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나 윤회는
오늘날 가장 감수성을 자극하는 단어는 아니다.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삶의 환경에서는 스트레스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불인, 우울, 분노조절장애, 자살 등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괴로움은 상황이나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자신의 인식 체제에서 온다고 보는 것이
불교적 관점이다.
붓다 역시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으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해서만 얘기한다고 했다.
시공을 초월하여 공감되는 주제다.
괴로음은 인식되지 않으면
해석되고 판단되지 않으면 고통(pain)에서 끝난다.
여기에 인식과 해석과 평가가 들어가면
괴로움, 시달림(suffering)이 된다.
두 번째 화살이고 심리적 현상이다.
괴로움과 대칭되는 것이 자아 관념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나'라는 중심이 있으면 반드시 좋고 싫은 것이 생긴다.
좋고 싫은 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괴로움이 생겨난다.
내 뜻과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긋나는 것을 괴로움 즉 두카(dukka)라고 한다.
중심의 소멸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오늘은 깨달음과 윤회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용어이긴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괴로움이 문제다
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500년 전에,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깨달음, 그다음에 윤회가 있느냐? 없느냐? 라고 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그렇게 와닿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건 오래된 말이죠.
그 시대에 문제시되었던
그 시대의 한계를 갖고 있는
그런 말이기도 하죠.
물론 보편성을 갖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과관계라든지
해탈, 심리적으로 자유로워진다든지 하는 것은
영원한 인류의 숙제이긴 하죠.
어찌됐건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상식과 세계관과 열망을 반영한 것이
오늘날에도 꼭 그렇지는 않다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고
우리가 마음공부할 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그리고 윤회라고 하는 것은
하루에도 12번 변하는 이 상태의 어떤 변화를 가지고도
충분히 윤회를 끌어내서 얘기해 볼 수 있습니다.
제 말의 핵심은
오늘날 21세기 탈종교의 시대
세속의 시대이면서 또 생활인의 시대에
옛날 단어에 너무 그렇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은 다 직업을 갖고 있는 시대고
직장이나 프리랜서를 하고 있지만
직업을 갖고 있는 시대고, 경쟁 사회고
그다음에 분업화된 전문화된 사회이고
그다음에 지식이 중요한 사회죠.
여기서 우리는 목표 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고
또는 열망 혹은 비전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기를 끝없이 발전시켜 나가라라고 하는 요구를 받고 있는 사회죠.
이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공부가 무엇인가? 라고 하는
철저하게 자기에게 필요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 사람들은 옛날만큼, 2500년 전만큼
[깨달음]이라든지 윤회라는 말에 그렇게까지 반응하지는 않죠.
와 닿지가 않죠.
하지만 또 와닿는 오늘날의 압도적인 심리적 환경은 [스트레스]죠.
이거는 불안으로 갈 수도 있고
우울로 갈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살로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죠.
그런 점에서 보면
2500년 전에 붓다도
“오직 나는 괴로움과 괴로움으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해서만 얘기한다”라고 해서
‘이고등락’ 이라고 하는 것을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은 대개 통찰력 깊고
실제 문제를 말한 것 같다라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왜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가 있느냐?”라고 하는 것은
욕망의 좌절과 관계가 있죠.
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니즈(needs)가 있고
하나는 원츠(wants)가 있겠죠.
니즈(needs)라고 하는 것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식욕, 성욕, 수면욕
그다음에 물건으로 보면 의식주 이런 것들일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없으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건 충족돼야 되는 것이고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굉장히 생리적인 스트레스를 크게 받게 돼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거는 우리가 무조건 움직이게 돼 있습니다.
사흘 굶으면 움직이게 돼 있는 것이죠.
그다음 반면에 원츠(wants)라고 하는 것은
좀 사회적이고 문화적으로 형성된 또는 주입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욕망이라고 할 때
욕 자를 풀어보면
‘하고자 할 욕’ + ‘마음 심’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내는 욕망
그것을 ‘하고자 할 욕’ 대신에
‘욕심 낼 욕’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현대에서는 흔히 야망이라든지, 야심이라든지, 비전이라든지
미래 이미지라든지, 자기실현의 이미지라든지
이런 표현으로 쓰긴 하지만
원츠(wants)죠.
그리고 현대인들에게서 스트레스와 불안과 우울을 만들어내는
심리적 문제를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것은 니즈(needs)가 아니고 원츠(wants)죠.
문제는 어디까지가 니즈(needs)고 어디까지가원츠(wants)인가?
피로와 욕망의 경계를 구분하는 지혜가 그렇게 밝지는 않다 하는 것도
하나의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됐건 붓다도
스트레스에 집중해서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으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라고 이야기를 했죠.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든지 윤회라든지 하는 건 잘못
우리가 이거 중요한 개념이긴 하지만
잘못 다루면 희론
우스갯소리 헛소리의 지나지 않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또 하나의 형이상학으로 만들어서
우리가 짊어지고 다닐 필요는 없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니즈(needs)가 아니고 원츠(wants)
이 원츠(wants)라고 하는 것은
아까 니즈(needs)는 생리적인 거니까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돼 있거든요.
원츠(wants)는 좀 의식적이고 이론적이고 프레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프레임은 사실은
세상이 주입한 욕망이죠.
우리가 그 속에서 형성되면서 형성된 욕망이다, 주입된 욕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는 살아줘야 된다.
남부럽지 않게, 남 보란 듯이
이런 게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이 충족이 안 되면
그 마음이 그리고 있는 이미지가 깨지니까
충격이 오는 거고,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걸 아까 이야기한 야심, 비전, 자기실현,
또 그 위인의 생애를 본받자
이런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니즈(needs)와 원츠(wants)를 구분하는 지혜를 가지기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은
그 니즈(needs)와 원츠(wants)를 함께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는
참된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더욱 어렵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니즈(needs)와 원츠(wants)에 휘둘리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주객 전도가 어떻게 보면
괴로운 문제의 근본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괴로움을 만나게 되고
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쨌든 내 생각과는 다른 상황을 만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처리해 가면서 살아가야 됩니다.
괴로움은 한 두어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객, 밖의 상황이죠.
상황이 우리를 좌절시킬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라든지, 돈이라든지, 관계라든지
어떤 세상 자체라든지, 나에게 일어났던 사고라든지
이런 그것이 우리를 좌절시킬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좌절된 건가?
정확하게는 내가 살고 싶은 삶에서 좌절이 되는 거죠.
원래 그런 게 없었다면
좌절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우리는 마음속에
항상 “미래에 어떻게 되겠다”라고 하는 야심을 갖고 있어 때문에
목적을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꺾일 때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부분에서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하는 것이 중요한데
보통 이렇게 좌절을 했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심리 상태가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상태로 흐르게 되죠.
그래서 이 부정적인 상태가
우리에게 좋은 삶을 만들어줄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누구냐?”라고 하는 문제로 다시 넘어가서
“나는 일꾼이 아니고, 나는 여행객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실제로 우리가 찬찬히 생각을 해보면
우리는 일꾼보다는 여행객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이 굽이 저 굽이 돌아가면서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또 잠깐 발을 담그기도 하지만
또 다른 고개를 넘어가야 되는 여행객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상황이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것이죠.
그리고 나의 여행은
“이 그림만 나는 볼 거야.
나는 이 풍경만 내 여행에 집어넣을 거야”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풍경 저런 풍경
중요한 것은
여행객은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행객의 관점을 가지면
이 상황이 내 뜻과 맞지 않을 때에
내 뜻을 좀 유연하게 하거나 지우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충돌이 일어나지 않죠.
또 심지어는 내가 여행객이 아니고
오더를 받아서 일하는 일꾼이다.
내가 작업을 해야 되는 사람이다라고 하면
목적이 분명하고 해야 될 일이 선명한데
그게 좌절됐다라고 할 때는
오더가 변경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것 또한 그렇게까지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딘가에 닻을 딱 내리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면
그 거리감, 또는 그 낙차, 격차
이것이 거대한 불편이라고 하는 에너지를 일으키는 것이죠.
두 번째는 또 타인이 나를 괴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에 의한 상처를 많이 받고
특히 가까운 사람으로부터의 상처는 길고도 깊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크게 상처를 준다라고 하는 건데
또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되기 때문에
사람이란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상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죠.
그래서 그럴 경우에 내가 가지게 되는 마음은
피해자라고 하는 의식이거든요.
나는 그 사람에 의해서 피해를 입었다.
나는 그 사람 때문에 기가 눌렸고
그 사람으로부터 모욕을 당했고
그 사람으로부터 침해를 당해서 내가 지금 많이 훼손되었다
이런 생각을, 또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식당 같은 건 안 가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결국 권력관계 힘의 관계라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가 알든 모르든,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든
내가 힘이 세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죠.
근데 내 힘이 미치지 못해서
혹은 뭐 그래도 하여튼 죽기 살기로 해봤는데
안 돼서 내가 지면
나는 피해자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정확하게는
마음속에서든 또는 행동으로든 나는 싸웠던 겁니다.
싸웠는데 진 거죠.
그리고 싸우고는 싶은데
이게 뒷감당이 안 돼서 포기하면
그것도 어쨌든 그림으로 싸웠는데 진 거죠.
그래서 정확하게는 피해자가 아니고 패배자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자기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힘이 부족했던 것일 뿐이죠.
그럴 때 깨지는 것은
“사실은 나는 이게 옳다고 생각하고, 나는 이게 맞다고 생각하고
나는 니가 나한테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니가 나한테 이렇게 안 했잖아” 라고 하는 것 때문에 상처를 받고
그 상처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생기냐?
사실은 관점을 바꿀 필요도 있습니다.
뭐냐 하면
타인이 나의 정당한 권익을 침해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상처받은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이래야 된다, 마땅히 이래야 된다.
사람과의 관계는 이래야 되고 너는 나한테 이래야 되고 하는
To Be
그래야 된다라고 하는 그 마땅함이
깨지거나 훼손되거나 상처받았을 수 있거든요.
그러면 그런 걸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상처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정말 경우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죠.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죠.
하지만 그건 그거는 좀 예외적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빈도수를 보면
대부분은 우리 마음속에 닻을 내리고 있는 기준이 좀 문제일 수 있고
그다음에 물론 오랫동안 가스라이팅이라든지
오랫동안 구조적으로 눌려서 사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분명히 트라우마가 되고
우리의 정신을 불건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대안이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환경이나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피해자가 아니라 문제가 어디서 생겨나는가
그러니까 그 사람을 비난하기보다는
문제 중심으로 탐구를 한다고 하면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서도 찾을 것이 많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흘러가다가
막 물이 울고 막 솟구치고 막 우탕탕탕하고
흐름이 거칠어지는 곳을 보면은
물이 아니고
그 바닥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격차가 있고 그러면
그 물이 고요히 흘러가다가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격류가 되고, 와류가 되고, 그렇다는 겁니다.
그 이치로 보면은
내가 겪는 괴로움이라기보다는
나의 마음의 구조가 만들어내는,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격류고 와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바깥에 홍수가 날 수도 있고, 오염물질이 투입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게 전부다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요히 흐르는, 호수처럼 흐르는 강물과
소리를 내면서 시끄러운 강물의 흐름을 보면
그건 분명히 밑바닥의 구조의 차이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 해야 되는 첫 번째 작업은
바깥에 홍수나 오염물질이 투척은
내가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밑바닥을 평평하게 하든가
아니면은 내가 밑바닥이 평평함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잘 이해해서 잘 알아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원망하는 마음을, 좌절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됩니다.
그것이 세 번째, 괴로움을 치료하는
자신과의 문제를 처리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움을 옛날 말로 하면 역경계
좋은 경계가 아니고 나쁜 경계, 나쁜 시추에이션
베드케이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이 원치 않는 상황에 우리가 부딪혔을 때도
몇 가지 방법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가 우리 마음속에 룸을 많이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래서 원치 않는 손님이 오면
“1호실에 묵으세요.”
열쇠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 가서 혼자 노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원치 않는 상황은 무조건 생겨나니까
그때마다 “넌 왜 왔니? 뭐 언제까지 있을 거니?”
뭐 이렇게 붙어서 싸우면
거기에 에너지를 더 주는 꼴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방을 한 개 내줘서
저기 가서 놀다가 놀 만큼 놀다가 가라
이렇게 할 수 있느냐
그것은 내 마음을 열어서 크게 확장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주인 없는 집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상처를 받을 사람이 사라지는 겁니다.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중심 없는, 그냥 존재가 되는 거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중심이 있으면
결국은 나 아닌 것과 부딪힐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공부해서 어떻게 하냐?
우리는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고
인간관계와 상호간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서
궁극적으로 어떻게 성공하고 행복해지는가를 이야기하지만
여기 정확한 답은 뭐냐 하면
자기라고 하는, 자아라고 하는 중심이 있는 한
그거를 자기라고 생각하는 한
답은 없다.
그건 필연적으로 괴로움과
유아_ 괴로움과 자아는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이고_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무아가 돼야 된다.
이때 무아는 내가 정신줄을 놓는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심리적인 중심점이 필요 없어진다.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거죠.
내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으면
“이래야 되는데 저랬네”라고 하는 격차가 생기고
그 격차가 곧 괴로움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좌절을 하거나 상처를 입으면
마음에 원한이 생깁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원한을 가지게 되고
상대방을 저주하게 되고
앙심을 품게 되고
내 마음이 어둡고 흐려져서
내 마음에 곰팡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죠.
결국 접이불상
접하지만, 접촉하지만 상처받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그리고 상이불사
상처받으면 잘못하면 죽거든요.
그러니까 상처받을 수는 있지만
덧나지 않고,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건강함을 유지하는 것은
이런 역경계, 괴로운 상황에서 내가
내 마음이 증오와 저주와 앙심과 트라우마와
이런 식으로 마음이 굳어지고 어두워지고 묶이지 않게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되는데
그러면 자기 손해일 뿐인 이런 부정적인 마음으로
세팅된 것을 막는 것이 뭐냐?
궁극적으로는 중심이 없는 자기, 그죠?
자아라고 하는 심리적 중심이 없거나
적어도 자아가 하나의 어떤 필요한 도구로 우리가 잘 쓰면 되는 것이지
그 자아가 주인 노릇을 하게 놔두지 않는 것
그래서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라고 하는 것이
핵심적인 화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로 내 삶의 주인이라면
생각을 해보면 뻔하죠.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즉각즉각 조정해서
나는 좌초할 일이 없고
역풍에도 돛을 달고
앞으로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근데 “나는 이것 때문에 안 됐어”라고 하면
거기서 인생이 끝나는
그러면 그 안에
원망하는 마음, 한, 저주
이런 것들로 어두워지게 된다.
그런 사람이 행복해질 가능성은
다시 운에 기대야죠.
운이 좋은 운이 와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잘 되면
그럴 텐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다시 이고득락을 정리하면
괴로움에 벗어나서
낙을, 즐거움을 얻는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오늘날 단어로 이야기하면
스트레스, 우울, 분노, 분노조절 장애, 그다음에 불안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느냐
첫 번째는 아까 룸을 많이 만들자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와서 놀다 가라라고 해서
확장 전략이 있고요.
두 번째는 나라고 하는
나는 이런 사람이고, 나는 이 정도 누려야 되고 뭐
이런 나라고 하는 자기 중심점을 스스로 지우는, 소멸 전략이 있습니다.
“나는 이게 좋아, 나는 이건 싫어”라고 그걸 너무 분명하게 하는 사람은
전선, 싸워야 될 장소가 많은 사람이죠.
그러면 좀 문제가 되겠죠.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옛날부터
Non-judgment awareness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라’ 라고 하는 얘기를 강조합니다.
근데 우리는 항상 판단하는 눈으로 사물을 보니까
“저건 저래서 틀리고 이건 이래서 맞고”
“이건 좋으니까 내가 가져야 돼”
이런 밀고 당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좌절한 마음이나 상처 입어서 힘들어하고 있는데
누가 나타나서
“야, 그게 아니고 상황이나 사람 문제가 아니야, 니 문제야
너의 그 어떤 욕망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자아의 중심을 아마 해체해 봐
그러면 대부분의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네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거
그리고 그 안경의 굴절률 때문에
너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네가 원하는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무조건 다를 거니까
그 불일치와 충돌이 너를 괴롭히고 있는 거야.”
이게 붓다가 발견한 핵심적인 진리이거든요.
근데 우리는 그런 걸 받아들일 수가 없죠.
“아니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런 스트레스를 내가 해결해서
집중력을 발휘해서 성공할 수 있는지
이쪽으로 우리는 가 있으니까
붓다 얘기의 핵심을 우리가 들을 수가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붓다는
그 안경을 벗어라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라
그 닻을 올려서 자유로워지라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붓다에게 있어서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은 어리석음이다.
밝지 못한, 깊지 못한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근원은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돼야 된다’라고 하는 그 자아 관념이 있는 한
우리는 슬픔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슬프고 고난당하고 그게 인생이야”
그러면서 “때로는 기쁘기도 하고 때로는 성취하기도 하고”
오케이,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너무 크게 아파하고 너무 크게 힘들어하고
괴로운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이 괴로움과 자아라고 하는 것이 직결되어 있다라고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다
하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은 깨달음이니 윤회니 진리니 뭐 이런 것
형이상학적인 단어보다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그 팩트 현실의 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마음공부를 해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Danye Sophia] 부처님은 제1원인을 깨달았을까? 그 증거 있어? 석가모니의 심오한 깨달음 탐구 (0) | 2024.11.14 |
---|---|
[Danye Sophia] 붓다와 똑같은 경지를 '체험'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 (0) | 2024.11.13 |
[Danye Sophia] 당신이 놓쳤던 불교의 가증스러운 두 얼굴! (0) | 2024.10.23 |
[현덕마음공부] 심리적 유연성의 두 가지 조건 (0) | 2024.10.22 |
[현덕마음공부] 대승기신론의 믿음은 또 하나의 형이상학인가? (0) | 2024.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