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당신이 놓쳤던 불교의 가증스러운 두 얼굴!

Buddhastudy 2024. 10. 23. 19:39

 

 

익히 알듯이 불교의 가장 근간이 되는 가르침은

고집멸도의 사성제에 있습니다.

그럼, 하나씩 알아볼까요?

 

1) 고의 진리

 

인생살이에 대한 극심한 괴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불교는 시작하지 못합니다.

왜 불교 수행을 하려면 괴로움부터 느껴야 할까요?

모든 것에 만족하며 도가의 무위자연처럼 순리대로 살다 가면 되지 않을까요?

 

불교에서의 괴로움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오는 피조물의 한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생로병사에서 나오는 허망함에 대한 고뇌이지요.

 

이것에 강렬히 반응해야만

그 해법을 구하려는 마음이 나오고

여기서 불교가 첫발을 떼게 됩니다.

 

 

2) 의 진리

 

괴로움의 원인이 무얼까요?

괴로움의 원인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근간은 역시 시간과 공간의 제약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피조물이 된 걸까요?

그건 특정한 시공에서

지금처럼 살다 가게끔 프로그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에 완벽하게 걸려서

스스로 시공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럼 프로그램에서 벗어나면 되지 않을까요?

차원이란

그 경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공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차원에 갇혀 있게끔 하는 프로그램을 일러

불교에서는 착이라 합니다.

착이란 쉽게 말해

프로그램에 찰싹 붙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려도

결국은 프로그램대로 살다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 진리와 의 진리를 통해 분명히 말합니다.

너의 괴로움은 시공의 한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요.

 

 

3. 의 진리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차원이 설정한 프로그램에서 탈출하면 됩니다.

그러려면 착을 끊으면 되고요.

 

착을 어떻게 끊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착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

[생각을 끊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념무상, 무아지경, 삼매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생각이 끊긴 상태 역시 일종의 입니다.

생각이 멈춘 상태에 달싹 붙어 있는 것이거든요.

무턱대고 생각만 하지 않는다고

차원의 설정값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라보는 관법,

즉 위빠사나가 등장합니다.

어떤 착도 관하면서

그 착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훈련법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이것저것에 최대한 붙지 않으면서 나아가는 수행법을 통칭해

중도라고 부릅니다.

중도란 한마디로

착을 최소화하는 수행법을 말합니다.

 

자 그러면 위빠사나로서 중도를 걸어가면 수행이 척척 풀릴까요?

불행히도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로 중도를 걸어가도

끊임없이 착을 만들어내는 근본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입니다.

나 자체가 착의 궁극입니다.

 

수행을 통해 해탈을 해도 그 해탈에 달싹 붙습니다.

열반, 깨달음 같은 것들에도 강력하게 붙습니다.

그래서 중도로 수행에 어떤 성취를 얻어도

그 성취물에붙어 오히려 수행 이전보다 더 괴상하게 변합니다.

이런 이유로 깨달으면 괴물이 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가 있게 되면 []의 문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는 [무아]를 기치로 내겁니다.

 

착의 근원인 나에서 자유롭게 될 때

비로소 불교 수행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와 상반되는 것들이

불성, 본성, 참나, 아트만, 브라만, 여래장, 일심, 일체유심조 같은 명제들입니다.

 

사실 이런 수행의 방해물들은

브라만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나가 궁극으로 원하는 달콤한 유혹들이지요.

 

세존은 이런 꿀 발린 것들을 과감히 혁파하고

무아를 기치로 내걸었고

그래서 불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4) 의 진리

 

, 이제 여러분은 무아의 진리까지 터득했습니다.

터득까지는 아니어도 이해 정도만 했어도 온전한 불제자입니다.

 

무아를 이해하면 뭐가 남을까요?

나가 원하는 것들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의문]입니다.

 

존재가 뭘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존재의 비밀을 화두로 삼게 되고

여기서부터 도의 진리가 시작됩니다.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적 각성,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작점인 [1원인]을 알아야 하고요.

 

이것을 풀지 못하면 존재는 알 수 없고

세존이 일으킨 불교의 깨달음은 요원하게 됩니다.

 

 

이상의 고집멸도 사성제가 불교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하지만 작금의 불교는

브라만교에 두건을 쓰고

힌두교에 옷을 걸치며

불성이라는 얼굴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사실 불교와 상반된

불성, 본성, 참나, 해탈, 영생, 열반 같은 것들에

줄기차게 매달리고 있지 않던가요?

 

불교는 무아로서 일체의 착을 끊으며

중도에서 진리적 각성을 추구하는 수행법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차원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법을

세존께서 찾아낸 것이지요.

 

당신은 정녕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계시나요?

아니면 나가 잘 되기 위해 꾸며낸

해탈, 열반, 불성, 참나, 깨달음, 득도, 붓다 같은 명제들에

달싹 붙어 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