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선문답과 간화선의 허황된 실체! 말장난의 궁극을 달린다

Buddhastudy 2022. 1. 6. 18:39

 

 

 

대칭을 깨고 자유로워지려는 수행법으로

대표적인 것이 조사선의 선문답입니다.

 

수행의 가장 큰 적은 역시 생각인데

이것은 언어로 인해 생겨나는 분별을 먹으면서 맹위를 떨칩니다.

그래서 선문답은 언어도단과 심행처멸을 강조합니다.

쉽게 말해 언어를 가지고 놀면서 분별을 깨뜨리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조사들의 선문답을 보면

논리가 없는 동문서답은 기본이고

무시나 외면, 고함까지 곁들여져 있습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여차하면 터져 나오는 욕설과 몽둥이찜질도 다반사입니다.

 

이런 말장난과 기괴한 행동은 언어의 분별에 찌들어 있는 사고 체계에 일대 충격을 줍니다. 그러다 보면 생각이 끊어지는 순간이 오고, 이때 대오각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질서와 자유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질서를 깨면서 얻어지는 극한 해방감이나 카타르시스를 깨달음으로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선문답은 교종의 문자 노름에 대한 항거가 너무 과해 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고나 할까요.

이런 선문답은 간화선으로 더욱 정형화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90여 개의 선방에서 2천여 명의 수행자들이 화두를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 평균 3~4시간의 수면만을 취하며, 조주선사의 無字화두에서부터 이 뭣고’,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구자불성(狗子佛性)’, ‘마삼근(麻三斤)’같은 무려 1700여 개에 이르는 공안(公案)에 수행의 성패를 맡기고 있습니다.

 

이들이 닦고 있는 간화선은 모름을 기치로 들은 매우 독특한 수행법입니다.

그래서 화두엔 정답이 없습니다.

정답이 없기에 모르는 의식에 머물고 점차 진리를 알려는 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해서 무아나 참나에 이르면,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드러나는 것처럼 실상을 깨우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으로 도통하면 무지렁이가 될 우려가 큽니다.

흔히 무식 도통한다고 하지 않던가요.

간화선에서 얻어지는 무아나 참나의 경지엔 깨달음이 없습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생로병사를 받아들일 여유가 생긴 정도랄까요.

 

간화선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과학의 연구 자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익히 알듯이 우리의 뇌는 좌우 대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뇌는 외부와 정보를 주고받으며 하나의 유기체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뇌는 아무리 으로 구분하려 해도 그것이 잘 안 됩니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의 범위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불법에서 말하는 不二의 절대 상태와 유사합니다.

이에 비해 좌뇌는 우뇌로 흐르는 정보들을 언어화해서 분석하고 처리합니다.

특히 시간으로 배열해 미래를 예측하는데, 이때 이득과 손실의 결과를 수시로 내놓습니다.

이렇게 유불리의 선택에 의해 반응하는 정보의 흐름을 일러 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좌뇌의 가아와 우뇌의 무아가 둥글어가며 정보의 이합집산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좌뇌의 기능을 끄고 우뇌만 활성하면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좌뇌에 뇌출혈을 비롯한 이상 증후로 인해

붓다의 해탈을 이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법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선지식 못지않은 깨달음을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뇌가 과연 무상정등각까지 우리를 인도할 수 있을까요?

 

대개 수행은 좌뇌가 조장하는 아상을 멀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그리고 좌뇌의 아상을 억눌러 그 기능을 못하게 하면 꽤 높은 의식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경지가 환각이나 몽상, 또는 호르몬의 이상 분비에 의해 꾸며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까요?

 

 

거듭 말하지만 제1원인을 논리적으로 확증하지 못하면

설사 고차원의 경지를 맛보았다고 해도 그건 무상정등각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행자들이 그토록 떨쳐 버리려 하는 좌뇌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쪼개고 분석해서 논리적으로 답을 구하는 좌뇌는 잘만 사용하면

지혜를 키우고 무한한 반야를 증득하는 보물이 됩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정혜쌍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승찬은 신심명에서

를 깨닫는 건 어렵지 않다.

이것저것 분별하며 논리적으로 따지는 버릇만 없애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좌뇌의 논리가 우뇌의 공명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그 논리가 궁극에 이르러 산산조각 나면

오히려 우뇌의 미진함을 채워주는 퍼즐이 됩니다.

그래서 고만고만한 깨달음이 아닌 붓다의 무상정등각을 꿈꾼다면

결코 좌뇌의 논리적 사유를 포기해선 안 됩니다.

 

 

 

이처럼 진리에 대한 논리적 사유는 깨달음의 문고리까지 쭉 연결됩니다.

논리의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으면

대부분 출발 지점에서 맴돌다 인생을 다 소비하고 맙니다.

그럴진대 어찌 모름을 기치로 걸고 논리를 등질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간화선으로 얻어지는 무아나 참나의 경지를 발판 삼아

더 높은 단계의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름에 중독되어 논리적 사고가 떨어지는 부작용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간화선으로 득도했다는 수행자들을 보면

모두가 붓다라는 자족의 풍류에 취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요컨대 논리적 사유 체계는 수행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일정 수준의 학문이 필요합니다.

특히 수학이나 과학, 서양 철학은 논리의 대들보를 만들어 줍니다.

 

봄볕을 받으며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강아지만큼 고요한 선정도 보기 드뭅니다.

하지만 강아지에겐 깨달음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적 사유 체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종의 수행을 가득 메우고 있는 논리의 부재와 언어유희,

그리고 광인의 괴행은 문자 노름이라는 빈대를 한두 마리 잡으려다

불법이라는 초가삼간을 몽땅 불살라 버리는 우행일 수 있습니다.

 

말장난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물론 깨닫고 난 뒤엔 얼마든지 언어를 가지고 놀 수 있겠지요.

더불어 고함이든 욕설이든 몽둥이든 일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깨닫기 전에 그런 말장난에 발을 담그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말장난의 끝은 언제나 과대망상으로 귀결되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