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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선과 깨달음, 선문답에 친숙해지기

Buddhastudy 2024. 11. 28. 20:15

 

 

문자선을 해서라도

선문답에 익숙해지는 것은 공부에 도움이 되고

익숙해진 것이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의 장애를 만들지 않는다면

일단 시작을 쉽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선이라는 불교의 공부 영역이

현대인들의 익숙한 사고방식을 흔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선에 익숙해진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평소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갖고

돌아보는 기회를 자주 갖는다는 면에서

명상과 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익숙하다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영어 단어가

매너리즘이라는 말인데

틀에 박힌 태도나 방식을 뜻하는 말이죠.

 

우리가 바라는 바는

이런 식의 익숙함이 아니라

자주 보니 좀 알겠다 싶은 familiar에 가깝습니다.

 

익숙해지기 위해

여러 선문답의 내용을 살펴보다 보면

일종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패턴이 익숙해지면

매번 가리키는 것은 같고

답도 거의 똑같다고 생각할 수 있죠.

그래서 문제도 답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건 그냥 형식입니다.

질문이나 답이 모두 형식입니다.

 

진리가 뭐냐?”

뜰앞의 잣나무다.”

그런 질문과 답을 염두에 두는 것이 매너리즘입니다.

 

반대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형식은 차용하되

익히 보았던 대답을 모두 지워버리는 것이 선 공부입니다.

 

대사가 대중들에게 말하길

온갖 말과 글에서 중생업을 끊어야 한다.”

어떤 종이 묻기를

어떤 것이 중생업을 끊는 구절입니까?”

그대의 입이 콧구멍과 같다.”

 

대사님이

말과 글의 의미와 뜻만 따라다니면

안 된다는 강론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듣던 스님 하나가

그게 도대체 어떤 겁니까?

예를 한번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대사님은

너의 입과 코가 같은 거라고 일러줍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꽤 여러 번 들을 수 있습니다.

친절한 해설도 많죠.

입이 콧구멍과 같다는 것은 하나의 비유이죠.

 

말하는 것이나 냄새를 맡는 것이나

모두 감각의 작용이 일어난 것인데

그것들을 아는 것은 그대의 성품이다.

말하는 것은 입이 아니라 성품이고

냄새 맡는 것은 코가 아니라 성품이라서

눈으로 먹기도 하고, 다리로 듣기도 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입니다.

 

이런 설명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단어를 알고 논리를 알면

그것을 이해한다는 익숙한 틀에 들어가게 됩니다.

 

실제로 저렇게 대답하기 위해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닐 때에도

마치 그런 것처럼 대답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착각은

패턴이 살짝 바뀌면

곧바로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서천 오랑캐는 어째서 수염이 없는가?”

서천 오랑캐는 달마스님을 말합니다.

우리는 달마도라는 그림을 통해

우락부락한 달마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달마가 수염이 없었던가요?

내가 달마도를 본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뭔 질문이지?

이 지경에는 귀로 보고, 코로 보는 답을 써먹을 수는 없겠습니다.

 

달마와 수염의 생각이 이르면

여기는 내 인상과 기억이 이미 동원되어

이 질문은 해답을 가진 수학이 되고 맙니다.

 

달마는 수염이 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잠깐만, 이거 선문답인데

뭔가 기발한 답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질문에 저의가 뭐지?

달마, 수염

수염이 성품인가?

아니면 성품에는 수염이 없는 건가?

 

익숙해지는 것으로는

선문답의 말과 글을 따라다니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장하는 익숙함은

그저 형식에 대한 친숙함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익숙함이란

그냥 각오하라는 명령에 가깝습니다.

선은 친숙해질 수 없는 거라는

사실에 친숙해지는 겁니다.

 

도곡이 와서 절을 하고 묻기를

경에 온갖 형상을 떠나면 부처라 하였으나

지금 눈앞에 온갖 형상이 분분하니 어찌 하여야 여이겠습니까?”

대사가 답하길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이에 도곡이 흔연히 기뻐하면서 이를 소중히 여겼다.

 

경전에는 온통 형상을 떠나야 부처라고 하는데,

저는 온통 형상으로만 보이니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라는 물음에 대해 대사는

넌 뭘 봤다는 거야?”라고 거꾸로 묻습니다.

 

대사님은 도곡이 봤다는 것에 대해,

도곡이 봤다는 형상에 대해

그게 뭔데?”라고 거꾸로 물은 겁니다.

 

대사는 형상으로 뭔가 보고 있다는 도곡의 생각을 이용해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형상으로 보인다는 그 이야기 자체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니까

아예 다시 한 번 보라는 겁니다.

 

이런 뉘앙스는 사실 글로만 보면 쉽게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해설도 또한 구차한 것임을 알면 좋겠습니다.

 

숱한 고민을 거쳐 대사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낸 도곡은

그 순간 생각이 깨져버립니다.

마치 호롱불이 꺼져버리자

깨달은 금강경의 왕자 덕산의 경우처럼

경계가 무너진 것이죠.

 

대사의 반어적 질문이

이 선문답의 형식입니다.

형식을 이해한다고 해서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수행자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형식이 보인다면

스승은 그 익숙한 형식을

뒤흔들 형식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문답은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의 재구성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르침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인용되는 선문답 중 하나는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단어들 때문에 인기가 있습니다.

똥 막대기 같은 것들이죠.

 

똥 막대기를 본 적도 없는 사람도

이런 자극적 표현에는 익숙합니다.

그래서 큰 감흥을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두 상황과 형식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불법의 저쪽 편은 어떻습니까?”

오줌 싸는 소리 하지 마라.”

깨치고 난 뒤에는 어떻습니까?”

아이고 똥까지 싸는구나.”

 

만약 이 문답을 저렇게 고색창연한 표현이 아닌

전혀 다른 표현으로 바꿔놓으면

꽤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될 수 있습니다.

 

유튜브 동영상의 특성상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으니

조금 순화시켜 볼까요?

스승에게 이런 답을 받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불법의 도를 알고 싶습니다.”

, 일단 현금으로 천만 원 걸자.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