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붓다가 말하고 싶었던 무아(無我)! 과연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Buddhastudy 2024. 4. 10. 20:24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원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가 잘되는 것입니다.

 

나가 잘 되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나가 존재한다는 명제입니다.

나가 존재해야 나가 잘 되어

궁극적으로 극락도 가고, 영생과 열반도 누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욕구에 찬물을 끼얹은 분이 계십니다.

그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세존은 아트만을 부정하고 무아를 기치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대들보는 [제법무아]가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무아를 매우 꺼려합니다.

무아가 되는 순간

나가 잘 될 수 있는 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존의 무아를 거부할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여기서 고심 끝에 찾아낸 것이 [비아론]입니다.

 

무아론을 표시하는 anstta에서 접두어인 an

없다아니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ab아니다는 뜻이 되면

나가 아니다가 되고

가 아닌 것을 계속 부정하면

그 끝에 진짜 참나가 남습니다.

 

결국 비아론이 되면

브라만교회 아트만(참나)과 같게 되고

연이어 본성, 참나, 불성이 성립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존이 주장하신 annta아나타는

무아일까요? 아니면 비아일까요?

 

세존이 아트만을 부정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아트만(참나)가 아닌 假我가아를 지워나가면서 찾게 됩니다.

그런데 비아가 되면

이것 역시 가 아닌 것들을 모조리 없앤 뒤에 남게 되는

초월적 자아를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

표현 방법만 다르지

비아와 참나는 같게 되는 것이지요.

 

만일 이와 같다면

세존이 아트만을 부정하지 말았어야 하고

그는 영원히 브라만교의 수행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원론적인 얘기를 떠나

가아와 참나의 발상은

매우 저차원적인 수준에 머뭅니다.

도대체 가짜 나는 뭐고, 진짜 나는 뭐란 말인가요?

 

1920년대에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가아와 진아 타령은 역사적 유물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가아][참나]

오로지 가 잘 되고 싶은 마음에 꾸며낸 관념이고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인류를 지배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세존이 [무아]라는 지우개로 그렇게 없애려 했어도

소용없는 일이었지요.

 

물론 비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아론의 허망함을 이유로 듭니다.

가 없는데 무슨 수행이며 깨달음을 운운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세계는

나가 있든 없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깨달음은 오로지 나와 존재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앎이 있을 따름입니다.

 

거울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얼룩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가 잘되려는 아상의 오염을 털어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 추구에 있어서 의 이익이 개입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존이 아트만을 부수고 무아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무아가 정답이라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들이 나 잘 되는 방향에서

진리적 자극으로 선회할 수 있도록

무아의 인터체인지를 꺼낸 것이지요.

 

가 잘 되기 위한 망념들

이를테면 해탈, 열반, 영생에 대한 기대심을 빼고

오로지 진리만을 궁구하라는 얘기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無我非我가 헷갈리시나요?

가 잘 되려 하면

당신은 영원히 시공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가 곧 차원의 족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가 사라져 완전한 무아가 된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무아가 되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나가 있든 없든

그런 건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존의 진리는 비아나 무아에 있지 않습니다.

수행자들이 묶여 있는

유와 무의 질긴 사슬을 끊어내는 수단으로

무아의 처방을 내린 것뿐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유와 무에서 자유로운 중도에 있고

그러면서 중도마저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불교 수행의 첫 발짝은

제법무아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불제자들이

참나론자들과 비아론자들의 온갖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아론을 고수해 온 이유입니다.

 

당신은 혹시

비아론의 달콤함에 매혹되어 있지는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