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라고 해도 안 되고
죽비가 아니라고 해도 안 된다.”
일단 의미를 따라가면
끝이라는 걸 알지만
우리는 자동적으로 따라갑니다.
죽비란 대나무로 만든 도구입니다.
주로 소리를 낼 때 쓰는 불교 교단의 도구인데
가끔 좌선 수행할 때
조는 수행자에게 충격을 가하는 용도로도 씁니다.
죽비라는 단어를 듣는 것까지는 괜찮죠.
그런데 죽비라고 한다, 아니다라는 술어까지 포함해 문장을 들으면
우리는 순식간에 의미를 해석합니다.
그게 생각이죠.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게 이상한 건 아닙니다.
다만 선 공부를 하는 목적에 따라
그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바짝 뜨고 있어 보자구요.
저 말소리, 말을 하는 이의 입모양, 소리가 전달되는 공기의 온도와 습도,
스멀거리는 내 귓가의 진동과 눈동자의 흔들림
그런 것들을 느낄 정도로 뚜렷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치열하게 하면
그게 생생한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생각은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서, 종합적으로는 멍청하게 만듭니다.
생각이 아닌 감각으로 깨어 있으면
훨씬 잘 듣고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아예 없이
오직 감각으로만 상황을 접할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제 경험이니까 대강하는 설명이 아닙니다.
물론 그걸 경험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이해를 도울 수는 있겠네요.
저는 꽤 오래 전에
생각이 반나절 정도 끊어진 체험을 했습니다.
아마도 너무나 지치고 괴로웠던 상황 때문이었을 겁니다.
머릿속에서 회로가 단선이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했죠.
그런데 보고, 듣고, 느끼는 건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나뭇잎의 색깔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초록, 연두, 노랑 빨강이라는
색깔을 먼저 떠올리고
나뭇잎을 봤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지하철이 움직이면
그런 소리가 난다는 것도 처음 알았죠.
분명 그전에도 보고, 듣던 거였는데
완전히 처음 보고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생각 없이 보고, 생각 없이 듣는 것이
그런 느낌이라는 걸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네요.
어쨌거나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게 생생하고 살아있다는 그 느낌이구나.”
매일 보던 거리의 풍경 속에
가로수와 보도의 블록이 춤을 추는 듯했습니다.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었죠.
이 기괴한 체험이
반나절로 끝나버린 것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만약 그때 누군가
“저에게 당신이 구하는 진리가 무언가요?”라고 물었다면
“저는 뭐라고요?”
겁 없이 웃었을 겁니다.
무슨 그런 우스운 말이 다 있죠?
원숭이 똥구멍은 빨갛다.
빨간 것은 사과 그것도 아니고 말이죠.
우리 상황이 이렇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동굴 벽을 보고
동굴 벽에 비추인 그림자만 보고 사는
플라톤의 비유에 처해 있는 것이죠.
진짜 햇빛을 보는 순간
이 속임수를 깨끗하게 노려볼 수 있지만
내내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아요.
선 공부는 그런 기회를 일부러 만들려는 억지이자
우물 안의 개구리를 두레박에 담아 올려보내려는 처절한 노력입니다.
생각에 빠져 있는 이에게
생각에 따라가지 말라는 말은 무의미합니다.
일단 늪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빠지지 않을 수 있어요.
그 생각이라는 건 잡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생의 사명, 운명적 현실, 구도자의 진실 같은 거창한 제목도 많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은 전부 생각이고
문제라고 일어나는 것도 모두 생각의 문제입니다.
중이 물었다.
“어떤 것이 바로 근원에서 끊는 것입니까?”
대사가 주장자를 던지고 방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묻는 그것에서 답이 나옵니다.
답을 하되 답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답입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지나치게 생략되어 있어서 분위기 전달이 잘되지 않죠.
질문의 뉘앙스에 비해
답의 강도가 센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분명 문답이 이루어졌고, 대사는 끊도록 가리킵니다.
끊는 거기가 끊는 자리입니다.
중이 물었다.
“뱀에 발을 그려 붙이는 것은 묻지 않습니다.
무엇이 본분의 일입니까?”
“그대가 말해보라.”
중이 다시 물으려 하니 대사가 말했다.
“어찌 발을 그리려 하는가?”
처음 묻는 것은 사실 질문이 아니었고,
‘그대가 말해보라’가 질문입니다.
사족을 붙일 필요는 없으니
핵심만 짚어달라는 첫 질문에 대해 대사는
사족까지 들이대는 것을 보니 불요불급한 것이 가득함을 보고
아는 것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질문했던 이가 입을 열려고 하자
그게 사족이라고 쏘아붙입니다.
답을 하지 않으면서도 답을 한 셈입니다.
이렇듯 질문과 답은 오가지만
사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손가락이 여기저기를 가리키지만
서 있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일 뿐
그것은 모두 달을 가리킵니다.
본 적도 없는 달을 본 것처럼 생각해도
손가락이 땅바닥을 가리키는데 아는 척하는 것은
역시 통하지 않습니다.
모른 척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대사가 원주를 불렀는데
원주가 오자 대사가 말하길
“원주를 불렀는데 네가 왜 오느냐?”
원주가 대답하지 못했다.
대사가 다시 시자를 불러, 수자를 데려오라 했는데
수자가 오자,
“수자를 불렀는데 니가 왜 왔느냐?”
수자도 대답이 없었다.
원주를 오라고 했는데
자기 이름이 원주인 자가 왔으니
왜 왔는지 물어보는 것이고
수자를 오라고 했는데
자기 소임이 수자인 자가 왔으니
왜 왔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대답이 없었던 것이 곧
답을 못한 것은 맞습니다.
명품 답이 따로 있을 수 없는 질문이죠.
왜 왔는가?
대사는 친절하게 다 설명해 주었습니다.
“원주를 불렀다, 내가 원주냐? 아니면 네 이름이 원주냐?”
수자를 불렀다.
“네가 수자냐? 아니면 네 소임이 수자냐?”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친절한 법문에 가깝습니다.
본인의 사례와 수자의 사례를 통해
두 번이나 반복을 했으니
원주가 한마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습니다.
“이름만 가지고 왔는데 원주가 정말 보이십니까?”
자, 이제 다시 한 번 반복해 보죠.
죽비라고 해도 안 되고
죽비가 아니라고 해도 안 된다.
어쩌시겠습니까?
네, 그날 누군가는 죽비를 든 스님에게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가
죽도록 맞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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