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이 법안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이리저리 돌아다녀볼까 합니다. ”
“무엇하러 그리 돌아다니는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이 가장 친절하지”
법안이 확연히 깨달았다.
모른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모른다는 상태는 소크라테스 시절부터 논쟁거리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까요?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뭘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양나라 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인가요?”
“텅 비어서 조금도 성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제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달마가 알고는 있네요.
그런데 무제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너무 당당하게 말합니다.
사실일까요?
앙산이 중읍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불성의 참뜻입니까?”
중읍이 대답했다.
“내가 그대를 위해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겠다.
창문이 6개인 방에 원숭이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밖에서 ‘원숭아’라고 부르면 원숭이는 즉각 대답한다.
이처럼 6개 창문 전체를 통해 부르면
전체를 통해 대답하는 것이 바로 불성이다.”
앙산이 물었다.
“만약 원숭이가 잠자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읍이 앙산을 붙잡고 말했다.
“원숭아 내가 너와 이렇게 만나는구나.”
아마 흔한 일은 아니겠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적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은행 계좌번호나 로그인 비밀번호를 잠깐 까먹을 수는 있어도
어떻게 자기를 까먹냐고요?
이런 경우의 극단은 몰아경지라고도 하는데
자기를 잊고도 멀쩡히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를 다 압니다.
6개의 창문이 열려 있고 원숭이도 깨어 있습니다.
앙산은 원숭이가 잠이 들까 걱정하지만,
중읍은 바로 눈앞에서 원숭이를 부릅니다.
앙산이 스스로 앙산임을 까먹으면 원숭이가 대답합니다.
자기 이름과 사연만 까먹으면 부처가 대답합니다.
자기를 까먹기 위해
일부러 노력한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자기 자신을 불러
스스로 묻고 대답하며 가르쳤던
서암 사언 화상의 사연입니다.
“주인공아”
“응”
“항상 깨어 있어라.”
“예.”
“언제 어디서라도 남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네.”
깨어 있으라, 남들에게 속지 말라는 것이
어떻게 자기를 까먹으려는 노력일까요?
그것은 자기라는 이름과 사연이
자기라는 착각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착각을 까먹으라는 것이죠.
자기라는 이름과 사연에서 모든 착각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좋고 싫은 것이 나뉘고
이어서 착하고 나쁜 것이 니뉘며
세상 일에 대한 판단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육조 혜능을 쫓아오던 해명이 묻습니다.
“나는 법을 찾아온 것이지,
당신의 의발 때문에 쫓아온 것이 아니니
청컨대 길을 열어주시오.”
혜능이 말합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여기서 어떠한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
혜명은 그 자리에서 깨달았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예 모르면 아예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글공부를 하는 이유는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면 착각을 까먹을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고 나면 아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원리입니까?
소크라테스가 성인인 이유는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사약도 무섭지 않습니다.
이 원리를 우리가 정말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용담과 덕산의 사례입니다.
선과 깨달음에서 이미 소개해 드린 이야기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로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덕산이 용담을 찾아가 법을 청했는데 밤이 깊었다.
“밤이 깊었는데 왜 그만 물러가지 않는가?”
덕산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밖이 너무 캄캄해 덕산이 돌아왔다.
“바깥이 너무 캄캄합니다.”
용담이 등불을 켜서 덕산이에게 건네주었다.
덕산이 등불을 받으려고 하자 용담이 등불을 불어 꺼버렸다.
“덕산이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불교는 우리가 겪는 고통과 번뇌의 이유
그 시작이 무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지는 무명입니다.
즉, 밝지 않음, 어두움입니다.
그런데 덕산은 어두움 속에서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던 덕산은
떡 파는 노파에게 마음의 점을 어디 찍을지, 추궁을 당해
겨우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용담에게 빛을 빼앗깁니다.
모른다는 것을 알고 나면
무명이 곧 그 시작임을 압니다.
캄캄함을 아는 자는 어둡지 않습니다.
캄캄함을 분명히 이해하면
캄캄함을 아는 것은
이미 캄캄함과 함께 있음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문수보살도 깨우지 못하는 삼매에 빠진 여인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깊은 땅속에 사는 ‘망명’ 보살입니다.
밝음이 아예 없는 보살에게 깨움의 능력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이가 지름길로 가려면 어찌 해야 합니까?”
“근처만 가도 무서운 독사가 있다. 마주치지 말라.”
“만약 간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죽을 것이다.”
“독사를 피하면 되지 않습니까?”
“피할 자리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잃어버리면 된다.”
“어디로 가버린 것입니까?”
“풀이 무성해서 찾을 수 없다.”
“스님께서도 조심하셔야 하겠습니다.”
청림이 말했다.
“지독한 독기로구만.”
“자기 몸을 무는 독사는 죽지도 않으니
한밤중에 밟은 밧줄을 찾을 길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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