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에 보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 나옵니다.
이것은 만물의 설계도인 ‘理’와 그 질료인 ‘氣’와의 관계를 설정한 이론입니다.
‘理’와 ‘氣’의 주종 관계에 따라
철학은 물론이고 정치와 사회의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정답일까요?
理에서 氣가 파생된 것일까요?
아니면 理라는 것 자체가 氣인 것일까요?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에서는 설계도와 재료가 뚜렷이 구분됩니다.
하지만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로 옮겨가면 理와 氣의 구분은 모호해집니다.
그래서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시각에서 보면 어떨까요?
불교는 태동부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브라만교에서 此岸과 彼岸으로 나누던 관습을 그대로 채용했으니까요.
此岸은 온갖 모순이 발생하는 현상계를
피안은 그런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이상향을 각각 가리킵니다.
불교는 이처럼 세상을 둘로 나누기에
성리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맥을 같이 하게 됩니다.
사실 힌두교와 초기불교를 비롯해서 웬만한 종교들은
모두 二元論을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차안(此岸)의 현실 세계는
생로병사가 지배하는 고해(苦海)이고 죄인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감옥인 셈이지요.
그렇기에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러 가지 가르침이 등장하고
그것들이 소위 말하는 종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차안(此岸)에서 피안으로 옮겨 갈 수 있을까요?
사실 피안은 고차원에 있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가는 길이 아예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심 끝에 찾아낸 방법이 此岸을 부수는 것입니다.
차원의 구조상 此岸을 부수면 피안이 남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此岸을 어떻게 부술까요?
此岸은 ‘나’라는 관념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나’를 없애면 此岸은 저절로 산산조각이 납니다.
‘나’를 어떻게 없앨까요?
‘나’는 생각에 의해 조성됩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생각 타파’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럼 생각을 어떻게 없앨까요?
생각과 싸워서는 백전백패입니다.
왜냐하면 먹물 자국을 지우려고 먹물을 덧칠하는 꼴이니까요.
그래서 수행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생각과 싸우지 않는 두 가지 방법을 찾아냅니다.
첫 번째는 생각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으로, 이것이 명상입니다.
두 번째는 생각과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으로, 이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이렇게 명상과 위빠사나로써 생각을 단절하면
‘나’가 없어지면서 차안(此岸)도 덩달아 사라집니다.
저절로 此岸에서 피안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이원론의 관점에선 싯다르타가 35세에 이룬 성불도 2프로 부족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육신은 차안(此岸)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때의 깨달음을 일러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 합니다.
그리고 80세에 입멸할 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 부릅니다.
세존의 입멸로부터 불기 1년을 삼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세상은 차안(此岸)과 피안으로 나누어져 있을까요?
여기에 강한 의문을 가진 수행자들이 나오게 되니
그것이 바로 달마에서 비롯한 중국의 선종(禪宗)입니다.
禪宗은 此岸과 피안이 나누어지지 않았다고 봤습니다.
당시 중국 사회는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물일원론이 팽배했고
수행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불교의 이원론을 바라본 것이지요.
여기에 송나라 때 출범한 성리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기일원론적 사고가 불교에 깊이 스며들게 됩니다.
그 결과
‘앉은 자리가 열반이다’, ‘번뇌가 보리이다’
‘중생이 붓다이다’, ‘마음자리만 보면 바로 깨닫는다’
‘견성이 곧 성불이다’와 같은 일원론적 사고가 확고해집니다.
결과적으로 차안(此岸)에서 피안으로 가는 시간이 크게 단축됨으로써
돈오(頓悟)의 기치가 올라간 것입니다.
이는 ‘체험의 수행’에서 ‘이치적 깨우침’으로 전환된 것이며
그렇기에 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그럼 禪宗에서는 頓悟를 어떻게 이룰까요?
선문답이든 간화선이든 그 핵심은 言語道斷에 있습니다.
생각은 늘 언어를 타고 흐릅니다.
그래서 생각이 언어의 길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겁니다.
마치 철도에서 기차가 이탈하는 것처럼 생각이 언어에서 어긋나게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기차가 전진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 역시 멈추게 됩니다.
그래서 선문답은 봉숭아학당의 ‘맹구식 동문서답’으로 채워지고
간화선은 ‘오직 모를 뿐’으로 귀결하게 됩니다.
어찌 되었든 생각의 멈춤을 경험하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삼라만상이란 것이
마음이 만들어 놓은 한바탕의 환영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기존의 이원론적 초기불교와 일원론적 선불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수한 것일까요?
단적으로 말하면 선불교가 보다 발전된 불교입니다.
원시적 이원론적 사고를 넘어선 것 자체가 불교의 원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불교가 중국과 일본에선 자취를 감추고
오로지 한국에서만 무려 700여 년 동안 계승 발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교에서 불교철학을 가르치던 로버트 지멜로 교수는
“당 송 시대에 만개한 禪의 황금시대를 보고 싶거든 한국의 선원에 가라”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선불교가 기존 불교에 비해 우수한 것은 맞지만
깨달음엔 여전히 2프로 부족하게 됩니다.
그건 선불교에서 말하는 一元論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백원짜리 동전을 보면 ‘이순신’과 ‘숫자 100’이 앞뒷면에 나옵니다.
기존의 이원론이란 ‘이순신’과 ‘숫자 100’이 갈라져서 거리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선불교에서 바싹 붙여서 100원짜리 동전을 만든 것입니다.
중생과 붓다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 존재하며
그렇기에 마음먹기에 따라 중생도 되고 붓다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전 방식의 일원론은
여전히 이원론적 사고 체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순신과 숫자 100이 붙어 있긴 하지만 앞뒤로 나뉘어져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물론 선불교의 수행자들이 이런 모순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일단 차안과 피안을 동전처럼 붙여 놓은 뒤에
언어(관념)가 끊어진 경계로 몰입해
남은 퍼즐을 풀게 됩니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해서 2프로 부족한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언어도단의 경계에선 깨달음의 정점을 찍을 만한 이성적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해탈과 열반의 체험이고
이것만으로는 세존의 무상정등각을 얻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런 이유로 선종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가
불교사의 금자탑을 쌓았으면서도 그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선불교의 화룡점정을 이룰 수 있을까요?
선문답이든 간화선이든, 아니면 참선이든 위빠사나든
어떤 수행을 막론하고
그 마지막엔 실존(제1원인)에 대한 증명을 놓아야 합니다.
實存의 눈을 찍어야
7백여 년 동안 그린 선불교의 그림이 활활 살아나 깨달음의 문호를 열고
아울러 인류의 정신문명을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진짜 선불교는
有無의 이원적 구조를 一元으로 만들어낼 줄 아는 지혜를 갖췄을 때 완성됩니다.
당신은 아직도 일체유심조의 경지를 깨달음으로 믿고 있나요?
그 상태에서 실존(제1원인)의 눈을 번쩍 떠 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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