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단력: 칸트는 판단력을 개별적인 것들을 보편적인 개념과 관련시키는 과정으로 정의합니다 [02:39]. 그는 다음을 구별합니다.
- 미적 판단: 칸트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을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반성적 판단으로 간주합니다 [04:43]. 그는 미적 판단에 대한 네 가지 주요 조건을 제시합니다 [05:31].
- 세계 연결: 칸트는 예술을 통해 자연의 세계 (과학)와 자유의 세계 (도덕)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고 했습니다 [16:01]. 그는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높고 초월적인 영역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17:09].
- 상상력과 목적: 칸트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우리의 능력이 사물에서 "합목적성"을 인식하도록 해주는 우리의 상상력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우리를 신성한 목적과 연결해 줍니다 [17:45].
오늘은 칸트의 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갈량은 유비를 만나서 <천하삼분지계>를 제안합니다.
천하삼분지계는 조조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조조 손권 유비 축으로 천하를 셋으로 나누고 서로 견제하자는 계획인데요.
이때 제갈량은
“솥이 똑바로 서려면 다리가 셋이 있어야 한다”는 비유를 듭니다.
그러니 평생 도망이나 다니면서 조조와 송건의 시다바리로 살았던 유비한테
천하삼분지계는 정말로 마음에 들었겠죠.
플라톤도
인간의 영혼에는 3개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성의 영역, 의지의 영역, 욕망의 영역인데요.
하지만 천하삼분지계처럼
이성, 의지, 욕망이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은 아예 순위를 정해 버렸는데요.
이성이 1등, 의지가 2등, 욕망이 3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성이 의지를 통해서
욕망을 컨트롤해야 한다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성의 결과물이 학문이고
의지의 결과물이 종교죠.
그리고 욕망의 결과물이 예술이에요.
그러니 예술은
그냥 학문의 시다바리 역할이나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듣는 시다바리 열받겠죠.
그래서 칸트는 예수를
학문, 종교와 같은 지위로 올려놔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학문 종교, 예술이 소치의 발처럼 있어야
인간이 똑바로 설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칸트는 3대 비판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을 쓴 겁니다.
순수이성비판은 학문에 대해서
실천이성비판은 종교에 대해서
판단력비판은 예술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칸트를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철학자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바로 시작하시죠.
--미적판단
먼저 판단력 비판에서 판단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죠.
판단이란 간단히 말해서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에 포섭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걸 보고 의자라고 하죠.
이걸 보고도 의자라고 해요.
이걸 보고도 의자라고 판단을 합니다.
즉 이처럼 각각 다른 개별적인 것들을
의자라는 개념으로 포섭을 해요.
이것을 바로 판단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죠.
-우리는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중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생기는 것도 중력 때문이라고 하죠.
-그리고 사람이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중력 때문이라고 판단을 합니다.
즉 이러한 개별적인 현상들을 보고
중력이라는 법칙으로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개별적인 대상이나 개별적인 현상을
개념, 법칙, 원리에 포섭하는 것을 판단이라고 합니다.
판단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입니다.
규정적 판단이란 앞에서 본 것처럼 개별적인 것을
의자나 중력과 같은 이미 주어져 있는 보편적인 개념이나 법칙에
포섭하는 판단을 말합니다.
이건 아주 간단하죠.
이미 있는 개념이나 법칙에 연결만 시켜주면 되는 겁니다.
문제는 반성적 판단인데요.
반성적 판단이란
개념이나 법칙이 없는 상태에서
개념이나 법칙을 만들어서 포섭을 하는 판단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이건 뭐죠?
이런 이미지를 포섭할 수 있는 개념이 있나요?
없어요.
그럼 이건 뭐죠?
이런 이미지를 포섭할 수 있는 개념도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이미지를 개념으로 포섭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다가는 ‘내란의 예감’이라는 개념을 붙여놓고
여기에다가는 ‘금지된 재현’이라는 개념을 붙여놓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들을 만들어 붙이는 데에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천재들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을 [미적 판단]이라고 하는데요.
이러한 미적 판단은 반성적 판단입니다.
반성적 판단에는 상상력이 필요하죠.
그래서 미적 판단도 상상력이 있어야 가능한 겁니다.
칸트의 미학에서 말하는 상상력이란
어떤 대상을 파악하면서
“이것을 어떻게 포섭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일종의 자유로운 놀이, 유희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희도 어떤 방향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놀이에도 규칙이 있어야죠.
안 그러면 개판되죠.
마찬가지로 미적 판단은
상상력의 놀이이지만 최소한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범주에요.
칸트가 말하는 범주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따라서 미적 판단의 조건도
이러한 4가지 범주와 관련이 있습니다.
성질의 범죄에 따른 조건을 무관심한 관심
불량의 범죄에 따른 조건을 주관적 보편성
관계의 범주에 따른 조건을 목적 없는 합목적성
양상의 범주에 따른 조건을 주관적 필연성이라고 합니다.
말이 조금 어려운데요.
이제 이것을 하나하나 풀어보죠.
**미적 판단의 첫 번째 조건은 무관심한 관심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심]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하는데요.
이런 쾌적한 곳에서 살면 편안하겠지만
이런 불결한 곳에서 살면 불편하겠죠.
세상에 이런 일들만 일어난다면 기쁘겠지만
세상에 이런 일들만 일어난다면 슬플 겁니다.
길을 걷다가 이런 걸 발견하면 즐겁지만
이런 걸 보게 되면 불쾌해집니다.
이것은 감각적으로 유발되는 쾌와 불쾌이고
이것은 도덕적으로 유발되는 쾌와 불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적으로 유발되는 쾌와 불쾌입니다.
그런데 감각적 쾌와 도덕적 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심인데요.
목이 마르면 물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추우면 옷에 대한 관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굶주린 사람들이 없어졌으면 하는 관심
그리고 뺑소니 차량을 잡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감각적 쾌와 도덕적 쾌는 관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적인 쾌는 이런 관심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관심하다라고 하는 겁니다.
예컨대 우리가 이런 여자를 보고 즐거운 것은
미적인 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뭔가 다른 데 관심이 있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명품을 보고 즐거운 것도 미적인 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관심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인데요.
미적인 쾌란
무심코 길을 가다가 길가에 핀 꽃을 보고 느끼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꽃을 보면서 가지게 되는 즐거움은
감각적 관심이나 도덕적 관심과 관련이 없어요.
그냥 보는 거예요.
그냥 관조하면서 즐거운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무관심성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적인 쾌는
어떤 관심과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때 말하는 관심은
일종의 약한 의미의 사회적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여성이 외출할 것도 아니면서
집 안에서 조금이나마 얼굴을 꾸미고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고 합시다.
딱히 누구한테 보이려고 그런 것도 아닌데요.
왜 그럴까요?
이때 이 여성은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있는 겁니다.
아마 이 여성이 평생 무인도에 살게 된다면
그리고 평생 다른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없다면
이 여성은 꾸미기는커녕 옷도 입고 있지 않을 겁니다.
막연한 관심조차 없어지기 때문이죠.
미적 판단은
도덕적 판단이나 사회적 관심과 관련이 없지만
집 안에서 얼굴을 꾸미는 등
약한 의미의 사회적 관심과는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것을 ‘무관심한 관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미적 판단의 두 번째 조건은 [주관적 보편성]입니다.
미학에서 중요한 문제들 중에 하나는
“도대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있는데요.
하나는 아름다움이란
“여기 작품 속에 들어 있다”라는 입장이고요.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은 그냥 돌덩어리일 뿐인데
아름다움이란 내가 이 돌덩어리를 보면서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전자는 아름다움이란 객관적이라는 입장이고
후자는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이다라는 입장입니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움이란
이러한 작품 속에 들어 있는
객관적인 속성이라는 입장이 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컨대 플라톤의 <미의 대이론>
즉 아름다움이란
이러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비율이다와 같은 입장을 말하는데요.
그런데 어떤 것이 객관적인 속성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이 작품 속에서 아름다움을 볼 것이고
따라서 아름다움이란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객관성과 보편성은 짝을 이루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아름다움이란
이 작품이 가지는 객관적인 속성이 아니라
이 작품을 보고 있는 나의 주관적인 감정이라고 말을 했죠.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면
아름다움이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개별적인 감정이라고 봐야 합니다.
미적 감정은 보편성과 어울리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이러한 미적 감정을 보편적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꽃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을 한다면
나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이라면 가지는 최소한의 조건 속에서 갖게 된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도 이 꽃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라는 것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꽃이 아름답다라는 것은 보편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미적 판단은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미적 판단이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미적 판단의 무관심성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이런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데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겠죠.
그래서 관심이 있으면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무관심하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에 무관심한 다른 사람들도 아름답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길가의 꽃을 보면서 친구한테
“야 이거 이쁘지 않냐?”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미적 판단은 주관적이면서 보편적이다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미적 판단의 세 번째 조건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입니다.
이 꽃은 아름답죠.
만약에 신이 이 꽃을 창조한 거라면
이 꽃을 이렇게 창조한 목적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 아닌 이상
신이 왜 꽃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꽃의 모양을 보니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답고 대칭적일 수가 없겠죠.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신이 왜 이 꽃을 이렇게 존재하도록 만들었는지
그 목적은 모르지만
어쨌든 신은
이 꽃이 이렇게 존재하도록 만든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꽃은 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즉 합목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목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합목적적이라고 가정하고 하는 판단을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미적 판단의 세 번째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미적 판단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합목적적 특징이 이 꽃에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 합목적적인 형식이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대전제는
세계가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은
이 자체가 원래 이렇게 생겨서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이
이것을 이렇게 보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합목적성도 마찬가지인데요.
이 꽃이 합목적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 꽃이 합목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합목적적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릿속에 이미 합목적적 형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합목적적 형식은
범주와 같이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자유로움 속에서 동작하는 형식인데요.
비유를 하나 들어보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 말은 소쩍새 울음이 원인이 되어서
국화꽃이 피어나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서 보면
국화꽃을 피우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다는 말도 됩니다.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말도 안 되죠.
하지만 시적 관점에서 보면 그럴듯합니다.
즉 국화꽃이 소쩍새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 같다는
즉 합목적적이라는 표현이 그럴듯하다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국화꽃과 소쩍새를 엮는 그 솜씨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이때 우리가 파악한 것은
바로 합목적적 형식입니다.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 목적과
그 결과물의 관계가 만드는 형식이라는 겁니다.
**미적 판단의 네 번째 특징은 [주관적 필연성]입니다.
주관적이란 앞에서 말한 대로
아름다움이란 객관적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감정이라는 거였죠.
그런데 여기서 필연성이란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필연적으로 만족감을 느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미적 판단은 주관적인데
어떤 사람이 아름다움을 보면
필연적으로 만족을 할 수 있는 걸까요?
그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공통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을 보면
필연적으로 만족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그러한 공통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그거 증명할 수 있나요?
그거 증명할 수 없어요.
그것은 마치 인간이 도덕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우물가로 기어가는 것을 본 모든 사람은
아기를 끌어안았다가 안전한 데로 옮기겠죠.
그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도덕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데요.
왜 그런 도덕감을 가지고 있죠?
몰라요, 그냥 그래요 인간은 원래 그래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만족감을 느끼는 그러한 공통감이 있다는 겁니다.
**자 정리합시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세 개의 영역
이성의 영역, 의지의 영역, 욕망의 영역으로 구분했습니다.
-이성의 영역은 사실의 세계, 자연과학의 세계, 지식의 세계이고
-의지의 영역은 당위의 세계, 초월적인 세계 믿음의 세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두 개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칸트는 이 두 개의 세계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보았습니다.
예컨대 사실만 보면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자를 도와야 합니다.
이처럼 사실의 문제와 당위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는 사실의 세계를 말하고
실천이성 비판에서는 당위의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 두 개의 세계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건널 수 없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칸트는 사실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칸트는 그것을 아름다움
즉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쓴 책이 바로 <판단력 비판>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왜 사실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가
아름다움을 매개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쉽게 말해서 칸트는
“왜 학문과 종교가 예술을 매개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여기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 있지만
제가 이해한 방식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현실 세계를 봅니다.
하지만 과학을 통해서 신의 세계, 초월적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세계와 초월적 세계의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는데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시면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월적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심연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판단적 비판에서 말하는 상상력이란
개별적인 대상이나 현상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보편적인 것에 포섭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칸트는 이러한 상상력은 바로 아름다움을 보는 능력
즉 예술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합목적성 개념과 연결이 됩니다.
어떤 대상이 합목적적이라는 것은
그 대상이 신이 그것을 창조한 목적에 부합한단 말이고
따라서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결국 신의 목적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상상력을 통해서
대상의 합목적성을 보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바로 신의 목적
신의 계획을 휠끔이나마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신이 거주하는 세계
즉 초월적 세계, 당위의 세계, 도덕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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