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2600년 동안
세 차례 대전환을 겪으면서도
더욱 개방적으로 진화, 발전해왔다.
-켄 윌버
즈나나는 지식 또는 앎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입니다.
특별하게는 우주적인 실제를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즈나나 요가를 한자로 옮기면 ‘지혜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 수행이 불교의 독점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즈나나라는 말 자체가 힌두이즘에서 나온 것이죠.
궁극에 이르는 방법으로 불교가 제시하는 방법의 특징이
지혜수행에 가깝기 때문에
대표적인 즈나나수행으로 불교수행을 드는 것입니다.
누군가 ‘불교의 지혜수행’이라는 제목을 들고
한 편의 동영상으로 그것을 설명하려 했다면
저는 처음부터 완전히 오해와 착각으로 시작한 거라고 한마디 했을 겁니다.
말 그대로 팔만대장경 목판을
승용차 트렁크에 싣겠다는
무식하고 교만한 만용을 부린 것이 분명합니다.
불교의 종파들이 모두 공유하는 핵심 내용만 다루어도
시리즈 3편은 넘어갈 겁니다.
당연히 그런 자료들은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이트에 널려 있기 때문에
제가 그것을 따로 소개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천 수행 시리즈의 모든 내용이 그렇지만
여기서도 지혜의 수행은
제가 이해한 파편적인 내용으로 설명될 겁니다.
다만 그 내용은 주로 깨달음 지도가 제시하고자 하는
수행 체계에 필요한 내용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불교 수행법은 모든 것을 다루지는 않는다고 보면 됩니다.
불교는 한마디로 앎을 다룹니다.
직접적인 앎은 곧 깨달음입니다.
깨닫고 나면 앎에 이르기 위해 필요했던 언설들은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오온개공을 깨달으면
84000 법문은 모두 버려도 된다고 말합니다.
지혜의 수행이 그 말에서 느껴지는 철학이나 학문의 뉘앙스와 많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학의 내용이 어마어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계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마주하게 되며
석가세존은 이 수많은 경우의 수에 맞도록 가르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뗏목은
나뭇가지 하나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설령 그것이 강을 건넌 이후에는
버리고 갈 것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불교의 가르침은
삼법인, 사성제, 육바라밀, 팔정도 같은 축약된 정의들입니다.
그 정도만 알면
불교 가르침의 대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는 외워야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치 기독교 신자가 주기도문을 외워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혜수행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혜의 초점과 그것을 얻기 위해 행해야 하는 필수 행동지침에 해당할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성제나 팔정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 지도에서도 심법인, 사성제, 팔정도를
필수적인 이해의 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그것을 짚고 가겠습니다.
사성제는 알다시피 고, 집, 멸, 도의 4가지 진리입니다.
사제의 첫째는 고제인데
불완전한 현실을 바르게 보라는 지침입니다.
인도말인 두카는 세상의 고통을 말합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의 시작이므로
불교 수행의 시작은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을 바르게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둘째는 집제인데
고통의 이유에 대해 알라는 지침입니다.
붙잡는다, 집착한다, 추궁한다는 집의 대상은
바로 갈애, 욕망입니다.
감각적 욕구, 정신적 욕망과 같은 것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탐진치라는 삼독의 용어가 쓰입니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끌어당기고 싫어하는 것을 밀어내는
어리석은 반복을 통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멸제입니다.
고와 집을 알았으면
이것을 해소할 목표를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 지도가 제시한 목표
즉 깨달음에 대해 그 방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론, 인식론을 통해 그려보고자 했던 목표 지점이
바로 멸성제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은 도제이며
이것이 바로 수행의 방법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수행에 이르는 원리를 차례로 밝히고 있으며
왜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득하고자 합니다.
불교 수행을 지혜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믿거나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왜 수행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정리해서 제시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도제의 내용은
우리가 알고 싶은 수행법인데
구체적으로는 팔정도에 해당합니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른 수단으로 생계를 잇고, 바르게 노력하고, 바른 신념을 가지며, 바르게 선정하는 수행법입니다.
팔정도를 요약하면 삼학이 됩니다.
바로 계율과 선정, 그리고 지혜라는 것이 삼학의 요체입니다.
[계]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몸과 마음가짐에 해당하며
지켜야 할 계율과 실천해야 할 선행으로 구성됩니다.
[정]은 집중과 각성을 행하는 수행을 말합니다.
우리가 불교라고 하면 떠올리는 좌선, 염불, 화두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의식 수준에 따라 집중하는 대상과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선정이란 생각 없음의 상태를 추구한다는 근본적 의미는 같습니다.
[혜]는 계와 정을 통해 세계와 나의 진실을 깨닫는 것 자체를 말합니다.
석가세존이 알았던 것을 우리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의 이치를 이해하고 내 삶에 적용해
내가 스스로 굴곡의 테두리를 깨고 나와야 한다는 지침입니다.
후대에 전개되는 대승불교의 육바라밀도 사막에 기초한 것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바라밀이 육바라밀인데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해주는 자리이타의 보살행을 강조한 것일 뿐
다른 내용이 추가된 것이 아닙니다.
실천 행위에 대해 조금 더 명확하게 지침을 한 것이죠.
불교 수행법은 워낙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인터넷을 통해 충분히 찾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제가 그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그대로 깨달음 지도에 수용할
사성제와 계정혜 삼학은
용어부터 제대로 이해해서 실생활에 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계율은 무엇인가?
나의 선정은 어떤 방식인가?
나의 지혜 공부의 주제와 자료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정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성제와 팔정도의 단어 하나에는
마어마하게 많은 가르침이 따라옵니다.
그것들을 정성스레 읽고 새기는 것만으로도
마음공부가 될 정도로 깊은 가르침들입니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계속 스스로를 혁신시키면서
신화적 수준에 머무른 다른 종교들에 비해
앞으로 우리 인류가 영성을 추구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켄 윌버는 통합 불교에서 평가합니다.
불교 수행의 강점은
이렇게 체계화된 지식 체계가 공개된 상태로 제공되어 있고
그것이 역사 전통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해석, 재정리되어 있어서
왜곡할 여지가 매우 적고
이해를 위한 자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권위 있는 사람에게 휘둘릴 이유가 없고
그 전범에 비추어 진실성을 판단하기가 쉽기도 합니다.
반면 불교수행의 단점은
이치와 원리의 단순함에 비해
교학을 위한 자료가 너무 많고
단순화해서 실천의 교범을 간결하게 정리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두카, 고란 무엇인가?
그저 괴로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불교는 생로병사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같은
8가지의 괴로운 범주를 제시합니다.
모든 분야가 이런 식으로 자세하고 체계적이어서
“이걸 다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수행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죠.
찬찬히 접근하면 됩니다.
하나씩 하나씩 그림을 그리듯 알아가면 됩니다.
지혜수행의 가장 큰 강점은
깨달음의 최대 난제인 생각을
인정하고 이용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극복하는 선정 방법까지 동시에 동원한다는 것입니다.
막연한 신비가 없기 때문에 현혹될 것들이 없습니다.
이성, 과학이 키워드인
의식수준 400 대가 불교 수행에 잘 맞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IAMTHAT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IAMTHATch] 유교의 행위수행 (0) | 2024.12.04 |
---|---|
[IAMTHATch] 선과 깨달음, 답하되 답하지 않기 (0) | 2024.12.03 |
[IAMTHATch] 선과 깨달음, 선문답에 친숙해지기 (0) | 2024.11.28 |
[IAMTHATch] 실천수행 방법 (0) | 2024.11.27 |
[IAMTHATch] 선과 깨달음, 초심자의 선문답 이해 (0) | 2024.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