에 식이 일어나는 그 관계에 대해서 계속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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