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러분 ‘모른다’하고
‘내 이름도 모르겠다. 존재할 뿐이다.’
‘존재하는데 내 이름은 모르겠다.’ 하시다보면,
개체적 자아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고 존재만 나타나요.
그게 여러분의 알이에요.
그런데 그 존재감 상태에서도 들여다보면
그 존재감도 텅 빈 거랑 이 알이랑 벌써 이원성이 존재하죠.
분열은 아닌데 이원성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때.
좀 어려운 얘기를 했습니다만.
그래서 우리가 이걸 뭐라고 하냐 하면, ‘태극’이라고 하죠.
태극은 플러스 마이너스 음양을 그려놓죠.
이미 이원성이 배태되었다. 시작되었다.
‘나’라는 존재감에는 이미 이원성이 들어 있어요.
하지만 시공 안에 잡히진 않아요. ‘나’라는 존재감이.
여러분이 느끼시는 시공간 안에서 느끼는 개체적 자아,
‘이렇다 저렇다’ 생각하는 것은 에고성이죠.
그러면 그것은 생각, 감정, 오감과 함께 작동할 때 우리가 에고를 느끼죠.
생각하는 나,
울고 웃는 나,
보고 듣고 하는 나,
그 나가 아닌 그 나.
그 순수한 나는 이 자리입니다.
이것을 알이라고 그래요. 알. 예전에.
그리고 이 알이 나오기 전이라는 것은
그냥 존재만 할 때, 순수 존재, 거기서 ‘나’라는 존재감, 이게 묘한 차이죠.
순수 존재감과 나라는 존재감의 차이는요,
여러분이 일체 ‘모른다’하고 ‘나’라는 존재감으로 존재할 때도
그 안에 미묘한 이원성이 있어요.
미묘한 이원성이에요. 현상계의 이원성이 아닌.
그때도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는 자를 알아차리는 미묘한 느낌이 공존해요.
하지만 개체성은 느껴지지 않아요.
내가 아무개 누구라는 것은 알 수 없어요.
시공의 흐름도 모르겠어요.
이 상태가 불교에서 사선정 상태입니다.
멸진정 때 느끼는 게 순수 존재감이고,
사선정 때 느끼는 것은 ‘나’라는 존재감이에요.
‘나’라는 존재감은 우주의 시작이요.
한 초점이 잡혔으니까요.
자, 아무것도 없던 데서 초점이 잡혀야 그게 부풀어지면 우주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대우주도 이렇게 된다면
소우주는 무엇이 부풀어질까요?
생각, 감정, 오감이 부풀어지죠.
이것이 부풀어진 것이 여러분이에요.
보고, 듣고, 하는 거 다 여러분 마음 안에 들어온 겁니다.
제가 보이시죠.
여러분 마음 안에 들어온 거예요.
이게 부풀어진 거예요.
보이는 저, 여러분 마음에 나타난 저, 오감의 대상이죠.
그러면 오감을 날려버리고, 감정을 날려버리고, 생각 날려버리면, 씨앗만 남겠죠.
여러분 우주의 씨앗이 남겠죠.
그게 나라는 존재감이에요.
그런데 거기도 가만히 느껴보면 이원성이 있더라는 거예요, 미묘한.
순수하게 알아차리는 자가 있고,
그 알아차리는 자를 미묘하게 느끼고 있더라는 거예요.
미묘한 느낌과 그 두 개의 이원성이 존재하죠.
그래서 태극을 이렇게 그려 놓은 거예요
태극만 해도 우주의 시작인데 여기 이미 미묘한 이원성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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