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이 있지만 6세기경
대승불교의 이론적 집대성이 이루어진 책이 [대승기신론]이다.
여기서 [믿음]은 무엇인가?
당연히 [일심]이다.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형이상학인가?
논쟁은 있으나
시대는 정신적 구심점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짧고 치열하고 덧없다.
자찻하면 삶이 지나친 원심력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져 버릴 수 있다.
불이, 진여, 불성, 여래장은 정신적 구심력을 제공하는 것 같다.
원심력이 극대화된 지금
다시 믿음이 대두되는 이유라고 하겠다.
단지 바르고 유익한 믿음에 대한 주의는 필요하다고 하겠다.
무아라면
전체이자 하나라고 하는 것은
같은 진리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오늘은 대승기신론
대승 쪽에서 가장 집대성된 문서인
대승기신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승기신론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기죠.
기신이죠. 기신
기신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을 일으킨다’라고 하는 것이죠.
대승기신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대승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결론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논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인도의 마명보살이 AD 2세기 정도에 서술했다고 돼 있는데
원본이 발견이 안 되어서
이게 중국에서만 발견되거든요.
그리고 이 체제라든지, 쓰는 용어라든지
이런 것들이 너무 중국스럽다 해서
위경까지는 안 되더라도, 이 경전은 아니니까
중국에서 집대성된 거 아닌가라고 하는 얘기가
점점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 논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이 구성을 보면은
서분, 정종분, 유통분 이렇게 되고, 또 서론, 본론, 결론이죠.
본론은 인연, 입의, 해석, 수행, 권수이익
이런 식으로 5 챕터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대승기실론에서의 핵심적인 내용 구성은
딱 5 아니면 6이라고 하는 숫자로 맞아떨어집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1부터 8까지 숫자를 가지고 초기불교를 한번 이해해 봤는데
대승기신론에서는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1, 2, 3, 4, 5를 그냥 다 갖다 붙여서
그냥 그대로 아주 대놓고 1부터 5까지를 내용으로서
리스팅,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이 대승기신론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어찌 됐든 대승기신론은
1세기경에 만들어진 반야부 경전이라든지 각종 대선 경전보다
한 500년 후에 어떻게 보면 만들어진 논서라서
아비달마의 청정도론이
초기불교 ,니까야보다 훨씬 뒤에, 거의 천 년 후에 만들어진 것처럼
대승기신론도 충분히 반야부 경전을 포함한 대승경전이 만들어진 이후에
한 500년 후에 집대성되었다.
그러므로 그 세계관과 수행 방법을 함께 아울러서 융합한 책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론과 실천 다 아울렀고
교리들을 다 통합을 했고
그래서 혹자들은 대승불교의 진수를 요약해 놓았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대승불교의 얘기들을 잘 편집했다
이렇게 이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은 대승기신론에서
이 (믿을 신)자라고 하는 것은
불교가 무슨 타력신앙
그러니까 타력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잖아요.
불교는 스스로 어둠을 이렇게 밝혀나가는 수행법처럼 이렇게 되어 있는데
대승불교에 오면 “믿으라”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 하나님을 믿으라는 얘기인가?
비슷합니다. 사실은
그래서 니까야에서 나오는 또는 아함경에서 나오는 모습은.
여시아문 신수봉행이잖아요.
여시아문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
그리고 들은 내용이 나오고
그다음에 믿고, 받들어서 행한다
이렇게 신수봉행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러니까 이거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직접 들은 얘기를 믿는 것이죠.
근데 이쪽 대승불교 쪽으로 오면
용어가 살짝 바뀝니다.
이 [신해행증]으로 바뀝니다.
뭐냐 하면 일단 [믿어라] 들은 게 아니고
일단 제시된 것을 일단 믿어라.
두 번째는 [이해해라] 그건 머리로 이해하는 거죠.
그다음에 이 행이라고 하는 것은 [행해봐라]
그러니까 마치 공식을 알았으면 적용해 봐라 하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그다음에 [증]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그 효과가 그런가를
[체득해서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조금 비슷한 것 같지만
초기 불교와 대승불교에서 신수봉행과 신해행증은
좀 다른 뉘앙스를 완전히 풍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대승기신론이 그렇게 양이 많지도 않다고 합니다.
대승기실론은 5가지 정도의 중요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숫자로 딱 일목요연하게 리스팅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대승기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죠.
1심, 2문, 3대, 사신, 오행
어떤 사람은 6자를 넣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조금 이야기해 보면
기신론에서 왜 기신, 믿음을 일으킨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
기신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일심]이죠.
일심,
일도 중요하고, 심도 중요하죠.
대승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다, 둘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고
또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다
이렇게 즉심시불, 이런 식으로 마음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끝까지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다, 둘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믿느냐?
두 번째는 ‘마음 밖에서 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을 믿느냐?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독교적인 배경으로 보면은
하나님이고
하나, 하나인 님이고
그다음에 불교적 배경으로 보면은 심이잖아요.
오직 마음
근데 그것조차도 둘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일심이라고 하는 것은
진여, 여래장, 불성 이런 다양한 용어로 쓰이지만
그 포인트는 이미 완전하다라고 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게 대승불교의 진수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모두 다 이미 성불해 있다.
그래서 지금 다시 닦아서 성불한다고 하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쪽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완전함을 깨닫고
이미 깨달아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그게 나중에 나오는 시각이라고, 다시 깨닫는다 이런 표현인데
그걸 깨닫고, 그걸 실감하고, 그것을 누려라
이렇게 되는 것이죠.
누리지 못한다면
즉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넌 아직 깨달은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知行合一 하고도 상통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일심이론,
일심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형이상학
그러니까 이게 나중에 힌두교하고도 구분이 안 될 정도의
불이일원론이거든요.
이 세상의 현상과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둘이 아니다.
나와 세계 나와 너라고 하는 것도 둘이 아니다.
불이잖아요.
둘이 아니다.
그다음에 일원, 하나다, 하나의 근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철학이 발달하면서 종합적으로는
불이일원론으로 인도사상계는 한 7세기 이후
이렇게 정리가 된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형이상학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붓다는
형이상학을 건강하지 않은
불건전한 생각으로 배척했거든요.
그래서 이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을 배척한 가장 큰 이유]는
경험에 기초하지 않은
이게 어떻게 보면 허구적인 얘기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건강하지 못하게, 혹은 나쁘게, 사악하게 활용되어서
사람들을 잘못 이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어쨌든 그때 당시에 붓다는 좀 더 경험주의적인 입장이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을 싫어했죠.
그래서 인간도 아트만이라고 하는 그런 형이상학이 아니고
그냥 색수상행식 또는 몸과 마음의 결합체라고 해서
이렇게 분해해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붓다의 관념하고는 맞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
두 번째는 일심 다음에 [이문]이거든요.
근데 하나인데 현상과 본질로 나누어진다.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어진다.
진여문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고, 감각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고
모양과 형체 아무것도 없는 진리 그 자체
법신, 여래, 진여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생멸문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식의 포착되는 현상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현상
근데 이것이 아까 일심이니까 둘이 아니고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진리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있다, 중첩되어 있다
중첩되어 있다는
동시에 있다, 중첩되어 있다, 동면의 양면처럼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있지만 아무것도 없다
색이지만 공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이문이 되겠습니다.
그게 두 번째고
--
[3대]라고 하는 것은
이 대라고 하는 큰 요소, 크게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이 있는 요소잖아요.
그러니까 3대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서는 체상용이거든요.
근데 그대로 씁니다.
중국에서 체상용을 그대로 써서
지수행이라고도 하죠.
지혜와 닭음, 수행과 그다음에 행함이, 실제 삶에서의 행함이
3개로 나누어 보인다.
그러나 일심이니까 그것도 다르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체상용을 이야기하고, 지수행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진여와 또 진여의 공덕과, 그다음에 진여의 작용
이런 식으로 나누는데
이거 대단히 중국적인 개념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서양에서는 보통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지행합일이잖아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여기 닦음이라고 하는
몸을 닦는 것 또는 몸과 마음을 닦는 거
닦음이라고, 지수행 이렇게 되고
그다음에 이 3개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설이라든지
모든 것은 이 사람들의 인식 체계에서는
3개를 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천지인이라고 하는 삼재와 관련이 또 되어 있죠.
그래서 이 3대를 이렇게
법신, 보신, 화신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같은 것의 세 가지 측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
그래서 네 번째는 그럼 뭐냐 하면
[사신] 네 가지 믿음이죠.
여기 대승기신론에서 신, 믿을 신 자가 나온 것이죠.
뭘 믿느냐?
불법승을 믿어라 그럼 3개잖아요.
불법승을 믿어라
그건 붓다시절과 똑같습니다.
근데 플러스 진여를 믿어라
그래서 네 가지 믿음이거든요.
불법승만 믿으면 되는데 초기 불교에서는
대승불교에 와서는
핵심인 진여
아까 1심이라고 그랬잖아요.
진여, 불성, 법성, 공, 여래
이런 똑같은 얘기입니다.
이 진여를 믿어라,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고
그것을 일으키는 것이 대승에 들어가는 입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오행]
오행? 이때 행자는 행한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승에서 말한 육바라밀을 욱여넣은 거죠.
그러니까 그 육바라밀이라고 하는 게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바라밀인데
여기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까지 가고
그다음에 지관이라고 하는 것을 넣어서
지_ 선정이고, 관_ 반야거든요.
그러니까 원래 6개인데 그걸 5개로 뭉뚱그려서
이게 숫자 놀음이죠.
그렇게 해서 오행이라고 하는 것을 또 제시를 합니다.
--
그다음에 이게 대승이 또 믿음과 또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도 저도 안 되면 6자, 여섯 글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육자]를 외워라
그 육자라고 하는 것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죠?
나무라고 하는 게 귀한다
아미타불 서방정토의 부처님이 아미타불에 귀한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할 수 그것만 해도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왜냐하면 그 믿음이 중요하니까
근데 기독교적으로 보면은
“주여믿습니다”
이것도 여섯 자잖아요.
“아버지하나님”
이것도 여섯 글자잖아요.
이런 6이라고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르겠으면 못하겠으면 그냥 매달려라, 믿음으로 매달려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근데 기독교에서는, 개신교에서는
아예 칭의론이잖아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들을 수 있는 거니까
기독교의 관점하고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머리나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는 측면에
상통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1부터 6까지 1부터 5까지, 1부터 6까지
대승기신론은 이렇게 숫자로 딱딱딱 적어서
대승의 세계관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1심이라든지, 그다음에 사신이라든지, 육자라든지 하는 것은
기존의 수행 체계보다 훨씬 더 믿음
일단 받아들여라, 그래야 보인다.
보이면 믿는 게 아니라
믿어야 보이는 것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화엄경에 보면은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믿어야 된다는 거지 않습니까.
근데 성경에도 보면 히브리서에 뭐 이런 말이 있잖아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이런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을 만한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데
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믿음을 강조할 때의 그 멘트는, 문장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이 왜 중국 께서 대승기신론이 중국 거 아니냐?
이렇게 중국 거라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는데
문제는 없습니다마는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1을 가리키는 혼원일기 무극
2를 가르치는 음양이잖아요. 이게 태극
3은 천지인 삼재잖아요. 이거 삼
4는 사상이잖아요. 태양, 소양, 태음, 소음, 사상이잖아요.
5는 오행이잖아요. 목화토금수
6은 뭡니까? 상하좌우에 그다음에 전후 까지 이렇게 해서
6가지 방향을 6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7도 있습니다. 칠성
그다음 팔괴
구궁
이렇게 중국에서는, 한자 문화권에서
그렇게 1부터 9까지를 굉장히 철학적으로 했는데
자세히 보면은
무극이라든지, 삼재라든지, 오행이라든지, 칠성, 구궁 같은 것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과 관계있습니다.
그러나 음양이라든지, 사상이라든지, 팔괴라든지 하는 짝수 쪽은
형상을, 구조를 나타내고 있거든요.
그런 차이도 있고 해서
한자 문화권에서는 일찍부터 1부터 9까지
사유의 체계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게 1심, 2문, 3대, 4심, 5행, 6자 이렇게 해서
대승기신론은 정확하게 중국화된 숫자 개념을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거는 중국에서 편집한 것 같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대승기실론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믿을 신]자잖아요.
근데 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
즉 경험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믿어야 되니까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을 끌어들이게 되고
그 형이상학의 핵심이
완전하다, 다 이루어져 있다, 두 개 아니다, 이런 거 아닙니까?
그건 붓다 입장에서 볼 때는
완전히 이거는 빼도 박도 못하는 형이상학이고
그런 부분에서 초기 불교하는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이야말로 이 형이상학
붓다가 배척한 형이상학을 끌어들이는 관문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입장에서는
경험에서 출발해도 진리의 실상을 알아가는데
그리고 괴로움을 없애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또 그렇게 차근차근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는 계정혜로
유학_ 배움이 있는, 닦음이 있는 것이지만
나중에는 사념청정 그렇게 해서
무학_ 배움이 없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할 일이 없는
그렇게 나아간다, 그렇게 된다, 이렇게 얘기했고
그게 그렇게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러니까 그게 2500년 전에는
모르겠습니다, 삶이 좀 단순했을까요?
그렇게 하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음이 경향성이 있는 의식
그러니까 행식이잖아요.
그래서 의도가 있는 의식에 가려서
즉 편향되지만 않으면
사물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약간 좀 소박한 반영론 이런 점이 있었죠.
그런데 대승기신론이 벌써 5세기 6세기 정도 되면은
다 소위 국가 체계를 이룬 짱짱한 고대 국가들의 시대잖아요.
이때는 좀 다른 이론? 다른 세계관이 필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거기서 포인트는 뭐냐 하면은
이 출발부터 완전하다, 그것을 믿어라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유학이 아니고 무학
계정혜 삼학이 아니고 무학
원래부터 배움이라는 게 논리적으로 필요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원래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깨닫고 있지 못할 뿐 착각하고 있을 뿐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은 닦는다라고 하는 게
무슨 도깨비 장난같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원래 깨달아 있다니까 [본각]이잖아요.
원래 깨달아 있다.
그럼 이렇게 살아도 돼?
근데 그건 또 아니죠.
왜냐하면 또 이렇게 살면 그대로 또 괴로우니까
그래서 만들어낸 말이 [시각]이다
그러니까 [다시 깨달아야 된다]
그러니까 “내가 완전하다라고 하는 것은 니가 모르고 있지 않냐?
그거를 깨달아야 된다.”
깨달음을 제작, 만들어가고
뭘 닦아서 이렇게 이렇게 만들어가고
그런 게 아니라
이미 완전하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깨달음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수행이 아니라 깨달음이 필요할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보통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 아닌가?” 싶은 차이를 잘 느끼기 어려운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승불교에서도 지관법이라 그래서
지관 그다음에 타좌,
그러니까 정좌명상, 그다음에 참선 이런 것들도 많이 하죠.
닦아가는 것도 많이 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진여, 법신, 그것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낸다 하는 것을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천년 전, 1500년 전 이야기를 우리가 왜 하느냐?
이런 것이죠.
믿음과 관련해서 우리가 마음공부할 때 생각해 봐야 될 것은
21세기 현대인들 삶이 되게 치열하잖아요.
열나게 뛰어야 되잖아요.
그러고도 불확실하고 불안정하잖아요.
그래서 불안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한데
어쨌든 삶이 치열한데
근데 또 짧아, 덧없이 짧아
저도 지금 60이지만 20~30대 어제 같은데 이미 종쳤어요.
덧없고 짧다.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의미도 잘 모르겠다.
예를 들면 사르트르 같은 사람은
던져진 존재, P2적 존재다 이런 표현을 하거든
내 던져진,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너무 짧다.
근데 나는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계정혜를 닦아서
차근차근 삼아승지겁
이거는 대승쪽에서 이야기지만
어찌 됐건 세세생생 닦아서 성불한다
이런 컨셉이
지금 우리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말이 사실은 좀 안 되죠.
말이 안 되죠.
왜냐하면 짧고 치열하고 덧없는 한 30년, 이렇게 플레이를 해야 되는데
그것이 계정혜의 길을 세세생생 간다?
이거는 좀 이상한 거죠.
그래서 우리 마음공부는 또 이 시대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그래서 결론이 뭐냐?
일단 결론부터 말해봐
이렇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 삶은 아까 치열하고, 짧고, 덧없기 때문에
자꾸 옆으로 퍼져나가고
산산이 흩어질 것 같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힘이 너무 세요.
물질의 힘이 너무 세니까
강력한 정신적인 구심점
은하계로 따지면 은하계가 흩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블랙홀 같은
정신적인 구심점
역설적으로 형이상학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근데 이미 6세기, 한 1500년 전에 대승의 이론을 집대성한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도 일반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상인들은 그 위험을 무릅쓰고 상거래를 하러 다녀야 되고
그리고 인생은 짧고, 평균 수명도 짧고.
그러니까 먹고 사는 거 하고 관계없이
보시를 받아서
굶을 걱정 없이 학문적으로 빠져 있는
그런 어떤 불교에 대한 강력한 반동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현대인들의 삶이 짧고 덧없고 치열하기 때문에
강력한 정신적인 구심력이 필요한데
그러나 그것이 또한 혹세무민하는 이상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초기 불교의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것을
한마디로 해서 [공]이라고 뭉뚱그린 다음에
이 공을 일단은 결론 삼아서 제시하면서
그것이 불성이어도 좋고, 진여라고 해도 좋고, 여래장이라고 해도 좋고
이게 정신적인 [구심력]이야, 이거야,
무아가 공으로 된 거죠.
그래서 무아라고 하면 뭐가 없다고 느껴지만
공이라고 하면은 텅 빈 충만이라든지, 진공묘유라든지
이것이 모든 가능성으로 반짝반짝
혹은 끓고 있는 그런 어떤..
그러나 실체이지만, 진정한 실체이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인식되지도 않고,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어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작용으로서만 그 존재감이 있고
그 작용한다는 것은
현상으로서만 드러나는 내재하는 법칙
이렇게 합의를 해서, 협상을 해서
영원한 정신적인 구심점을 제시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장사를 할 때도
삶을 살 때도, 태어나고 죽을 때에도
모든 변화에 있어서, 모든 인생의 불확실함에 있어서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변화해 가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것
영혼 불멸한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탐진치라고 하는 불필요한
어떤 욕심 이런 것들이 놓여지는
그렇게 해서 초기불교의 무상, 고, 무아, 연기
그다음에 사성제 팔정도 이런 것들을
여기서 다 포괄하면서도
부정의 언어를 긍정의 언어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그런 긍정의 언어로
정신적인 구심점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라고
저는 제 소견으로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포인트는
우리 인생이 지금 너무 짧고
근데 너무 치열하고
그런데 의미를 잘 모르겠고 하는 것은
총체적 난국이죠.
총체적 난국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라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그 관점만 벗어나면
그 관점만 깨고 나면
세상은 그저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또 아침과 저녁이, 낮과 밤이 교차되는 지구의 자전 공전처럼
끝없이 변해가는
아름다운 파노라마라고 볼 수도 있겠죠.
거기서 내가 꼭 뭔가 획득하고, 성취하고, 영혼 불멸하게 존재해야 되는가라고 하는
그 나라고 하는 것은 관념일 뿐이다 라고 하는 문제를
우리가 이해만 한다면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그 믿음
하나뿐이야, 둘이 아니야
그런 것도 일견 충분히 우리가 납득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납득하면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 무거운 짐이
훨씬 가벼워지거나 없어질 수도 있고
우리는 활발하게 우리의 삶을 잘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를 해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대승기신론 1심, 2문, 3대, 4신, 5행, 6자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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