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 덕성은 절강성에서 노를 저어 뱃사공을 하며
왕래하는 이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협산 선회가 스승의 권고로 이 뱃사공 선사를 찾았다.
덕성이 말했다.
“천 자나 되는 낚싯줄을 드리운 것은
깊은 물속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세 치 갈고리를 벗어난 경지를 그대가 말해 보겠는가?”
협산이 말을 하려고 하자 덕성이 밀쳐서 물에 빠뜨렸다.
협산이 겨우 헤엄쳐 나오자 다시 밀치며 말했다.
“자, 어서 말해보라.”
협산이 뭐라 말하려 하자 또 밀쳐버렸다.
협산이 깨치는 바가 있어
고개를 세 번 끄덕여 보이자 덕성이 말했다.
“낚싯줄을 들이우는 것은 그대 마음이지만
맑은 물이 흐르지 않아야 뜻이 성취된다.”
협산이 겨우 정식으로 물었다.
“떡밥을 꿰어 낚싯줄을 드리우는 스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물고기가 있나 없나 살피려는 것이다.
자, 이제 말해보라.”
“말 뜻은 깊지만 방도가 없고
혓바닥은 놀리지만 아무런 말도 없습니다.”
“모든 강물에 낚시를 던져 봐야 금빛 잉어를 낚는다.”
협산이 귀를 틀어막자, 덕성이 옳거니 했다.
선과 깨달음에서는 대부분 세 장면이 넘지 않는 선문답만 소개했는데
그 두 배가 넘는 선문답이
좀 낯설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런 선문답도 많습니다.
문답이 길어지고 설명이 늘어지면 핵심을 놓치기 쉽죠.
선에서는 이것을 두고
“말이 길면 수상하다”라고 합니다.
이야기가 길지만 수상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협산을 밀쳐 물에 빠뜨린 덕성의 행동은
다른 사례에서도 익히 보던 것입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이나 빠뜨린 사람이 주고받는 법문이
꽤나 여유롭습니다.
낚시를 하되 물을 흐리면 방도가 아니고
방도가 아니니 성취하는 결과가 없을 것입니다.
이 복잡한 퀴즈에 협사는 귀를 막습니다.
마치 맹수에 쫓겨 도망가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처럼
한순간 견문각지에 대한 해석이 중단된 상황에서
과연 저렇게 뜻을 알아 답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어느 날 약산 선사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법당이 무너진다. 법당이 무너진다”
절에 있던 스님들이 놀라서 몰려나왔고
버팀목을 찾고, 무너진 곳을 찾느라 난리법석이 되었다.
약산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음, 내 뜻을 알지 못하는구나.”
그러면서 열반에 들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다는 생각을 통해 이해합니다.
그래서 자기라는 법당이 없으면
절 집이 없는 것으로 잘못 알기 쉽습니다.
우리는 늘 내가 뭘 한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현대 뇌과학은
그런 상식이 사실이 아니라고 실험으로 입증해 일러줍니다.
그것은 익숙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뭘 한다는 생각이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가고
거기에 나도 곁들여서
이런저런 것들을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는데
이것은 의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혜장 스님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마조가 다가와 물었다.
“무엇을 하는가?”
“소를 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풀밭에 들어가라고 하면 바로 고삐를 잡아당기지요.”
“자네가 진짜 목동이구만”
사실 우리가 아는 행위자,
즉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나라는 자아는
목동이 보는 소에 불과합니다.
고삐가 풀려 있어서 이것을 소라고 여겨 본 적이 없을 뿐입니다.
고삐를 쥐어 풀고 당길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것이 소였음을 압니다.
이것은 말로만 소와 고삐를 운운해 봐야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대안이 백장을 만나 물었다.
“부처를 알고 싶습니다. 부처는 누구입니까?”
“소를 타고 와서 소를 찾느냐?”
대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처를 안 뒤에는 어찌해야 합니까?”
“소를 탔으면 집에 가거라.”
“앞으로는 어떻게 간직할까요?”
“목동이 소치는 것도 못 보았느냐?
지팡이를 들고 지켜보면서
남의 밭에 못 들어가게 하지 않더냐?”
소를 타고도 목동이 아니면 소에게 휘둘립니다.
매번 휘둘리고 자주 휘둘리면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가
무섭고 무서워 그냥 소와 한 몸이 되어 버립니다.
고삐가 없는 소와 한 몸이 되어 벌판을 떠도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입니다.
소가 가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내가 소를 이끌어 여기 왔을 뿐이라고 기뻐하며 두려움을 삭입니다.
“무엇이 해탈입니까?”
“누가 너를 속박하더냐?”
“무엇이 정토입니까?”
“누가 너를 더럽히더냐?”
“무엇이 열반입니까?”
“누가 너에게 죽고 사는 일을 주더냐?”
소에서 내려야 합니다.
물에 빠져야 합니다.
그래야 소를 보고 배를 탈 수 있습니다.
그래야 고삐를 찾고 노를 저을 수 있습니다.
일단 떨어져 나가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라고 여겼던 행위자가 사라져도
우리는 멀쩡하게 보고 듣고 느끼며 활보합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나라는 건 그냥 그럴싸한 가정이라고
현대 뇌과학이 알려줍니다.
어느 중이 조주에게 물었다.
“우주 만물과 벗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조주가 답했다.
“그건 사람이 아니지”
“배를 타고 소를 타고 사람도 탔는데
다 꿈속 일이니
잠꼬대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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