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불교 수행자는 예외 없이
붓다의 경지를 추구합니다.
붓다가 이룬 경지를 공유하려는 것이
수행의 궁극적 목표이니까요.
그렇다면 어떤 수행자가
붓다가 이룬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과연 붓다와 동등한 무상정등각을 이루게 될까요?
예를 하나 들어
절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칩시다.
상대적 관념이 모조리 증발하자
비교할 대상이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모든 것이 되는
절대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상대적 관념에서 도출되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당연히 제1원인의 문제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생과 사는 구별이 없어졌고
붓다와 중생의 이분법도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고 보니 번뇌는
그 자체로 보리(깨달음)였던 겁니다.
그냥 이렇게 모든 것이 되어
모든 것과 구분 없이 존재할 뿐입니다.
실로 화음경에 나오는 사사무애의 경지이며
금강경에 언급한 응무소주의 경지입니다.
사실 이런 식의 절대적 체험은
수행자들 사이에서 간간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가 사라졌으니
해탈이며 열반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절대의 경지를
제대로 체험하면 깨달은 것일까요?
아쉽게도 그건 그냥 말 그대로
절대에 관한 체험일 뿐입니다.
프로그램이 만든
또 하나의 설정값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걸 수시로 체험해도
프로그램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절대를 넘어선
또 다른 붓다의 체험이 있다고 가정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붓다의 경지를 함께 나누어도
일종의 깨달음 체험이지
실제로 깨닫게 되는 건 아닙니다.
영화를 아무리 봐도
그건 스크린 상의 영상이며
상상을 아무리 해도
그건 그냥 설정된 상상물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체험을 공유해도
깨달음은 함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체험과 진짜 깨달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 기준은 매우 간단합니다.
진리에 대해 아느냐 모르느냐입니다.
진리에 대한 각성이 그 잣대인 것이지요.
물론 깨달음을 가상으로 체험한 수행자도
그럴듯하게 아는 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는 척엔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분명한 답이 없습니다.
다분히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넘쳐나고
어떤 때는 시인이 되기도 하면서
간간히 궤변마저 섞습니다.
선문답처럼 모호한 표현을 주로 쓰면서
막힐 때는 불립문자와 언어도단을 내세우지요.
그러면서 모든 결론은
체험 속에 꼭꼭 숨어버립니다.
체험하면 알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왜 이들이 고사하는 언어는
늘 안개 속처럼 애매모호한 걸까요?
그건 앞서 말했듯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상과 실제가 다르듯
체험은
그 한계를 여실히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경지를 체험해도
당신은 깨닫지 못합니다.
체험 역시 일종의 프로그램이며
그래서 차원 너머에 있는 실존을
목도하지 못하는 겁니다.
당신은 아직도 가부좌를 틀고
특정한 경지를 체험하기를 원하시나요?
삼매나 선정에 몰입하면
깨달음이 열릴 것으로 잔뜩 기대하고 계시나요?
안타깝게도 당신의 상상물로 만든 경지에선
그 어떤 불교의 각성도 없습니다.
불교는 상상으로 오염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으니까요.
이것이 불교가
[무아]에서 그 첫발을 내딛고
[연기]를 나침반 삼아
[중도]를 걸어가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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